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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5월에 모든 성도님들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더 행복한 가정이 되길 빕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했더니 1위 가족, 2위 경제적 안정, 3위 건강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누구나 좋은 가정을 만들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가정이 좋은 가정이 되지는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가정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력을 하는 데도 불행한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오늘 가정의 달 셋째 주일에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복된 가정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가정에 잘 적용하고 더 소중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축복드립니다.
1.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집을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집에 포함되는 것은 가정을 꾸리는 것, 사회적인 성공, 인격의 성숙 등 많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 설교이니만큼 가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집의 이미지에는 어릴 적 자랐던 집이 제일 많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우리 어릴 적 집을 생각해 보면 대체로 가난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요즘 가정들이 겪고 있는 갈등 요소들은 다 있었습니다.
아버지들의 외도, 도박, 자식들의 가출, 있을 건 다 있었죠.
그런 역기능 가정에서 우리가 양육되고 성장했습니다.
생각하면 그래도 소중했던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이라도 꾸려가느라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그걸 한 방에서 보면서 자랐습니다.
밤에 부모님이 두런두런, 자식들 등록금 걱정, 밀린 방세 걱정, 늘어나는 외상값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잤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각기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지내니 그런 부모들의 근심을 알려나 모르겠어요.
그런 걱정거리가 있어도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 기죽을까 봐 오히려 쉬쉬하죠.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자라온 집처럼, 부족한 것 투성이인 집을 세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릴 때 부잣집이 얼마나 부러웠습니까?
부잣집은 다 행복한 줄 알았잖아요?
그걸 위해 달려 온 우리 국민들이 받은 현실 성적표는 초라합니다.
OECD가 조사한 국민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세계38개국 중 36위입니다.
우리보다 만족도가 낮은 나라는 내전 중인 콜롬비아와 지진 재난을 당한 튀르키예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옛날보다 잘 사는데, 세계 10위를 바라보는 경제 강국인데, 왜 우리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을까요?
집에 돈은 옛날보다 많은 데 가족들은 왜 다 불행하다고 할까요?
우리가 노력이 부족해서 인생이라는 집에 만족이 없는 것일까요?
행복지수가 높은 북유럽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를 역설적으로, 노력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노력을 너무 많이 했기에 기대했던 만큼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데서 더 불행감을 느낀다는 것이죠.
불평등 사회에서 남과 비교하면 당연히 불행감이 들 수밖에 없죠.
그러니 이런 사회적 요인이라면 노력을 해도 나아질 희망은 없고, 여기서 노력도 안 한다면 더 힘들게 뻔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행복한 집을 세울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2. 그것은 우리 힘만으로 집을 세울 수가 없고 하나님이 집을 세워주셔야만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127편을 쓴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당대에 어떤 지혜자보다 가장 큰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인생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죠.
열왕기상3장9절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같이 태어나보니 왕자이고 왕궁이 인생의 전부인데 어떻게 백성들의 인생을 속속들이 알겠습니까?
자기가 겪어보지도 못한 민초들의 가난한 삶과 고충들을 잘 듣고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솔로몬이 삶의 지혜인 잠언을 삼천 가지를 지어 백성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잠언, 전도서는 솔로몬이 쓴 성경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사람의 마음과 인간관계를 꿰뚫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까?
가정의 달에 떠오르는 이런 잠언이 있죠.
잠언17장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형제가 갈등하고 다투는 집에서 살아 본 분들은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이 잠언 말씀에 수긍이 갈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시,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죠.
이 시편 노래가 성전 예배에서 불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정해진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인생 집에서 힘들게 살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이 시편 찬송이 들려지게 했던 것이죠.
이 찬송에서 사람들은 다시 답을 얻고 행복한 집을 꿈꾸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한절 한절 우리 가정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1)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없이는 온전한 집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사람이 자기에 대해 근원적인 것을 모르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리지 않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사실은 다 하나님과 엮여있기 때문입니다.
가정도 내 인생도 우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출발해야 답을 구할 수가 있고 그 인생이 헛수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솔로몬왕의 특징이 잘 나타나죠.
헛되며, 헛되도다, 또 헛되도다, 세 번 헛되다고 합니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생이 헛되다는 것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최고의 지혜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려보고, 모든 분야에 전문가였던 솔로몬이 인생을 살아본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복의 시작이고 모든 문제의 실마리라는 것을 저도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출발해야 풀립니다.
