내일이 추석명절이죠.
국어사전은 추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추석은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일 년 농사를 잘 짓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명절이다.’
일 년 농사가 잘 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좋았는데, 햇볕과 비를 주시고 곡식에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이 누군지를 몰랐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우리도 추석명절을 맞아 올해도 인도해주시고 영혼과 육체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좀 길지만 일부분만 보는 것 보다는 전체를 보는 것이 더 좋은 내용이라 한번에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시를 읽어서는 시의 구조가 한 번에 다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번 되풀이 해서 읽다보면 시의 운율과 형식이 눈에 들어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네가지 고통을 예로 들고 그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고통의 문제들을 다루기에 앞서 시편기록자는 먼저 1절에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 힘든 상황에 놓이고 골치아픈 문제들을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반응은 언제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인생에 다양한 문제들이 터질 것이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영원히 인자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겠죠.
우리 삶에서 무언가 일이 터지는 것이야 시편기자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겠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선하고 인자하실까요?
하나님이 선하고 인자하신지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2절에 보니 우리를 대적에 손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고 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노예의 몸값을 주고 구해줬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대적의 손에서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속량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값없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죄의 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해내신다는 것을 구약에서 벌써 복선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구속, 즉 주님의 죽음으로 값을 치르고 구원해 내시는 십자가의 구속을 암시하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어떨 때 확신하게 됩니까?
나를 위해 희생할 때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앞이 캄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의심이 들 때, ‘그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지. 지금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으시지.’
이렇게 생각하면 의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죠.
애굽의 노예에서 풀려나 보았고,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본 역사가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속량의 의미, 구원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묶이고 사탄에 속해 있다 풀려난 사실을 실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눈으로 보여주시려는 것이 바로 출애굽이고 출바벨론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시대를 살았다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마 더 실감이 났을 것 같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고 구원하셨으니 그 분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스라엘백성들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거듭 구원을 베풀어 오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앞으로의 삶 또한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앞으로의 어려움 중에도 우리에게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피곤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광야사막을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목적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편은 애굽에서 탈출한 세대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는 저들은 분명히 예루살렘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던 바벨론의 귀환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부터 예루살렘 성읍까지 1500킬로 정도를 여행할 때 방향을 알 수 없고,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두려운 광야 사막을 직면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어느 순간, 마치 광야에 선 것처럼 다음 목적지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 지, 내 앞에 황량하게 펼쳐진 동서남북 중 어디가 내가 가야 할 길인지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공연히 인생광야에 모래바람이 불어 와 길을 묻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기로에 서서 수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진로를 찾아가는 청년들도 앞 길이 참 광야같이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경제활동 인구 중 세 명 중 한명이 비정규직인 시대를 사는 청년들입니다.
게다가 청년세대의 경우 두명 중 한명이 비정규직이라고 하죠.
차라리 만년 백수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청년들의 우울감이 더 높다는 통계가 있더군요.
그러니 이 땅에서 과연 내게 꼭 맞는 직장을 얻어 꿈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인터넷 사이트에서 중국 모우스사막에 홀로 나무를 심는 중국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여인 혼자 황사의 발원지인 모우스사막에 20년간 나무를 심어 여의도 면적의 40배가 넘는 숲을 가꾸고 채소를 재배하게 된 이야기 입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오직 모래만 있는 그 사막입니다.
매일 그 곳에 풀씨를 뿌리고 나뭇단을 날라다 심는 고된 작업으로 두 아이를 유산하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 지금 가로수 길이 뻗어있고 녹색의 싱그런 채소가 자라고 있는 광경을 보니 정말 눈물이 날만큼 감동이 되더군요.
여자 혼자 사막을 다스리겠다고 작정을 하고 눈물로 씨를 뿌리니 저런 일이 일어나는것입니다.
사람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들이죠?
우리 환경이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황량한 사막 같다 해도 땅을 파고 작은 씨를 계속 뿌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들이 광야 사막에서 부르짖었더니 마침내 그들을 안전한 성읍으로 인도해주셨다고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눈을 떴더니, 한 순간에 소망하던 그 자리에 내가 서있더라는 게 아닙니다.
