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보건대학원 연구팀에서 어제 이런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리 국민 절반 가량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였다고 합니다.
노령층보다 삼십 대에서 울분 상태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낙관할 수 없는 미래를 더 길게 살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가 사회를 보며 더 울분이 쌓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가 우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상황입니다.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
잠깐 믿음의 긴장을 풀면 우리도 울분 터질 일이 수없이 많죠.
저는 이런 약한 믿음을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기적같다라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도 어느 순간에 그 작은 믿음이, 축 늘어져 천근 같은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키잖아요?
오늘도 시편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믿음을 다시 세워주시리라 믿습니다.
1. 본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일들입니다.
‘감사하라, 구하라, 찬양하라’ 세 가지 주제로 묶어서 살펴 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은 그만한 은혜와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도 없는데 감사하라는 건 말이 안되죠.
우리가 가장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늘 이어지는 시의 내용을 보면 과거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주시고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와 마귀와 세상을 종으로 섬기던 인생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것이 이와 똑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 구원에 대한 감사는 억지로 나오지 않습니다.
진짜 구원을 알고 나서야 이 감사가 나옵니다.
살면서 위기를 모면했거나, 좋은 일이 있거나, 그럴 때는 감사하다는 마음이 쉽게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우러나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는 상황과 상관없고, 그 감사가 끝이 없습니다.
환경이 우울하고 희망이 없어 보여 낙담하다가도 이 구원받은 것이 생각나면 그냥 감사가 나오게 되죠.
전에 한 성도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태 신앙이었던 성도가 최근에 자기가 거듭난 것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시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지 분명하게 내가 거듭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전과 뭐가 달라졌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분명하게, 완전하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이 확실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사는 목적이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것과 가나안땅의 주인이 된 것은 구분이 애매한 게 아니라 완전하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만큼이나 우리의 구원 받기 전과 후는 명백하게 다른 것이죠.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둘이 구별되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인으로 살던 나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무언가가 달라진 내가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을 확신할 때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책임감 있게, 신중하게 나를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만큼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구원을 위한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나오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란 결과도 감사하지만 또 감사해야 할 것은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위대하고 기이한 희생을 감당하신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니 세상에서 누가 나를 계산 없이 아끼고 사랑해 줄지, 때로 헛헛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은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그런 사랑을 받아야 존재 의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곧 추석이 오죠.
저는 콩이나 깨가 들어간 송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부라는 흰 팥이 들어간 송편이 저의 최애 송편입니다.
옛날에 추석이 돼서 친정에 가면 어머니는 벌써 송편을 쪄서 소쿠리에 가득 담아 놓았습니다.
여러 종류 송편들 중에 한쪽엔 거의 팥 송편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손이 많이 가도 제가 좋아하기에, 다른 형제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한 가지를 더 만드시는 거잖아요?
부모님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해 주겠습니까?
그러니까 부모님 돌아가시면 끈 떨어진 연 같은 신세라고들 하는 것이죠.
저희 어머니가 다정한 편도 아니셨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어머니한테 뭘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별로 생각이 안 납니다.
그렇지만 내가 부탁할 때, 할 수만 있다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실 거라는 그 믿음이 든든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편이 감사하라고 합니다.
받은 은혜를 뭔가로 보답하라는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제 귀에는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 자식들이 힘들 때 부모인 우리가 기댈 곳이 되길 우리도 바라잖아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든든한 이 사랑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마음껏 기댈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1절, 3절, 4절은 전부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기도하게 되어 있고, 기도한다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기도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시간 내기도 어려운 점도 있지만 기도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나,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일지 모릅니다.
기도의 응답을 떠나서 오늘 먼저 생각할 게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왜 기도해야 할지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삶에 너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자체가 내게 너무 소중하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 눈을 감는다면 그것이 기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치고 힘든 날, 삶이 엄두가 안 나는 날, 너와 나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몰려오는 날.
그냥 예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 앉아만 있어도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 같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얼굴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영이 하나님께 스위치를 온으로 켜는 것과 같습니다.
그 상태를 우리가 많이 유지하려면 습관적으로라도 하나님아버지, 예수님, 그렇게 주님을 생각하고 부르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서 아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과는 다른 삶을 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환경이나 능력은 거의 달라지지 않죠.
그렇기에 4절에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우리의 한계를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한계에 부딪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의 매일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죠.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면 신기하리만큼 한계를 돌파할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3절 말씀대로 기도하는 성도들은 만족하게 되는 것이죠.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만족이 없고, 마음에 즐거움이 사라져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구하지 말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길 권고드립니다.
3)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2절,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세상에는 인생의 희노애락에 대한 노래도 있고 사랑의 노래도 있습니다.
그런 노래들도 우리 귀에 듣기 좋지만,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부르게 두고, 성도들에겐 불러야 할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찬양은 신적인 존재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기에 피조물인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죠.
저는 우리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면 항상 힘이 납니다.
또 우리 찬양팀과 함께 찬양하며 예배를 준비하다 울컥 감동이 올라올 때가 많습니다.
또 회중 찬양을 부르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참 은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찬양을 받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옛날처럼 찬양을 많이 듣지도 부르지도 않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혹은 입으로 다시 찬양의 생활하시길 권합니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 우리 걸음이 믿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 성도들은 세상을 대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1절,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절,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3절,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비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얘기를 불편해하기에 오늘날 성도들은 비밀요원처럼 자기 믿음을 숨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데, 그 방법을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정하셨다는 걸 다 아실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아마도 성도님들 가운데 내가 이 믿음을 부정하거나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믿음은 이생에서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소개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가족이라면 그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내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인도해야 하는 것이죠.
지난 5월에 포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고생 김양이 밤9시 쯤 학원 수업을 마치고 형산강 연일대교를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으로 뛰어들려고 난간을 넘어가는 40대 남성을 발견합니다.
김양은 달려가서 남성의 다리를 붙잡고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그 다리를 붙잡고 ‘제발 살아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소녀의 이 간절하고 절박한 애원에 마음이 진정된 남성은 무사히 경찰에 인계가 되었습니다.
‘제발 살아 달라’ 그 말은 우리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을 붙들고 해야 할 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심판대로 올라가고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면 그들도 감동을 받지 않을까요?
내 믿음도 건사하기가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나처럼 힘든데, 기도할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심판대에 아슬아슬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면 우리가 그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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