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73편 아삽의 시

남수연 2015. 8. 13. 23:06

오늘 시편73편 아삽의 시를 읽으니 성경 기자도 우리와 똑같이 믿음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유난히 좀 친근하게 느껴지시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세상살이도 해야지, 내세도 준비해야지, 좋게 말하면 대단하지만 솔직히 고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서도 형통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을 기록한 아삽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특권이어야 할 그 형통을 악인들이 더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고 속이 상했는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걸음이 미끄러질뻔 했다고 말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악인들은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데,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그렇지 않아 시험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혹시 아삽 같은 마음으로 낙심하지는 않으셨나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는 것 같나요, 착한 사람이 잘 되는 것 같나요?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이걸 놓고 투표를 하고 있더군요.

시작한지 얼마된지 모르겠지만 18명이 악인이 잘 된다에 표를 던졌습니다.

착한 사람이 잘된다에는 몇명이 표를 던졌을 것 같습니까?

1명이었습니다.

재미로 해 본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다 세상이 정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아삽이 미끄러질 뻔 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모를까 계신데 어째서 악인이 잘되는 걸 보고만 계시냐는 것입니다.

아삽은 처음 1절에서 이렇게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니

그는 이런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잖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참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를 쓰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고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믿음이 현실을 보며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2절부터 바로 아삽의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악인이 잘 사는 걸 보고 이해가 안됐지만, 그래도 분명히 끝이 안 좋을거다 생각했는 데 그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죽을 때에도 고통도 없고 그 힘이 강건하더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말로가 비참해야 하는 데 끝까지 형통하다 편안하게 죽더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가운데 몰아넣고는 재앙도 없이 죽더니 지금도 꽃으로 둘러싸여 누워있지 않습니까?

5절부터 9절까지 아삽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의 형통에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남들 다 당하는 고난과 재앙도 없습니다.

교만하고 강포하지만 대개 상임자다 보니 그걸 제재할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잘 먹고 살이 쪘는지 눈까지 소복하게 솟아오를 정도입니다.

정말 기분 나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기사에 보니 공직자들 중 1년 만에 1억이 넘게 재산이 불은 사람들이 꽤 많았죠?

작년에 재산 좀 불으신 분 있으십니까?

국민들은 가계빚이 작년 말 3개월 동안 27조원이 늘어나서 가계빚 천조원이 넘어섰다는 데, 이런 기사를 보면 좀 씁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삽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 사람들을 능욕할 뿐 아니라 하늘을 향해 교만한 말을 해도 천벌도 안받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냥 형통한 악인을 보고 몰려드는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 세력도 늘어갑니다.

11절에 보니 그들이 이젠 기세등등해서 이렇게 불경스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초월자일 뿐이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이게 결국 현대인의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삼천년 쯤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죄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지금 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침묵하는 하나님은 결국 인격체가 아니라 우주에 충만한 기운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해석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뉴에이지운동이 동양의 명상 같은 것을 통해서 초월자인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신이 되자 이런 것입니다.

관상기도, 향심기도 같은 것들이 다 뉴에이지와 통하는 것들입니다.

아삽은 이런 지경이 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게 그냥 두시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다보면 세상사가 공평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권선징악이 세상의 원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적으로 악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하루에도 몇 건씩 벌어지니 자식 내놓기도 두렵지 않습니까?

범죄한 악인은 뻔뻔하게 세상을 활보하고,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고도 원통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나온 영화들이 그런 주제들이 많은 것은 그런 사건들을 보며 우리 마음에도 두려움과 분노가 쌓여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언제 내가 저런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죠.

악덕 기업주는 천문학적으로 재산이 불어가도 만성피로에 쌓여 일하는 근로자들은 집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게 이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다 악인들에게 박해당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달에 북한에서 또 지하교회 신자들이 33명이나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공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믿는 성도에게 형통한 축복을 주시고, 악인을 좀 징벌하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왜 이런 부조리와 악덕을 방임하시냐는 게 아삽의 불만이고 우리들의 불만이기도 하죠.

