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9편은 시편 중의 왕관이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신앙적인 깊이나 하나님께 대한 탁월한 지식이나 아름다운 표현력이 정말 우리를 압도합니다.
또 모든 시가 그렇듯이 다윗의 삶의 자리, 그의 생애가 녹아있는 신앙간증이라고 볼 수 있죠.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그의 평생에 발견했고 교제했고 따랐던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깝게 우리와도 함께 하고 계신지를 깨닫는 큰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주제가 세 부분으로 잘 나뉘어져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다윗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참 복잡미묘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남이 아는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남들이 날 이해하지 못해 속상하다고 합니다.
가족들도 내 마음을 몰라주니 불행하다고 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내 문제와 내 마음을 사실 그대로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명도 없을 겁니다.
가족일지라도 그건 안됩니다.
우리는 참 숨겨야 될 게 많은 존재들입니다.
답답할 땐 정말 내 속을 누군가에게 다 털어 보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일지 모릅니다.
정치인생을 살았던 다윗은 더욱 더 그랬을 것입니다.
정치판에서야 오늘 나와 대사를 모의했던 사람이 언제 적이 돼서 그걸 약점으로 쥐고 위협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실제로 다윗의 최측근이었던 아합장군이 나중에 그런 관계가 되었죠.
다윗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다 알릴 수 없었습니다.
나를 알리고 싶지도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진정한 나를 몰라주는 게 고독한 게 인생의 덫입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현실과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지만 항상 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기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신 줄 믿습니다.
나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항상 변치 않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지만, 다윗의 그 하나님이 우리 곁에도 계십니다.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를 이미 아시고, 나도 감당하기 힘든 나를 완벽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진짜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습니다.
오늘 다윗의 시를 읽어보면 오랜 시간 쫒기고 유리해야 했던 그의 생애와 고독했을 삶이 슬며시 묻어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고 확신있게 오늘 시로 남겼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지 다윗은 정말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 머리 위에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눈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따라다닌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게 믿어지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속마음까지 다 아신다고 합니다.
1절을 보면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신다고 하죠.
여기서 살펴본다는 것은 금속을 찾기 위해 땅을 뚫고 헤치며 샅샅이 뒤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샅샅이 탐색하고 계신 것입니다.
4절에도 보면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아직 혀에 말이 있기도 전에’ 벌써 아셨다는 뜻입니다.
입에서 우물거리고 아직 꺼내 놓지 않은 말도 주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완전하게 우리의 안팍을 감찰하고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끊임없이 주목하신다는 것이 매순간 믿어지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충만한 초월자이시지만 강한 확신으로 우리 곁에 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죄의 본성을 짊어진 채 불확실하고 위태한 이 땅을 살아가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는 신앙의 체험이 있어야 우리가 쉽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왜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가 그렇게 어렵냐 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이 지금 현재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어디 멀리 계신 하나님을 불러 오려니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생생한 확신을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신앙의 삶에 점진적으로 확립되는 것이고 체험을 통해 알아지는 것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건져주신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다윗 한사람을 잡아 죽이지 못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어떻게 수천명을 동원해서도 그렇게 번번이 다윗을 놓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앞뒤로 둘러싸고 죽음에 넘겨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 인식은 절대적으로 그의 살아있는 체험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다윗은 연이어 어느 곳에도 계시는 우주의 초월적인 하나님과 기묘한 창조와 공의로운 심판을 웅장하게 선포하지 않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계시 된 말씀에서 깨닫게 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윗처럼 확신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계시해 준 이 모든 말씀들을 성령님의 조명으로 깨닫고, 일상에서 그것을 체험하고 검증해 가며 점점 확고해 지는 것입니다.
처음엔 기도를 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나, 찬양을 드릴 때 어느 순간에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기도했던 간절한 문제들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경험들을 통해 정말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렇게 매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훈련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쁜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 나를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향해 종종 묵상하는 신앙의 훈련은 나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점차 확신하게 해 줄 것입니다.
또 소소한 생활의 문제들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더욱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앞뒤에도 하나님이 에워싸고 계십니다.
모든 상황을 이겨나갈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매만지시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있습니다.
주님이 에워싸는 삶은 정말 평안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할 때 뿐 아니라 일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주시하는 하나님의 눈길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이 이해할 수가 없이 기이하다고 오늘 고백합니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모호하게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분명히 다윗과 같이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체험되고 믿어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는 열심과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진지한 신앙의 삶을 통해 점점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앞뒤로 둘러싸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나가게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어느 곳에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고 어느 곳이든 우리가 있는 곳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라고 합니다.
