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4장1절-26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남수연 2022. 8. 5. 02:51

https://www.youtube.com/watch?v=r2VX6MYAlvI 

우리가 그동안 나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거기서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시는 중에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신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원의 스토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갈증을 해결하지 못할 세상의 우물을 평생 길었지만 얻은 것은 상처 뿐이었죠.

예수님은 이 여자를 찾아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습니다.

주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받으셨나요?
오늘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예수님은 귀향의 여정 중에 일부러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3절, 4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가야 할 강한 의지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나시는 길에 어쩌다 우리에게 오신 게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를 좀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극도로 싫어해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멸망 당했을 때 앗수르왕이 외국인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혼혈족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강력한 혈통주의를 끊어버리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니 아브라함 혈통이 곧 구원인 유대인들은 반쪽 유대인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혐오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더 틀어진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무너진 성전 터에 스룹바벨 성전을 지으면서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동참을 원했지만 유대인들이 끼워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사마리아사람들은 따로 그리심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곳에 단 하나의 성전만 지으라고 하신 신명기 말씀에 위배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에겐 질색할 일이고 둘 사이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 것이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극혐했지만 사마리아사람들도 나름 자부심을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온 야곱의 우물입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인 야곱이 여기 살았고, 야곱이 썼던 우물이 이 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시원한 물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이 땅이야 말로 진짜 이스라엘의 땅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이 세겜땅을 요셉에게 줍니다.

출애굽 때 가져나온 요셉의 뼈도 여기에 묻었기에 나름 요셉지파의 직계 혈통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무리 그런 자부심을 가져봤자 유대인들은 이들을 혐오하고 기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했던 최고의 욕이 예수님보고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남쪽에 예루살렘이 있고 중간에 사마리아, 그리고 북쪽에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지방이 있습니다.

남과 북을 왕래하려면 사마리아지역을 지나가야 하는 데 유대인들은 그게 싫어서 사나흘 더 걸리는 우회도로를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며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여행 경로를 잡으신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사이에서는 좀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도하신 곳은 수가라는 성이었습니다.

이 성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어귀에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시간은 정오였고 노정에 지친 예수님은 우물가에 털썩 앉아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곁에 늘 붙어 있던 요한사도는 남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중동 땅의 그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리는 정오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걸어 오신 것입니다.

운명적인 만남의 시간은 정확하게 시간표에 맞춰 이뤄진 것이죠.

우리의 구원과 삶의 중대한 사건들은 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 성취됩니다.

 

이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대화는 우물물에서 생수이야기로 그리고 예배로 이어집니다.

2. 먼저 예수님은 여인에게 우물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거십니다.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는 뜨거운 한낮에 우물가를 찾은 것을 보면 여인에겐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이죠.

사람 만나기 싫다는 거잖아요?

여인은 다섯 번의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지금은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죠.

그러니까 다섯 명의 남편들이 하나같이 이 여인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낮에 손수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을 보면 지금 사는 형편도 과히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이 천대받는 사마리아인 여자, 숨기고 싶은 과거가 많은, 지금도 손가락질 받는 처지의 여인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고, 학벌 좋고,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고위 관료들도 있었고 명예로운 가문의 여인들도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과 발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향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또 나 같은 사람을 찾아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부자고 잘 나서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낮에 물을 구하러 나온 이 시간이 여인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눈물을 삼키며 창피를 무릎 쓰고 물을 구하러 다닐 때 주님이 그 한복판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돈을 구하러 다닐 때였습니다.

그 때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듯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죠.

이 여인이 불안한 눈길로 우물을 향해 오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제 만났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셨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말을 붙이십니다.

이 우물에 두레박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깊은 우물이라면 당연히 도르래에 매달린 두레박이 있었겠죠.

물 긷는 사람이 두레박을 들고 다니진 않잖아요?

그랬다 해도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 물건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부정타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인이 예수님께 당신에겐 물 길을 그릇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탈까 봐가 아니라 여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손수 물을 떠서 드시지 않고 목마름을 참고 기다리신 것이죠.