7절에 보니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셔서 결국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사막의 길도 한 걸음씩 걷는 것입니다.
어디에 씨를 뿌려야 할지 모를 만큼 내 삶의 주변이 척박하다해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길을 인도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씨를 뿌리고 있지만 어느새 모래바람이 와서 흔적도 없이 덮어버린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십니다.
단 시편기자는 분명히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기댈 언덕이 없고 황무지에 홀로 서있는 것 같을 때 길을 보여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한 걸음씩 성실하게 앞으로 나가면 분명히 소망하는 아름답고 안전한 성읍에 도달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번째는 쇠사슬에 매여 꼼짝하지 못할 때입니다.
10절에 보니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지간한 고난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이 옴짝달싹도 못하게 환경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때로 죽음이 이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일도 만나게 된다는 것이 삶의 두려움입니다.
사람관계에 묶일 때가 있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로 묶일 때가 있습니다.
가정이 시련으로 꽁꽁 묶일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이 여러가지 이유로 묶일 때 절망감에 신음이 절로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정말 고되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죠.
시인은 포로로 묶여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감옥 같은 환경에 갇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다 포로생활에 갇히게 된 것이죠.
아무리 우리가 무죄하다고 우기고 싶어도 우리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쌓여 모든 길이 막히고, 손발이 다 묶인 것 같을 때,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에 의한 것일 때가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따르지 않고, 내 능력과 세상적인 방식으로 질주하며 살다 어느 순간 손대기 힘든 어둠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아니라고 계속 감동하셔도 우리가 자기 좋은 대로 하잖아요.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것은 나만을 위해 신나게 달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달려가는 길에 하나님은 반드시 제동을 거신다고 시편기자는 경고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발을 거시면 엎어질 수밖에 없고 누구도 도와서 일으켜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만함으로 생긴 문제 중에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설령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하나님 없이 단독 질주하다 생긴 참패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막을 방황할 때든, 불순종의 결과로 손과 발이 다 묶여있는 때에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시한 삶의 네 가지 고통이 각 사람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오지만 탈출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인지를 분명히 알고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인 문제들이 도대체 어디서 실마리가 풀릴 지 기약도 없고 소망도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할 때 하나님이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심을 오늘 다시한번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십니다.
세 번째는 미련하게 죄를 범하다 사망의 질병을 만난 때입니다.
17절을 보니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함으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이냐면 18절에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식욕이 다 떨어지고 사망의 문 앞을 오락가락 할 정도로 큰 질병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무서운 재난 중 하나가 질병이라는 것을 요즘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큰 고난을 만날 때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질병과 사망이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온 것이죠.
거기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악을 범하던 자들이 결국 몸의 환난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린 게 꼭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전혀 아니라고 볼 수도 없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에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지나치게 근심하는 것도 질병을 불러오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미련하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암을 유발할게 분명한데도 흡연을 하고, 지나치게 음주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탕한 생활 뒤에도 반드시 육체의 질병이 따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또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몸을 혹사하는 것도 다 건강을 자만하고 미련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사망의 문에 이를 때에도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역시 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니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간절히 부르짖어 구할 때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응답이 가깝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간절하지 않지 않습니까?
간절함이 있어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을 최근에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지난 주 동네 병원으로 옮기셔서 치료를 더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상태가 좋아지지가 않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대로라면 언제 퇴원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매일 기도했었지만 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통한 다음날 열이 딱 떨어지고 바로 퇴원할 수 있을 만큼 호전되셨습니다.
퇴원해서 잘 회복되고 계십니다.
성도님들을 위해서도 우리 사역자들이 항상 기도하지만 더 간절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도님들도 기도에 더욱 간절함을 담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간절한 필요와 소원을 꼭 좀 들어주시길 강청하는 기도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상하게 불신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은 것이고 응답이 가깝다고 믿습니다.