먼저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다윗에게도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 앞을 피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하나님 앞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과의 미묘한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범죄 한 아담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었던 본성은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 속에 강하게 전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안에 평강과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우리의 육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 친근한 죄악 속에 적당히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도 밧세바를 연모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고립시켜 죽게 했던 범죄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탐욕과 갈망이 우리 안에 비누거품처럼 부글거릴 때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른다는 것이 불가능하십니다.
나단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소위와 심중을 꿰뚫는 말을 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다윗은 자신이 피하고 감추려 했던 모든 순간을 보고 계신 하나님을 배운 것입니다.
8절에도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를 성령의 감동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하늘에 오를 만큼 은혜롭고 거룩한 신앙 안에 있다가도 지옥 같은 죄책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육신을 갖고 이 땅을 사는 신자들입니다.
또 하늘에 오를 것만큼 상쾌하고 밝은 날이나 지옥과 같이 어둡고 컴컴한 날이나 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찬란하고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시는 행복감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어느덧 고난이 엄습하고 슬픔이 덮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고 한순간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것 같습니다.
우리 생애가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기도 하지만 다 잊어버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기도 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나 자신으로 부터, 또 하나님도 잊고 도주하고 싶었던 마음을 9절에서 다윗이 노래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새벽빛이 한 순간에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닿는 것처럼 모든 것을 벗어나 저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하고 싶은 마음을 다윗은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사방을 에워싸며 점점 다가오는 사울왕의 추격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날마다 느낄 때 얼마나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밤새 기도해 보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지샌 날, 새벽이 밝아오고 그 빛이 순식간에 바다 저 멀리까지 닿는 것을 볼 때, 다윗이 얼마나 그곳을 동경했겠습니까?
내게 날개가 있다면,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는 저 바다 끝에 가서 무심하게 거주할 수만 있다면.
달아나고 싶은 삶의 속박 속에서 성도들도 일탈을 시도하고 믿음을 잊어버려고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곳을 가도 거기에 계신 것은 우리를 붙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영영 낙망하여 망하는 자리에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은 다윗이 도망치고 싶던 순간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이 더 슬프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내 삶이 이제 완전히 어둠에 갇히게 될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라고 한다해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불현 듯 덮치는 어둠의 순간이 행복하고 밝았던 내 삶 전체를 영원히 흑암처럼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때를 말합니다.
그 때 다시는 빛났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감당하기 어려울 시련을 당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병이 들고 점점 상황이 나빠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좌절이 올 만큼 힘든 일을 당하면 사람의 인격도 변합니다.
사방을 더듬거려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둡고 막막한 상황에 빠질 때가 누구나에게 다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나고 보니 주님 앞에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깜깜한 어둠인줄 알았는데 주님 안에서는 어둠이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끝이 없을 것 같던 십년 동안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만일 다윗을 덮었던 어둠이 정말 어둠이었다면 다윗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어둠은 주님 안에서는 결코 어둠이 아닙니다.
이번에 취업전문 포탈업체에서 청년세대 288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 데 청년세대가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결혼을 안하겠다가 아니라 포기했다고 한 것입니다.
내 집 마련, 출산, 연애도 포기했다는 응답이 각각 50%선에 가까웠습니다.
결혼을 포기한 이유 1위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였습니다.
우리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난했지만 결혼을 못하리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없어도 결혼했습니다.
또 결혼해서 살다보면 당연히 자식도 낳고, 내 집도 언젠가는 마련되는 줄 알았지 지금처럼 시작도 못하고 현실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근심거리가 되는 질병의 문제나 자식들 문제들로 장년층 역시 내일이 밝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어두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둠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으면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다닐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영적 어둠이 벗겨집니다.
그뿐 아니라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 있을 때에도 매순간 예수님을 주목하고 주님의 법도 안에서 행하면 결코 그 곳은 어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벗어나기 힘든 어두운 환경 속에 있을수록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매순간 붙들지 않으면 어둠은 오래토록 우리와 가정을 뒤덮고 괴롭힐 것입니다.
예수님께만 더 집중하고 믿음의 원칙을 따라 힘껏 살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어둠이 걷히고 다시 빛처럼 환한 날이 돌아옵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 어느 순간에도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굳건하게 걸어가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끝으로 14절부터 21절은 하나님의 기묘하신 창조에 대해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추적하며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이유를 창조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들었나이다.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드셨겠냐는 거예요.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만든 것이고 그래서 나를 그 목적대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죠.