여인은 유대인 남자를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 것을 몹시 경계하며 예수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 사람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유대인들을 좋아했겠습니까?
일방적으로 좋아해 주는 관계는 없잖아요?

관계를 계속하려면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사람 관계죠.

예수님은 상처입고 웅크린 짐승처럼 경계하는 여인의 마음을 계속 노크 하십니다.

우리도 단번에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3. 예수님은 여인과의 대화를 우물물에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로 바꿔 가십니다.

주님의 대화의 기술이시죠.

그래서 우리가 다 넘어 온 것입니다.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누가 들으면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약장수 둘카마라가 모든 여자들의 사랑을 얻는 가짜 묘약이라도 파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남다른 예수님께 여인은 관심을 보입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한낮, 먼 길을 나와 물을 길어가는 것만큼 지금 여인에게 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이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면 설마 그런 게 있겠냐고 체념하듯 말했을지 모릅니다.

15절,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여인도 이상하지만 갑자기 화제를 바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예수님도 참 뜬금 없으십니다.

인생의 문제를 아시고 거기에 직답을 주시는 예수님의 화법이죠.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문제의 핵심도 그 해답도 모르니 쓸데 없는 얘기만 나누다 끝납니다.

사람들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과 답은 사실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예수님께 나온 니고데모는 세상이 부러워 할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답답함에 예수님을 찾아왔었죠.

니고데모는 종교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떠나가신 하나님의 자리는 다른 것으로 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신을 찾고 궁색하게라도 신을 만들어 믿게 된 이유죠.

그리스 로마신화를 위시해서 사람들이 믿는 신이 다 만들어진 신입니다.

아니면 사람을 신격화 시킨 것이죠.

아니면 악령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들을 보면 한결같이 기괴합니다.

그걸 믿으며 영이 죽은 사람들이 영적인 체 하는 것이죠.

어느 민족도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제 힘으로 찾아간 민족은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 근처도 못 갔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십니다.

종교인이었던 니고데모만 하나님의 빈자리가 갈급한 게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영의 결핍을 세상에서 지치도록 찾는 사람입니다.

찾고 찾아도 채우지 못한 것이죠.

그것을 행복한 가정에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손에 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겐 각각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학벌이든, 외모든, 가정 문제든, 가난이든, 유독 남들에 비해 나에겐 주어지지 않는 결핍과 그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물론 그게 해결된다고 인생의 갈증이 풀리는 것도 아니죠.

오늘 여인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야곱의 우물을 경외하는 수준입니다.

다른 여자들에겐 그냥 일상이 된 고단한 노동이고 가볍게 수다나 떠는 장소이지만 그걸 갖지 못한 여인에겐 우물가의 삶이 선망인 것이죠.

여인이 계속 결혼에 집착하는 것도 평범한 행복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은 세상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의 실체를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과거에 무수히 찍혀있는 발자국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남는 건 실망, 배신, 상처 뿐 무엇을 얻었냐는 것이죠.

주식과 코인, 부동산으로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돈도 차갑게 배신하고 떠나잖아요?

성공도 행복만 주는 게 아닙니다.

성공도 인생의 어느 부분을 깊이 할큅니다.
하나님은 사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이미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예레미야2장13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인간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소시켜 주신 예수님 대신 자꾸 딴 우물을 판다는 것이죠.

스스로 만족을 위해 웅덩이를 파지만 그것은 터진 웅덩이입니다.

아무리 담아도 터진 곳으로 계속 빠져나가고 남는 게 없는 것이죠.

예수님을 배제하고 세상에서 우물을 파려고 하십니까?

