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거듭나야 들어간다 (요한복음3장1절-15절)

남수연 2022. 7. 29. 01:25

https://www.youtube.com/watch?v=rVWFs9qG83c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육신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자연적인 지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게 안 믿어져서 교회를 안 나오는 거잖아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게 된 우리는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속을 믿을 때 어떤 작용이 일어나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지 막연히 알고 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 이 원리를 우리에게 긴밀히 전해줍니다.

그걸 잘 모르기에 많은 신자들이 내가 믿는 것은 같은 데 과연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말 못 할 고민 속에서 삽니다.

그런 마음은 꽁꽁 숨겨 놓고 서로 덕담을 나누지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마음은 여전히 공허한 것이죠.

오늘 예수님은 주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기탄없이, 구원 받으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너 거듭났니?’

그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오늘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나눌 텐데 성령께서 이해와 믿음으로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것은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 구원, 영생은 다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죄에서는 구원을 받은 것이고, 영생을 얻은 것이죠.

오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1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분파의 사람들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은 이들의 율법준수가 하나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신을 두 가지로 해석해 주셨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둘 다 실패 했는데도 자기기만에 빠져 구원을 자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두 계명에 기준을 두지 않은 신자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사회의 최고 지도부였던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신분은 지금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결코 평범한 방문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속한 지도자 계급에선 이미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들과 다른 노선을 선택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2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치심에 대해 조사할 만큼 해 보고 신중히 결정한 것이죠.

당시 문헌을 보면 니고데모의 집안이 부자였고 로마당국을 상대할 만한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최고의 성공을 이룬 고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막 혜성처럼 나타난 종교계 신인이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한번도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담아 랍비라고 부르는 걸 보면 성공한 자의 오만함이 안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복음서에서 보기 드물게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신앙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게 은밀히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꼭 와야 했던 절박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화를 끌고 가시는 내용을 보면 그것은 분명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면 뭐하러 눈을 피해 야밤에 주님을 찾아 왔겠습니까?

니고데모의 번민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의 불안과 공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렇게 성공하고도, 저렇게 인품이 훌륭해도, 저렇게 종교에 열심을 내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유월절에 오신 예수님은 언제 예루살렘을 떠날지 모릅니다.

그 밤 황급히 주님을 찾아 온 것에서 마치 죽음에 쫒기고 있는 인간의 초조함을 보는 듯합니다.

내세를 믿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이기에 그 두려움은 더 컸던 것이죠.

그런데 종교지도자로서 차마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돼서 나 구원받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계신지 잘 안 믿어진다.

그런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절박함을 아셨기에 즉시 답을 내 놓으십니다.

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나라가 가려져 있는 이유가 거듭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사건은 성도 개인의 구원에 대한 말씀일 뿐 아니라 율법을 갖고 구원을 확신했던 유대인들의 구원관을 바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설령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니고데모 같은 유대인들일지라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현재도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단칼에 일축하는 말씀이죠.

구약성도들도 율법 안에 녹여 놓으신 예수님의 대속을 담보로 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양을 가져와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그 희생제물과 제사가 가리키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것으로 간주해서 구원하신 것이죠.

당사자가 오셨으니 옛것은 폐기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할례를 행했고, 율법을 지킨 니고데모지만 그걸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을 하는 게 유대인들처럼 종교 행위에 그친다면 구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또 아무리 착하고 도덕적으로 보여도 그걸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만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2.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니고데모처럼 구원에 집요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신자들의 큰 문제점은 이목이 세상에 쏠려 하나님과 구원과 같은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도 현재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될 내용에만 관심이 있고 심오한 신앙의 지식과 경건한 삶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으로 살아가는 위험성과 헛됨을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부럽고 행복해 보이시나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태해 보입니까?

세상의 성공은 끝없이 점점 더 많은 것을 갈아 넣어야 하는 자기 희생의 댓가입니다.

과연 희생한 만큼 얻은 것이 값진 것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등바등 벌어서 자식들 뒷바라지 했지만 아쉬운 거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공을 모르고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만 그 기쁨이 만족스럽지 않잖아요?

그래서 잠언에서 웃음 뒤에도 슬픔이 있고 즐거움 뒤에도 근심이 있다고 한 것이죠.

세상에서 계속 기쁨을 찾아다니면 결국은 중독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 만나서 놀고 여행 다니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았던 인간관계도 속으로 각자 계산한 관계입니다.

주고받는 데 균형이 깨지면 다 끝납니다.

돈이 많은 것은 생활의 안정과 풍요를 주지만 십중팔구 그 인격엔 오만이라는 치명적 독이 퍼집니다.

돈이 많다는 자부심이 아마도 세상에선 제일 큰 자부심인 것 같습니다.

전에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을 구조하러 온 119대원을 따라와 다짜고자 폭행했던 또 다른 술취한 사람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경찰이 와서 인적사항을 물으니 ‘내 직업은 부자야’라 대답했다죠.

이렇게 세상만 알고 사는 사람들에겐 사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귀와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줄에 매달아 농락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탤런트였다 무속인이 된 정호0 이란 사람이 가끔 방송에 나오더군요.

귀신이 보호해 줄 영혼의 주인이 없는 사람을 점찍어 그토록 처참하게 인생을 망쳐 놓는 것입니다.

정호0 씨의 경우는 귀신이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의 고통을 그대로 체감시켜 과거를 알아 맞추게 하더군요.