가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 집은 잘 세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경외하는 성도들의 집을 반드시 세워주십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왕위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뺏은 아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치욕적인 출생이고 오점 속에서 태어난 아들이죠.
이미 압살롬이나 아도니아와 같은 쟁쟁한 본처의 자식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왕위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기막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생각할수록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참 기막히고 오묘하다는 것들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집을 세우기 위해서 다 수고하지만 수고만 해서 집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그 고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아침에 힘든 몸을 일으켜 출근하고 밤늦게 또 지쳐서 퇴근하며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 게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수고에 행복에 대한 보장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에 저녁을 먹고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보는 데, 2천5백원짜리 햄버거를 팔고 있는 재래시장의 한 가게가 나오더군요.
그 사장이 자식들 키우고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장사가 없다는 거예요.
새벽3시, 4시가 되야 집에 돌아올 정도로 열심히 살았는데 20년 동안을 반지하 단칸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장사가 잘 안돼서 다른 장사를 하려니 또 대출을 받아야 하고, 또 안되면 돈을 더 빌려 다른 장사를 하다 보니 빚만 1억이 넘어가더랍니다.
20년을 그만큼 노력했지만 볕이 안 드는 반지하에서 자식들 키운 얘기를 하며 눈물이 글썽이더군요.
그래도 그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빚을 다 갚고 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햄버거집은 가난은 벗어났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자집은 경제적인 고충은 피해 갈 수 있겠죠.
그러나 돈 때문에 모든 집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옛말에 천석꾼 집에는 천 가지 근심이, 만석꾼 집에는 만 가지 근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불행이라 좀 조심스럽지만 우리 젊을 때 인기 있던 소설가 중 고인이 된 박완0 씨가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고인의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 분이 어떤 해 5월, 64세였던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 보냅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5살 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이 안 가죠.
딸의 회고에는 그때 어머니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 어떤 일을 만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짧게 하루 일만 해도, 오늘은 별일이 없어서 편하고 좋은 날이 될 줄 알았는데, 되는 일마다 꼬이는 괴로운 날이 되기도 하잖아요?
이 땅에서 원하는 대로, 노력하고 땀 흘리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인생 집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원하던 대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죠.
하나님이 집을 세워 주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금의 내 집을 세우기까지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을 압니다.
좋던 나쁘던 지금의 가정을 갖도록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 더 좋은 가정을 세우길 간절히 하나님께 구한다면 하나님이 왜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잘 견뎌오고 가정을 붙잡고 살아온 모든 성도님들을 하나님이 위로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세우실 뿐 아니라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이 문장은 여호와께서 성읍을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파수꾼이 밤새 깨어 있어도 뚫린다는 것이죠.
집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힘으로 소중한 것 한 개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끼는 소중한 것들을 지켜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기하고 무너뜨리려는 사탄도 알고 있습니다.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믿음을 이렇게 도발하죠.
욥기1장9절,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절,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사탄이 욥의 가정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욥과 욥의 집과 욥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2절 하반절의 말씀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밤에 잠을 달게 잔다는 것은 염려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하고 사느냐 하나님께 맡기고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죠.
염려는 나 자신과 나누는 부정적인 대화잖아요?
밤새 나와 부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 잠이 올 리가 없죠.
우리가 믿는 것은 이 지경이 된 모든 것도 하나님이 지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수고의 떡을 먹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잠을 잡니다.
시편30편의 고백이 우리 성도들의 고백이 아니라면 우리가 뜬 눈으로 세워야 할 날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삶의 곤고한 밤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지키고 인도하심을 믿고 잠들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가정을 세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사람의 인생 집에 부모도 중요하고 부부도 중요하고 형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야 말로 특별한 존재이죠.
3절,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솔로몬은 예배에 참석한 가장들 어깨에 얹혀진 무게를 알고 있었습니다.
물자와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때나, 적은 수입으로 해 줘야 할 것은 많은 지금 시대나, 자식 키우는 것은 만만하지가 않죠.
오늘 시편은 그렇게 힘들여 자식을 잘 키우면 자식들이 네 노년의 부양자가 될 것이라는 뻔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1) 먼저 그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창조주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창조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내 소유로 알기에 자식의 인생을 내가 주도하려고 자꾸 개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을 내게 키우라고 맡기셨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할 제일 근본적인 의무는 내 자식이 친아버지를 찾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자녀와 함께 잘 찾아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2) 자녀는 부모의 상급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무슨 잘 한 게 있어야 받는 것이 상급입니다.
