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Oc0jrcX65lI&t=3377s
성도들이 세상을 볼 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데 왜 착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잘 되느냐는 것입니다.
시편73편을 기록한 아삽은 그런 세상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 했다고 합니다.
2절,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하나님이 과연 계시냐며 시험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린 딸에게 콩쥐 팥쥐 얘기를 해주고 너는 누구처럼 되고 싶냐고 했더니 팥쥐가 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름이 헷갈렸나 해서 왜 그런지 물었더니 나쁜 애가 되도 좋으니 팥쥐처럼 편하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들도 못된 사람이 더 잘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경에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을 괴롭히는 데 그냥 두시는 하나님께 항변한 하박국 같은 선지자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박해받는 억울한 인생이었죠.
그렇기에 그의 시편 중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촉구하는 시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노년에 쓴 시편이라는 것을 2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한 때는 불공평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해 잠 못이루고 시를 썼지만 노년에는 이런 분명한 답을 얻은 것이죠.
혹시 지난 한 주도 세상이 왜 이렇고, 내 인생은 왜 이런지, 화가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다윗에게서 답을 얻고 배워서 힘을 내시길 축복드립니다.
1. 악인들이 형통한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1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더 잘 산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보다 더 형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많잖아요?
저도 목회자로 십삼년을 살다보니 전에 알던 사람들 중에서 제가 제일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악이 판을 치고 약자들은 항상 희생양이 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것이죠.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먼저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사람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제1안은 사람이 세상을 선하게 다스리는 것이었죠.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면서 악하게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문명 발생부터 죄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세워진 원리대로 나쁜 방법을 쓸 때 더 번영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서구 선진국들이 가난한 나라 침략하고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다 일 시켜서 부자나라가 된 것이잖아요?
재벌들이 과거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불법이 개입했는지는 경제사 뒷이야기를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물론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부정, 탈세, 사기, 편법을 걸리지만 않게 잘 사용하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현대차 정의선 회장의 딸 결혼식에 4대 재벌가 총수들이 총출동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럴 때 모여서 무소불위의 재벌 카르텔을 과시하는 것 같더군요.
4대 재벌가 총수 4명이 보유한 주식자산만도 22조7천억이라고 합니다.
부자들이 세상의 재물을 독식하는 데 한 쪽에선 일억 빚에 짓눌려 세 가족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엔 함께 살던 아버지가 죽고 장례비가 없어서 시신을 냉장고에 넣어 둔 아들이 있었다는 기막힌 기사도 나왔습니다.
누가 봐도 공정치 않은 게 이 세상입니다.
반인륜적인 전쟁, 테러, 살인, 폭력, 이런 것을 저지르는 국가나 단체도 망하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하며 번성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여기 대해 보통 두 가지로 반응을 한다고 합니다.
내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사회 악에 대해서 화가 나서 불평합니다.
그런데 한편 불법을 행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비난을 하면서도 부워하고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값이 많이 오를 때 불법을 사용했을지언정 집을 산 사람을 부러워했잖아요?
악인의 형통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환경에 계속 불평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정해진 사람이든, 다수의 악인이든, 하나님이든, 계속 비난하고 불평하다 보면 점점 나는 의로운 심판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불평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오히려 나 자신에게 악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이죠.
8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은 이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계십니까?
먼저 악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2절,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라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불평하고 비난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세운 세상에 대해 제2안으로 통치하십니다.
그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된 성도들을 통해서죠.
악의 세상에 제동을 걸고 악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악으로 이기려 한다면 얼른 생각해도 더 악해야 이길 수 있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죠.
세상이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것은 이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성도들이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주었고 자신을 불태워 빛이 되었고 자신을 녹여 소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기사를 보니 가수 션이 독립유공자 자손을 위해 여섯 번째 집을 지어주었다고 하더군요.
매년 81.5킬로 마라톤을 개최해서 참가비와 기부금을 통해 어려운 유공자 자손들에게 집을 주어준 것입니다.
션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은 왠만하면 다 알고 있죠.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악인을 좀 심판하시면 세상이 더 살기 좋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 주는 것은 큰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의 재난을 당해도 인간이 회개하고 선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을 것인데 채찍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힘들어서 주님 앞에 나오셨습니까?
굉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힘들다고 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인생에도 힘으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일지라도 자기 인생을 살게 두시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가 잘 모르면 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이 내 눈 앞에서 좀 망하는 걸 보면서 ‘거 봐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잠언 24장17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시죠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우리는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도 부러워 말고, 악인이 넘어질 때 좋아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악에 대해서 취할 입장은 이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알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생을 결산하고 한 푼도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영벌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실 다윗왕조에 저항하는 사울왕이 무려 사십년동안이나 굳건히 왕위를 지키고 있는 것을 암담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악령에 시달리면서도 얼마나 건강한지 광야도 개의치 않고 다윗을 쫒아 다닙니다.
다윗왕조를 계획하고도 사울을 심판하지 않으실 때 다윗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목도한 것은 결국 그가 전쟁에서 칼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얻게 된 것이죠.
9절,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뭐가 잘 사는 것입니까?
돈만 많다고 잘 사는 게 아니잖아요?
죽을 때까지 수 조원의 돈을 깔고 앉아 죽는 게 그 인생을 잘 산 게 아니잖아요?