알려주려면 곱게나 알려 주지 악령의 심보가 그렇게 못 된 것입니다.

암이면 암의 고통 그대로, 농약을 먹고 죽은 조상이 있다면 약 먹은 고통 그대로 목이 타 들어가고 구토가 나온다고 합니다.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러니 아침이 되면 오늘은 또 어떤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올지 하루를 시작하는게 너무 두렵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오죽했으면 무당이 자기 입으로 내가 이러다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다고 하겠습니까?

성경에서 목자가 없는 양이 이리저리 유리하다 어떤 이리에게 먹힐지 모른다는 게 이 영적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내세에서도 하나님과 영원히 비껴 사는 파멸인 것이죠.

모든 불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평생 지은 죄가 하나님께 역겨워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생에서처럼 거기서도 하나님을 싫어하고 경배하지 않는 그 교만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죠.

시편2편에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 되어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 아들 예수님 안에서 얻어 누리는 복된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안전한 통치를 받는다는 게 주인 없는 삶과 비교가 안되는 것이죠.

세상에서의 내 삶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 더 가치 있게 이루는 것입니다.

매일의 평안, 만족, 기쁨, 조용히 생각하면 터져 나오는 감사, 하나님을 섬기는 보람, 영원히 벗어난 사망의 두려움, 보장 받은 내세.

우리가 이런 것들을 철저히 따져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인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세상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 절박함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3. 그렇다면 거듭나는 게 무엇인지, 나는 거듭났는지를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 전체를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한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1)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물은 세례의 의미처럼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와 거듭남은 분명한 짝입니다.

내 본질적인 죄가 회개 되지 않았다면 거듭나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데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가 계셔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부모로부터 단 한번 태어난 육의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육으로 태어났지만 다시 성령으로 태어난 영의 사람입니다.

실제로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이 둘 중에 하나겠죠.

그런데 거듭남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은 사실 네 가지입니다.

실제로 거듭났고, 자기도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사람.

실제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자기는 거듭났다고 믿는 사람.

실제로 거듭났는데, 아직 유아기 믿음인지라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실제로 거듭나지 못했고, 자기도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중에 나는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 중에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거듭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생명이 심어져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현상은 우리가 인지할 수가 없다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육의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은밀히 일어납니다.

거듭난 사람이 내 안에 이전과 다른 나의 영이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느낀다면 그것은 정신분열의 시초일 것입니다.

거듭났다 해도 내가 느끼는 것은 그동안 살아왔던 일관적인 나입니다.

2) 그러나 이전에 없던 변화가 내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거듭난 영은 그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이전과 다른 경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새롭게 된 양심으로 많이 표현합니다.

거듭난 영이 사람의 양심의 영역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한번 나를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듭나면 점점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다음 세상, 영원 같은 것을 믿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영은 세상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좋아하고 추구합니다.

이전의 ‘나’에게 이런 성향이 심어진 것이죠.

그런 성향이 들어왔기에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영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육을 포함한 전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이전엔 육의 생각을 따라 살아도 갈등이 없었는데 거듭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가 생기고 불순종하면 큰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꾸 죄송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있는 게 가장 거듭남에 가깝다고 믿습니다.

-성령님은 거듭난 사람의 영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그 관계를 확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평생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나 내 자신을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4. 거듭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율법으로도 안되고 선행과 미덕으로도 안되면 어떻게 거듭나 구원을 받습니까?

1)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셔야 합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불뱀과 놋뱀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사람들이 광야생활이 싫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됩니다.

그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게 하셨습니다.

죄로 심판받아 마땅한 백성들에게 구원 얻을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 본 사람은 살았습니다.

이 사건은 어린아이들도 다 알 수 있게 노골적으로 구현해 놓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15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그러니까 사람이 믿고 거듭나려면 이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된 소식,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있어야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설명하잖아요?

벧전1장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5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복음을 들을 때 그 살아있는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 판에 뿌려집니다.

이 복음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는 과정에 성령께서 작용하시고 새 영이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낳는다는 말이 스스로 태어나는 게 아님을 말하듯이 하나님이 낳으셔야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낳지 않으시면 사람 편에서 모든 노력을 다 해도 소용이 없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속죄로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예정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예정과 선택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신학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믿는 자에겐 영생을 주신다고 한 주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해 거듭남을 믿고 소망하시면 됩니다.

다만 믿음의 자료인 복음이 올바르지 못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이나 태도에서 어딘가 오류가 있다면 거듭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앞서서 나누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는 뜻은 왕을 모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되 주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이신데, 겉치레로 주님은 나의 왕입니다 하는 것은 안 통합니다.

진짜 내 인생의 왕으로, 매일의 생활 중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오늘 이렇게 거듭남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 잘 듣고 이해하는 것과 아예 이런 일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바르게 노력해야 바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나게 되었을까요?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뒤에 7장을 보면 다시 나옵니다.

예수님과 산헤드린과의 갈등이 점점 고조될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은 나를 변호하시고 나는 주님을 변호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다시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19장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절,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장사지낸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밤 예수님이 하셨던 바로 이 말씀을 떠올리며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세상으로만 만족해 살면 사망의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더 이상의 기회는 없고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영원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복음의 씨가 계속 마음에 뿌려지게 노력하시고, 성령께서 그 씨앗에 믿음이 싹트게 하시고 거듭나게 해 주시길 갈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를 얻게 되고 이 땅에서도 좀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거듭난 내 영이 선한 양심을 불러일으켜 내 육의 몸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힘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