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0장19절-23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남수연 2022. 4. 22. 23:40

https://www.youtube.com/watch?v=FCdyF06k2ac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입장은 무관심입니다.

부활에 대해 굳이 물으면 종교적 신화라고 답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하다 순교도 하고 고초도 겪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생각만 해도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님을 부활했다고 전파하다가 죽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잖아요?

무엇보다 예수님이 친히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구요.

그런데 성도들에게도 부활 신앙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부활하셨겠지’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짜내시고, 수천 년에 걸쳐 총력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루어 내신 구원의 거작입니다.

그걸 단지 예수님이니까 부활하셨겠지로 생각하고 넘겨버리면 믿음의 기초가 부실해 집니다.

뿌리가 깊어야 양분을 잘 빨아들이고 자라서 좋은 열매 맺는 신앙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 사건 속으로 들어가 은혜를 나눌 때 부활 신앙이 더 공고히 세워지리라 믿습니다.

 

1.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했냐는 것입니다.

1)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입니다.

심지어 바울사도는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가 아무 것도 못한다는 엄청난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15장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만 하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속죄해 주시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다음엔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구원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부활하셨겠지 그 정도로 알면 아쉽죠.

어떻게 이런 결과가 되는 건지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계속 들어왔기에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으시죠?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셔야 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남의 죄를 위해 죽어줄 수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부활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절대로 사망을 이길 수가 없고, 반면에 사망은 무죄한 의인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면 죄인들처럼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반드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셨다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죠.

역사상 죽음을 완전히 벗어나 부활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부활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격으로라면 당연히 부활보다 더 한 것도 하실 수 있죠.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자격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에 예수님은 또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기도 합니다.

 

2) 부활이 중요한 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라고 하는 것은 우리도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죽음 뒤에 다시 살아서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음 뒤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 예수님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어떤 부활의 몸을 갖게 되셨는지는 사복음서의 부활 기사에 골고루 정보를 남겨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의 분위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19절을 보면 이 날이 안식 후 첫날 저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째 되는 날, 주일 저녁입니다.

제자들은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괴이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시신이 사라지다니요!

이 황당한 소식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달려 무덤을 확인하러 갑니다.

마리아의 말대로 돌로 된 큰 무덤 문은 굴려져 있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 시신을 가져갔다면 수의를 벗겨내고 가져갔을 리가 없죠.

게다가 수의는 헤쳐지지 않고 시신을 감쌌던 모양 그대로, 머리를 말았던 모양대로 돌돌 말린 채로 누우셨던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되 일어나 수의를 훌훌 벗어 던지신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냥 수의 밖으로 슥 나오신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문이 단단히 잠겨 있는데 갑자기 방 한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 같은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만 살아나신 게 아닙니다.

분명히 몸이 없어졌잖아요?

제자들이 영으로 알고 두려워하기에 주님이 육체가 있다는 걸 보여주시려 생선 한토막을 드시기까지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성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뀌신 것입니다.

그대로 승천하실 수 있는 신비한 몸인 것이죠.

우리의 몸도 주님처럼 이렇게 영생할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습도 달라지셨습니다.

부활의 기사들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셔서 제자들이 잘 안 믿었다고 전합니다.

오늘도 손과 허리의 상처 자국을 보여주시니까 제자들이 기뻐했다고 하잖아요?

누가복음을 보면 이 말씀도 하셨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제자들이 의심하기 때문에 손과 발의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면 좋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모습으로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부활할 거라 생각하기가 쉽죠.

다 늙어서 죽을 텐데 그런 모습으로 부활하고 싶으십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죠.

단 ‘나’로 살았던 이 세상에서의 인격과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예수님이시잖아요?

본문 앞에서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가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 순간에 예수님이신 줄 알아챕니다.

가끔 오래만에 방송에 나오는 배우 중에 누군지 못 알아볼 만큼 성형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이름을 말하기 전엔 정말 모르겠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이 그 사람을 몰라보겠습니까?

말을 해 보면 그 안에 있는 그 사람이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한 세상 살았던 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서로를 반갑게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결과로 우리가 얻게 된 선물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물을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이건 주신거니까 반드시 받아서 누려야 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전반적으로 부활을 안 믿고 의심하는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봤지만 시신을 보면 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 유대인들이 들이닥쳐 끌고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방 한 가운데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가 있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평강이 있으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평강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전엔 우리에게 평강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평강은 아무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탈도 없는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루도 걱정 없는 날이 없고, 늘 가슴 졸이는 인생을 생각하면 평강이 없다는 데 백번 동의하실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사는 사람이 없잖아요?

국밥집에서 알바를 했다는 청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국밥집에서 일하며 보니 손님들이 거의 혼자 오는 남자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혼자 외롭게 와서 국밥을 먹거나 소주 한병을 시켜 혼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먹다 계산을 하고 나간다는 거예요.

간혹 우는 사람들도 있구요.

자기는 국밥집 오는 남자분들을 보면 왜 그렇게 짠한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왠지 짠한 인생의 속내를 들여다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고자 신권에 도전 했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 걷어 차버린 것입니다.

남겨진 것은 인생의 온갖 고통과 서글픔 뿐인 것이죠.