치명적인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간절함에 응답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신 결과에 대해 책임질 자신이 있다면 간절함을 갖고 끈기있게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네 번째는 인생이 항해에서 잔혹한 폭풍을 만났을 때입니다.
이들은 배들을 바다에 띄우고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상업을 하고 돈벌이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예기치 않은 재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신만만하고 잘나가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잘나가던 생업과 직장 생활에서도 불현듯 위기를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풍요로운 해상무역을 하던 사람들이 잔혹한 광풍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되는 상황을 본문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안전하던 일터에서도 뜻하지 않은 낭패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때로 믿었던 회사에서 실직을 당하기도 하고, 사업의 실패로 금전의 손해를 보는 그런 문제들이 얼마든지 우리 삶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믿고 의지했던 내 밥줄이 위태해질 때만큼 불안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최근 58년 개띠 세대의 정년시기가 임박했다고 합니다.
물론 정년까지 온 것만해도 로또 맞은 것만큼 대박이었던 것이죠.
58년 개띠인 저희 남편이 은행에서 강퇴당한게 벌써 7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정년을 채우기 어렵다'는 말이 다 나돌겠습니까?
잘 나가던 직장을 이런 저런 이유로 그만두고 재취업을 계획하지만 원하는 대로 직장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환경이 요동하고 깊은 수렁에 곤두박질 칠 때도 시편기자는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느끼고 이러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려나 두려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중에도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이유를 오늘 본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4절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선원들은 거센 풍랑에 이리저리 뒹구는 잔혹한 폭풍 속에서 얼마나 안전한 항구를 고대하겠습니까?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항해가 어려워질수록 선원들이 항구를 더욱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시련이 커질수록 하늘은 점점 더 '소원의 항구'가 된다.“
우리를 동요케 하는 모든 풍랑들은 우리의 염원을 진정한 소원의 항구인 천국에 두도록 우리를 연단하신다는 것이죠.
땅만 바라보고 땅에서만 만족을 구하던 우리가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점점 소망을 둔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을 뒤흔든 풍랑 앞에서 비로서 잘나가는 내 재능도 지혜도 지각도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안전한 항구가 그리울 뿐이죠.
풍랑 속에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야 하나님은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도 잔잔하게 하십니다.
또 그들이 평온해진 환경으로 인해 기뻐하는 중에 어느 덧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풍랑이 일고 배가 흔들거리고 있을 때 우리 소망을 다시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물결은 잔잔해지고 안전한 포구로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본문의 네가지 고난의 상황에서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든 탈출구는 하나님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짖기만 하면 번번히 하나님은 구해주신다는 것이죠.
또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은 이 모든 일들을 치밀하게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시야를 벗어나 일어나는 일은 이 땅에 단 한 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감찰하시고 우리를 24시간 주목하시고 우리의 내면까지 들여다 보고 계신 전능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되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도 아니시라면 어떻게 이 우주를 만들고 이 경이로운 창조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꽃 한송이, 작은 벌레 한마리 안에 담긴 무한대의 지혜를 생각하고, 또 이 넓은 세계에 치밀하게 설계 된 모든 법칙과 원리들을 떠올리면 정말 어찔해집니다.
우리의 생각의 한계로는 누군가 이런 어마 어마한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불가능한 것 같아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이 광대한 세계를 손수 만드셨을까 의문이 생기는 것이죠.
히브리서11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눈을 들어 천지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의 지으신 손길이 느껴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의 오장육부를 지으셨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고난을 파수하고 계십니다.
시편 31장 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욥기 31장 4절입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의 모든 것을 부모의 눈이 쫒고 있듯이 우리의 모든 삶과 생각까지 하나님의 눈이 쫒고 계십니다.
위기를 만날 때 부르짖어 기도하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편 기록자는 인생이 당하는 네 가지 환난을 보았고 그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을 이렇게 마치는 것이죠.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오늘 시편을 보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 아닌가요?
자기의 잘못과 오만으로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면 언제든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이런 아버지의 도움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동일하신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신실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무고한 환경으로 힘들때나, 나의 실수로 일이 망쳤을 때나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구하고 또 모든 일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9.1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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