어찌보면 영혼에는 저주가 될 그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기 뒤를 따르게 하는 것인데, 그걸 부러워 하시겠습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겐 이러다 망하는 게 아니냐고 초조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 다윗은 그의 평생에 눈으로 목격했다고 하죠.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성도들이 당장 보기는 손해 보고 어렵게 사는 것 같지만 그의 집을 유심히 보니 절대로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것을 보았지만 저도 하나님께 신실한 성도가 흥하는 건 보았지 망하는 건 못 보았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악한 사람들, 괴롭히는 환경들도 어느 순간 놀랍게 해치워 주실 것입니다.
10절,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기고 너희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 것을 항상 생각하면 다윗이 경험한 아름다운 결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대신 성도들은 이렇게 살라고 3절, 4절, 5절에서 권합니다.
3절, 여호와를 의뢰하라
4절, 여호와를 기뻐하라
5절, 여호와께 네 길을 맡기라
하나님이 나의 중심이 되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며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두 발을 걸치고 어정쩡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살아보았잖아요?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힘들어서 가지 말라고 한 블레셋으로 망명을 갔다가 블레셋 용병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궁지에 몰렸습니다.
다윗의 성공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빼면 남는 것은 평생 양을 먹이는 목동 다윗입니다.
내게서도 하나님을 빼면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큰 그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오늘 하루에서 하나님을 빼면 하루를 망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완전히 하나님 편에서 살아야 영혼도 잘 되고 범사도 잘 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애를 써서 내 삶의 한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성도의 최선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할지 한 구절씩 살펴 보겠습니다.
1) 3절,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세상에 악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한국교회의 큰 약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행위에 대한 말만 나와도 질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관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고 계십니까?
또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성도들의 땅의 삶도 소중한 것이고 세상의 인생도 잘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땀 흘려 씨뿌리고 돌보면 열매를 내는 시스템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고, 인정 받을 만큼 성실히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단 우리가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사회생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치심은 모든 일을 사람이 아니라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들이 힘들이지 않고 돈 버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선을 행하고 근실히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 기업을 이 땅에서 견고히 세워주십니다.
2) 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불의한 세상에서 무능하지 않고, 악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으려면 대신 하나님과 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세상에 줄을 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만큼 세상의 위력이 강력합니다.
그걸 이기려면 더 강하고 크신 하나님과 친해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있어야 만족스럽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사실 매사에 위축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이뤄지고 있을 때 성도들은 제일 자신있고, 행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세대의 신앙과 우리 젊을 때의 신앙은 예수님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가난도 괴로움도 이겨낼만한 그런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교회 가는 게 항상 기다려졌고, 예배드리는 게 감격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설레고 은혜 받을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그때에 비해 지식도 많고 잘 살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만나 보기가 드뭅니다.
고옥한흠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폐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일생과 믿음에 대해 생각이 많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옥목사님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젊은 날에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했던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뻐했던 그 마음, 그 사랑을 되찾으려 당시 일년 동안이나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기쁨을 다 회복하고 돌아가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겠다고 하더군요.
너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유언은 그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라.
왜 크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힘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장10절,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나님이 내 마음에 진정 기쁨이 된다면 우리는 힘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뻐하며 사랑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교감하고 교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러나 죄인으로 태어나서 세상방식으로 자란 내 인격이 너무 강해서 거듭난 영이 나를 전적으로 이끌어가기엔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기뻐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막 시작되었던 그 부모세대에는 교회 문화도, 축적된 지식도, 믿음의 방법도 다 부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처럼 구원과 함께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교회 에 부어주셨습니다.
그 힘으로 성경을 배우고, 기도 운동을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경제를 일으키고, 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성도 개인이나 교회나 교회시대나 어느 정도 장성하면 달라집니다.
그때는 우리가 경건생활에 힘쓰는 만큼 성령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과거에는 은혜가 많고 눈물이 많았는데 왜 요즘은 그렇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어디 은혜받을만한 기도원이 없나 찾아 다닌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젠 내가 하는 만큼 은혜를 주시는 성장한 단계가 된 것입니다.
감사로 예배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그런 경건의 생활을 하루하루 잘 지킬 때 성령께서 그 순간 순간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되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순례권찰님이 하루에 성경을 한 장씩 읽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아마 창세기12장까지 읽으셨을 것입니다.
저한테 사람이 9백세까지 살았다는 게 안 믿어진다고 하시더군요.
얼마나 꼼꼼히 읽으시는 지 노아의 홍수 뒤에 물이 마르는 데도 오래 걸리더라는 말씀을 하셔서 놀랐습니다.
아직 안 믿어져도 괜찮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곱씹어 읽으시면 하나님이 결국 믿음을 주시고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도록 성령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면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사실 관심도 없어집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이 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소원
을 자연스럽게 이루어 주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5절,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이 구절은 다윗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쫒기던 시절, 사울왕을 죽일 수 있던 결정적인 찬스가 두 번 생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손으로 왕좌에 앉을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께 자기 길을 맡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 일을 이뤄주셨고 모함하는 무리들 앞에 다윗의 정직과 의로움이 정오의 빛처럼 드러난 것입니다.
오래 주님을 따르다 보면 왜 주님께서 네 길을 내게 맡기라시는 지를 알게 됩니다.
내 지혜와 힘만으로 이 악한 세상에서, 악한 본성으로, 좋은 것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족하게 이룬 것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해서 이룬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그 길을 단지 경험과 조건과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길이 과연 내게 행복하고 잘 되는 일일지 아닐지 모릅니다.
가서 보니 정말 잘못 된 길로 왔다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긴 계획이나 하루를 살아갈 계획이나 하나님께 맡기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옳다 증명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내 힘으로 해 볼 생각을 그만 하시고 하나님께 맡기고 이루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그렇게 잘되는 사람들을 시기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심판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매일 매일 세상보다 더 힘있고 더 능력있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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