하나님을 떠나있는 인간에게 평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상태 대신 사람 편에선 반란의 마음이, 하나님 편에선 죄악에 대한 진노만 있는 것이죠.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평강이 없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부터 서로를 탓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평강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인생을 둘러 싼 모든 환경들과도 평강이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의 축복 된 환경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대신할 거라 하셨잖아요?

가시덤불에서 무얼 수확하겠습니까?

인생은 일신상의 수많은 문제들, 고통을 주는 사회 문제 같은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불안 불안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다시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평강은 구약성경의 언어로는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대체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평강을 뜻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샬롬에서 파생한 동사 실람이라는 단어가 지불하다, 빚을 청산하다 라는 뜻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빚을 청산하고 값을 지불해야 샬롬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값을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샬롬을 주실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사람에게 평강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갚아야 할 죄의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강을 받은 우리도 이 평강이 깨지고 옛날처럼 불안하고 두렵고 염려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아무 갈등과 괴로움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미 근본적인 평강을 주셨고, 모든 것과의 사이에서 평강이 없던 과거와는 다릅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우리의 의지로 평강을 유지하고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항상 경외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예배와 말씀과 기도로 줄곧 하나님을 만나길 추구하면 하나님과의 평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이 되면 나머지는 훨씬 쉽습니다.

사람들과의 평강에 있어서도 평강이 깨질 때가 많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해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상대할 때 그 사람보다 내가 조금만 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 관계의 불편함은 많이 해결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까지 아니래도 저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만 더 사랑하자 생각하면 관계에 평강이 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게 조금이라도 있잖습니까?

내 말을 왠지 오해한 것 같기도 하고, 헤어질 때 표정이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그것은 단지 내 입장이 곤란해질 걸 염려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 사람보다 조금만 더 그를 사랑하자라고 대하면 모든 관계가 의외로 평강입니다.

가족들 간에 평강이 깨지는 것도 내가 해 준 만큼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해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죠.

큰 문제가 아니라면 내가 한스푼 만큼 더 사랑하자 생각하면 가정에 평강이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그런 사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멘탈 갑입니다.

나의 신병을 위시해 모든 환경과도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평강을 깨뜨리는 것은 여러 신체의 질환들, 경제적인 문제, 미래에 대한 염려 등 다양하죠.

이런 문제에서 평강을 유지하려면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해결해 가라고 이미 해답을 주셨습니다.

기도는 요행을 바라는게 아니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극대화시킬 지혜를 얻고 내가 못하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니 당연히 평안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죠.

나 혼자 큰 짐을 지고 허덕이다 영 일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집채만한 짐이라 해도 끈기있게 하나님께 구하며 결국 훌훌 벗어던지는 분들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짐이 가벼워졌기에 지금 두려움과 한숨 대신 평강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주님의 이 모습에서 떠오르는 성경 내용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빚으신 뒤 호흡을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2장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어지는 기사를 보면 다른 동물들도 흙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뒤 생명을 주신 것은 사람과 동물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도록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아담과의 약속에서 하나님이 내건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최상의 축복을 다 주셨건만 불순종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불순종 뒤에 더해진 형벌입니다.

아담은 불순종 즉시 죽은 영이 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후손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속죄하고 부활하심을 믿는 성도들은 이전처럼 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성령이 오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다시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장3절에서도 이렇게 이것을 설명하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살면서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 은혜로운 관계를 가지냐는 성령충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앞장 서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지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성경은 성령충만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받고도 이전처럼 열매 없는 육체적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주시고 성령충만도 주시는 예수님께 구하고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신약성경의 단어가 에클레시아인데 그 뜻이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에 구원을 받고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다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는데 보내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반드시 우리를 증인이 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안에 성령이 계신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나는 어떻게든 증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냐는 것이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할 증인이 되도록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명도 선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기쁨과 보람은 그 무엇보다 큰 선물이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기쁘게 주님이 보내신 곳으로 갑니다.

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꿈은 잘 안 꾸는 편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꿈을 꾸는 데 어둑한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같이 넓은 장소에서 끝도 없이 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 줄을 거슬러 아래로 내려가는 데 줄이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꿈에서 ‘밥을 먹으려고 이렇게 긴 줄을 서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었는데도 생각이 나서 이렇게 해석을 해 봤습니다.

세상에 저 수많은 사람들이 영의 양식에 굶주려 무언가 받아 먹으려고 저렇게 긴 줄을 서 있구나.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영의 양식인 성경말씀을 가르치게 하시는구나.

나도 주님의 양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주님께 영의 양식을 받아서 잘 공급해야겠다.

꿈보다 해몽이죠?

예수님을 알기 전에 내가 영적으로 죽었었고 생명의 양식은 입에도 못 대봤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었고 교회로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쳐 주어서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가 사해졌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면 저들도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큰 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3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들의 죄가 아직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죄사함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늘 전하게 하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느껴지시는 게 있습니까?

그렇게 사랑한 제자들이 배신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서운함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할수록 배신의 아픔은 크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무리 큰소리를 쳐 대도, 그들이 단지 먼지이고 티끌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셔서 성령을 주시고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 군대가 된 것처럼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행전을 써 내려 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의 이야기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 말씀을 통해 목격하셨으니 증인입니다.

이제 확신을 갖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셔서 평강과 성령과 사명을 선물로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