절대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이 생수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7장에서 정확히 밝힙니다.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는 몸으로 느껴지는 생수의 이미지로 성령을 대치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깨끗한 물이 필요하듯이 영이 살려면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새생명에 항상 생기와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은 늘 물댄 동산 같이 마르지 않는 복을 누리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인 은혜의 생수가 내 생활과 내 산업에도 임하시길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지혜로만 세운 계획은 터진 웅덩이와 같을 것임을 경계하십시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화에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여인은 소스라쳐 놀랍니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감추고 싶었던 자기의 문제들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님을 직감하자 여인의 관심이 급속히 신앙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19절,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감추고 싶은 걸 들켰는 데 오히려 희망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으로 좋은 것을 얻었을 때 주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사실 내 죄를 책망하실 때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루실 때, 그게 설령 내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놀라운 희열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게 신자들에겐 제일 답답한 것입니다.

영의 기억을 깨우치는 주님의 말씀에 여인은 그 수치심도 개의치 않고 주님께 바짝 다가갑니다.

니고데모에게 너 거듭나야겠다고 하셨을 때 니고데모 반응도 똑같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냐며 주님께 바짝 다가가잖아요?

그런 만지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길 간절히 빕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대화는 생수에서 예배로 발전합니다.

여인은 담아 두었던 신앙의 생각들을 끄집어 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지은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그 곳을 여전히 예배의 장소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해야 한다는 데 그게 맞냐는 것입니다.

육적인 인간이 영에 눈을 뜨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속죄해 주심으로 바로 이 복된 예배의 관계로 데려가시려는 것입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다시 찾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을 예배하는 자로 만드셔서 찾아가시겠다는 것이죠.

1)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영과 진리로 번역된 이 부분은 진리의 영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영은 성령으로, 진리는 진리되신 예수님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죠.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 볼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영이,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예배해야지 육으로 예배하면 코드가 안 맞습니다.

예배가 뭔가 답답할 뿐이라면 영이 아닌 육으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으로, 진리되신 예수님을 통해 예배해야 합니다.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죠.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원문의 뜻은 장막을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우리와 함께 하실 장막을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 우리들 위에 장막을 펴십니다.

우리 위에 하나님은 은혜의 장막을 펴시고 우리는 영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려 놓으신 그림입니다.

그 마지막 완성을 요한계시록에서 역시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무엇인지는 ‘예배’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배하다라는 원어 단어의 뜻에는 굴복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 우리의 태도는 창조주이신 전능자께 무릎을 꿇어 굴복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예배하다라는 단어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다는 뜻입니다.

입맞추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입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우상에게 절하고 복을 비는 것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의 예배는 그런 인격적인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어떤 구호단체가 후원을 요청하는 한 어린 남자아이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암에 걸려서 6년째 투병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도 아이도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까봐 마음이 서로 너무나 간절하더군요.

할머니 말씀이 신이 있다면 종일 빌어라도 보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키울 수있게 도와주시라구요.

낡은 이불을 덮고 둘이 누워 자는 데 그 아이가 주름진 할머니 얼굴을 마주보며 소중하게 만지작 거리더니 볼에 뽀뽀를 하더군요.

그 모습에서 얼마나 할머니를 좋아하는지, 자기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할머니가 얼마나 귀중한지가 다 드러나더군요.

우리가 하나님께 입맞추는 예배가 그런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우리를 위해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께 입맞추며 예배하는 자식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믿는 우리 위에 은혜의 장막으로 덮고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그 장막 안에서 누립니다.

자식을 주신 경력이 있는 성부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아끼시겠어요?

그런 주님께 존경과 사랑으로 입맞추고 내 영혼이 가서 안기는 그런 예배자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주님께로부터 듣다 마침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마침내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 한사람을 구원하시는데 얼마나 진심을 다하시며 얼마나 우리에게 맞추셔서 진리로 인도하시는 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인도하셨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세상의 우물에서 갈증 나는 물을 하염없이 긷는 게 인생입니다.

이젠 주님께로 와서 생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이 생수를 얻으면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인 하나님을 알게되기에 이전의 목마름은 다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수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으면 일시적인 갈증을 느낍니다.

그럴 때 그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 예배, 말씀, 기도, 찬송입니다.

주님을 믿고 생수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위에 은혜의 장막을 베푸신 하나님을 매일 예배하며 주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으며 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