여기서 나를 만들었다는 단어는 아주 섬세한 공정으로 무언가를 짜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인들이 정교한 그림이 있는 옷감을 직조하는 때 쓰는 단어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이 은밀한 중에 서서히 그 형체를 이루어가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다윗은 기이하고 완벽하게 자신을 조직하신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그 선하신 목적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인체의 신비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시는 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과학자인 쳄버스란 무신론자는 한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자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딸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은 딸의 정교하고도 복잡한 귀의 형태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 같이, 원자들의 충돌에 의해 우연히 진화되어 만들어졌다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건 분명히 설계의 산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오자 그렇다면 설계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그는 당황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귀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고 제작된 것인지 들어보시겠습니까?
귀는 음파를 수집해서 고막에 전달합니다.
음파는 고막을 진동시키는 데, 고막은 10억분의 1센티미터 정도로 흔드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진동이 내이에 있는 체액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리고 신경자극으로 전환되어 뇌로 전달하고 뇌는 다양한 음파를 구분해서 사람소리, 음악소리, 동물소리를 구분해서 인식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게 되는 경로를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심장은 하루 10만번 작동하며 5.8톤의 피를 끊임없이 퍼올립니다.
핏줄의 총길이는 10만 킬로미터입니다.
지구둘레가 4만 킬로미터이니 지구의 두바퀴 반의 길이의 핏줄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완벽한 방어체계가 있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침입자로부터 보호합니다.
우리 피부에는 페프티드라는 항체가 있어서 살갗에 붙은 모든 세균들을 퇴치합니다.
입속에 들어온 균은 입에서 생산되는 점액이 죽이고 그래도 넘어간 놈은 위장에서 생산되는 강산이 죽입니다.
놀라운 것은 인체 내 모든 세포는 1NHC라는 주민등록증이 있어서 병균이 들어오면 검문 검색하여 순식간에 침입자임이 밝혀집니다.
그러면 수지상세포는 T임파구와 B임파구에 출동명령을 내려 병균을 죽이기 위해 싸웁니다.
인체의 한 부분 부분마다의 정교함과 기막힌 구조는 그것을 설계하신 분의 측량 할 수 없는 지혜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육체를 신비하게 만든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벌써 주의 눈이 보셨고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만 우주처럼 기묘하게 조직하고 짜맞추신 게 아닙니다.
우주와 같은 우리 삶 전체도 하나님께서 설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아로 잉태되어 아직 한 날도 되기 전에 하나님의 전지하신 직관으로 장차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를 다 책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계획하셨다는 시적인 표현이죠.
하나님의 직관은 사실을 보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꿰뚫어 아시는 전지하신 직관력은 하나님만 갖고 계신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과 또 다시 회개하고 교회를 세울 인물이 될 것을 아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직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일이라 해도,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 조차도 잘 모릅니다.
베드로도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할지 몰랐다니까요.
하나님의 직관은 장차 우리가 몇 살에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결혼상대를 선택하고, 어떤 직장을 갖고,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고, 언제 어떤 병에 걸릴 것이고, 이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멋대로 생각하고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단순하게 예견해서 그것만 적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실지 꼼꼼한 수들을 계획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다윗은 주의 생각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정말 우리도 그런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절망적인 상황 때 마다 하나님이 내 놓으신 기가 막힌 카드로 위기를 벗어난적이 얼마나 많습니까?매일 매순간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에 맞춰 기묘하게 움직이는 하나님의 계획은 모래보다 많아 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어떤 잘못된 선택을 하던 하나님은 복구프로그램을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선택에 죄가 개입할 경우, 그 복구의 과정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장래가 불확실하고, 어두워보여도 주님의 완벽한 수가 다 계획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밝고 큰 걸음으로 담대하게 걸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모든 일을 주님의 책에 기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을 벗어나고도 싶고 하나님을 믿는 데 왜 이렇게 여전히 힘드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둠이 하나님께는 어둠이 아니며 우리가 더 연단되고 성숙되는 순간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덜 고통을 받으려면 이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음이 더 강해져야 합니다.
믿음이 허약한 만큼 삶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오늘 다윗의 믿음을 좀 질투하며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로 주님께 가까이 가고 더 힘을 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015년5월10일 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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