오늘 시편73편에서 그 정답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정답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으니 우리가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 모든 부조리와 혼란과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 곳곳에 이 질문에 대한 단편적인 힌트를 던져 놓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28절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악인들이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밀어내니 그냥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4절은 말씀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그러면서 하나님은 회개할 때까지 길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잡한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까지 인간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인간에게 맡겨두십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지만 지구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 안에 자신을 제한하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삽이 분명히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의 마지막 결말입니다.

20절에 보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고 악인이 망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실 때, 하나님의 인내와 계획된 시간이 다 끝났을 때, 그 때 세상의 모든 악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왜 하나님께서 놔두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선한 자의 하나님 뿐 아니라 악한 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악으로 재물을 모으고 그것으로 교만과 패악을 일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결말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 외면하실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아삽이 어쩌다 악인들로 인해 시험에 들게 되었는지 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삽과 같이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아삽은 보통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역대상163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얼마나 그 신실한 믿음이 인정받았으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항상 섬기도록 맡겼겠습니까?

아삽은 성전찬양대의 수장이었고 또 선견자였다고 다른 성경에서 기록합니다.

이 정도 신앙경력을 가진 사람도 실족하여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삽은 그 탁월한 믿음에서 이렇게 미끄러지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악인의 형통에 너무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잘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악인의 형통을 질투하는 마음에 지나치게 그 일만 생각하다 결국 시험에 들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세상 일에만 너무 주목할 때 믿음에 실족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에만 집중할 때도 점점 믿음은 쇠약해집니다.

현실엔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하나 이상 걸려 있습니다.

그 문제에 집착하면 염려가 엄습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다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점점 침체에 빠지게 되는 걸 번번이 느끼면서도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제만을 묵상하면 필연코 믿음에서 미끄러질 게 확실합니다.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세상일에만 정신을 쏟아도 퇴근 무렵엔 이미 믿음이 허약해지게 됩니다.

너무 바쁘게 하루가 돌아가다 보니 말씀보고 기도할 시간을 낸다는 것이 힘들죠.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보면 믿음이 흔들거리고 뭐가 슬쩍 발을 걸어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삽의 영적 침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삽에게 고통이 있었다는 것이죠.

26절에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마도 몸은 병에 시달리고 하루 종일 신경 쓸 일로 심신이 곤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신앙적으로 시험을 당하기 쉽습니다.

내가 힘들 때 주변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다 나아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잘 믿으려고 바둥대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하나님께 화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13절처럼 푸념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했던 시간과 노력들이 다 헛되게 느껴지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날 돌봐주시지 않으면 이제 막 살고 싶다는 유혹도 듭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 내 삶이 실로 헛되도다.

이 말에서 아삽이 세상과 자신을 보고 얼마나 깊이 낙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에 낙망하고 미끄러질 일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자주 있겠습니까?

이런 위기를 잘 넘기지 못하면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고 점점 하나님을 멀리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힘들여 교회를 나오고 봉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다 점점 가나안성도들이 되는 것이죠.

내가 믿음이 좀 침체되고 영적 생명이 시들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힘써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삽이 이렇게 미끄러질 뻔하다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아삽은 자기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아무리 머리를 짜내서 문제에 집중해도 오히려 고통만 점점 더해졌다고 합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가정과 직장과 사람 사이의 문제들이 머리를 짜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될 것 같으면 벌써 되었어야죠.

이런 고질적인 환경의 문제들은 쉽게 벗어나지지 않습니다.

전전긍긍하던 아삽은 17절에서 드디어 이렇게 시원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에 시험이 오면 일단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짐이 되고, 말씀과 기도 같은 경건생활도 시큰둥해집니다.

아삽은 어떻게 그 상태를 이기고 성소로 나갔을까요?