자녀가 우리의 상급이라면, 내가 무슨 잘 한 게 있어서 자녀를 상급으로 받았다는 말인가? 알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는 말씀이죠.
이 말씀은 자식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에 대해 미리 상급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자식을 잘 키운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기업을 맡아서 키우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상급도 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상급도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심오하죠?
자식을 키울 때 우리가 누리는 사랑의 기쁨이 곧 상급입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자식 자체가 보상이고 상급인 것이죠.
자식은 부모에게 어쩌다 붙은 혹이 아닙니다.
자식을 잘 키워내기 위해 부모들이 일평생을 희생하지만 대신 자식이 주는 행복과 기쁨 같은 것을 세상 어디서 얻겠습니까?
자식이 어릴 때는 돌보느라 몸이 힘들지만 잠든 모습만 봐도 사랑스럽죠.
자식이 커가면 실망하고 근심하는 날이 사랑스러운 날보다 더 많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선배에게 요즘 일곱 살 된 딸이 너무 무섭다고 상담을 하더군요.
그렇게 눈치보게 하는 자식들조차도 한번씩 대견한 짓을 하고 기쁨을 주죠.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자식을 키우기 위해 하는 노고에 대해 주시는 상급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4절,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3) 자녀들을 화살통에 있는 화살에 비유한 것은 지혜자 솔로몬의 기가 막힌 통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식들이 부모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라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화살은 화살통을 떠나기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우리가 세운 집을 떠나고, 우리 둥지를 떠나잖아요?
화살통에 화살을 채워 놓기만 하는 장수는 없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가도록 믿음의 목표를 알려주고, 곧은 길을 향해 날아가도록 잘 조준해서 쏘아 주는 사람입니다.
칼릴 지브란이란 작가가 있는데 성경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남긴 사람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시 중에 아마도 이 시편127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 시가 있는 데, 시인의 눈이 참 예리합니다.
칼릴 지브란은 자녀들을 화살로, 부모를 활로, 활을 쏘는 사수를 신으로 해석한 시를 남겼습니다.
그 중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사수이신 신의 손길로 구부러짐을 기뻐할지어다
왜냐하면 신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시는 만큼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부모의 역할이란 게 그런 것이죠.
사수가 활시위를 당길 때 활은 뼈가 꺾일 것처럼 팽팽하게 휘어져야 합니다.
고통이 느껴진다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래야 화살이 목표를 향해 멀리 잘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게 자녀들을 지원하느라 뼈를 깎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화살통에 담긴 화살들을 위해 녹초가 되도록 수고하는 젊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지난 번 큰 지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에 과거에도 큰 지진이 난 적이 있습니다.
지진 현장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절한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연도 있었습니다.
건물 잔해더미에서 수색대원들이 한 젊은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이상한 자세였습니다.
마치 엎드려 기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성은 건물더미가 무너지며 목과 허리가 골절된 상태로 몸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생존자를 찾기에 급했던 구조팀이 여성의 시신을 지나쳐 가려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돌이켰습니다.
팔과 다리로 만든 좁은 공간을 들여다 보던 대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속에는 꽃무늬 담요에 싸여진 아기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급히 아기를 꺼내어 보니 담요 속에 엄마의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안에 이 젊은 엄마가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아가야 만약 생존하거든 엄마가 너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단다.’
죽어가는 몸으로라도 자식의 생명을 보전하고 살리려는 것이 부모입니다.
마지막까지 자식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해내는 것이 부모입니다.
우리는 더 살아서 자식을 위해, 자식으로 인한 수고와 고통과 아픔도 버텨낼 것입니다.
그렇게 키워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떠나 보내는 자식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하나님은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는 어리고 연약한 자식이잖아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우리 가정의 뼈대를 잘 세워야 합니다.
청년들도 잘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각자가 죄인이라는 걸 아는 가족들이 행복한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내 죄성에 있다는 걸 서로가 알면 싸움은 시시하게 끝납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을 향해 잘 날아가도록 기도와 훈육으로 잘 양육하시길 바랍니다.
기근과 내전과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 빈곤국의 사는 모습은 눈물겹죠.
나뭇가지 몇 개를 얽어서 기둥을 세우고 천쪼가리를 얹어서 만든 집들이 마을 가득입니다.
그 모습이 믿음과 사랑이 고갈 된 우리 가정의 그림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또 눈에 보이는 집과 커리어는 잘 가꾸고 치장하지만 영혼의 집은 너무 허름하게 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우리 영의 집도, 육의 집과 가정도, 교회도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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