아삽의 직업이 성전찬양대 수석이었기 때문에 안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가대원이고 봉사자이니 예배를 빠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하나님께 우리를 묶어두는 장치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크고 작은 봉사를 맡는 것은 교회 지체들을 위해서도 유익이지만 내 믿음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한 주간 힘들고 지치더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우리가 삽니다.

그러면 아삽은 구체적으로 성소에서 무엇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보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삽이 지은 다른 시인 시편50편을 보면 이 73편과 짝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50편엔 특히 아삽이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특히 제사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을 봐서 제사를 보고 깨달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을 잡아 상번제라는 번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삽은 성소에 나가 양의 목이 끊어지고 몸이 처참하게 각이 떠져 번제단 에서 불타는 제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는 이 제사를 바라볼 때 그가 깨닫는 것입니다.

시편50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제사로 맺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죄값을 치를 제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아삽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 이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면 거기서 자기의 죄를 통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의인이고 저 악인들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인 줄 알았는 데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불타는 제물을 볼 때 자기도 역시 짐승 같은 죄인이었다는 것 알고 양심이 찔렸다고 하지요?

그때서야 속죄할 어린 양이 준비되지 않은 악인의 결말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50편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향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찢는다는 것은 제물이 각으로 떠져 찢겨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속죄의 제물이 없으니 자신의 죄를 자기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죠.

성소에 나갔을 때 아삽은 하나님을 만나고 악인의 종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의 답답한 문제가 드디어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무거운 짐에 짓눌리고 실망과 절망이 몰려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악이 가득하고 어둠과 절망에 빠진 이 세상에 홀로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생명의 길을 환히 열어놓으셨습니다.

아삽이 성소에서 불타는 제물을 볼 때 인생의 결말을 깨달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결말이 깨달아집니다.

이 짧은 꿈같은 인생이 끝나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다는 확신이 들 때 바윗덩이 같이 누르던 내 문제들이 별거 아니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럼 할렐루야하며 천국 가는 것이죠.

아삽의 시를 보면 그가 탄성을 지르며 노래하지 않습니까?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이 없나이다.

이 땅에서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후에 영광으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런 감사와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침체와 절망의 늪에서 쑥 빠져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 순간 마음이 날아갈 듯하며 문제를 털어내고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향해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의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기도가 소중하게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기도를 하나님께서 왜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도의 눈물이 뿌려진 기도를 하나님은 절대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아이들 어릴 때 어버이 날 가져온 삐뚤 비뚤 글씨로 쓴 편지하나 버리기 힘들지 않습니까?

제 경험으로는 무엇이든 기도한 것은 다 쌓였다 양이 차면 응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다 그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기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음 결혼문제로 기도할 때 반드시 먼저 기도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이제까지 구한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목표하는 것을 위해 성패에 상관없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없습니다

크론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한 젊은 전도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크론병은 원인을 모르게 창자가 부패되어 썩는 병이라고 합니다.

창자 어느 한 군데 염증이 생겨 창자가 터지면 독소가 온 몸에 퍼져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고 합니다.

몇 개월씩 병원에 입원하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직장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꼬챙이 처럼 마르고 나오는 게 한탄과 원망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를 반복하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망만 하고 주저 앉아 있을 일이 아니다, 분명히 이 가운데도 감사할 일이 있을 것이다. 불행을 보지 말고 감사한 것만 찾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그러고 나니 숟가락 들을 힘이 남아있는 것도 감사하고 잠자는 것도 감사하고 매 순간 감사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다 보니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고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저절로 크론병이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소로 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현실을 이길 능력도 주시지만 기적적인 하나님의 인도도 있다는 것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전도사님처럼 작은 일에 하나님을 향해 자꾸 감사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동행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지난 한 주도 여러 번 미끄러질 뻔 하셨죠?

23절에 아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부족한 믿음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며 찾는 우리를 주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에 우리가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아삽은 28절에서 이렇게 시를 마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이런 복된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년4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