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1장1절-18절)

남수연 2022. 7. 15. 23:11

https://www.youtube.com/watch?v=tkohiY6Txvg 

지난 주까지 시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어떤 성경을 함께 보면 좋을까, 지난 주일 오후부터 성경을 찾아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유튜브를 검색하다 요한복음 설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좀 나눌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심코 노트북 옆에 펼쳐져 있는 성경책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그런데 펼쳐져 있는 성경을 힐끗 보니 요한복음1장이었습니다.

이럴 때 머리 꼭대기가 찌릿하죠.

요즘 제가 좀 신비주의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날 밤 여기저기 넘겨보다 우연히 요한복음1장이 펼쳐진 상태에서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할 때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이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구나.

하나님의 그런 관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몇 주간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지정해 주신 본문이니 모두들 잘 들으시면 각자에 맞게 예비하신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우리의 신앙에서 기억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각자 믿는 막연한 절대자 신을 믿는 것과 똑같습니다.

구약성경만을 믿는 유대교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같은 성경을 가졌다고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이단들도 거의 우리와 같은 성경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오신 모판이 되었지만 정작 오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고 계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종이에 써 본다면 몇 장을 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정작 예수님은 못보는 신앙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이 전해 준 복음서입니다.

요한사도는 왜 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을까요?

그 이유는 뒤에서 밝힙니다.

20장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요한복음을 묵상하면 반드시 주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요한사도가 말하고자하는 예수님을 먼저 요약한 것입니다.

이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믿음의 기초가 잘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요한 사도는 세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에서 ‘말씀’ 대신 예수님을 대입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과 모든 성경을 종합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고 예수님은 제2위격의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왜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렇게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태초의 존재 방식은 예수님 모습이 아니시기에 예수님이라고 지칭하기엔 좀 어울리지 않죠.

아무도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의 존재 방식을 모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제2위격 하나님을 지혜, 말씀, 여호와의 사자, 이런 식으로 이름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수행하신 역할을 하셨기에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서로 교통하며 관계를 맺는 인격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구 역사 상 가장 신비로운 인물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신비로울 게 하나도 없죠.

다 부모를 통해 태어나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만이 예외이신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 자연을 초월한 기적의 사역, 십자가와 부활, 승천.

하나님도 되고 인간도 되신다는 이 신비는 우리 머리로 이해할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믿고 그대로 믿어야 할 진리입니다.

복음서의 첫마디 부터 요한사도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정면돌파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믿던 유대교 문화에서 반발과 박해를 불러올 치명적이고 위험한 발언입니다.

인간 역사는 끈질기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누가 인정하려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면 알 바 아니지만 땅에 오신 하나님, 인간처럼 되신 하나님은 목에 걸린 선악과처럼 불편한 것입니다.

차라리 인간 석가처럼 종교의 창시자라면 부담없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역사는 예수님을 자꾸 사대성인 중 한 명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진리에 바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인간은 역사 이래 다 사기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덮고 사대성인이라고 하자는 게 타당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한다 해도 인간 예수님이 주장하신 내세를 뭘 보고 믿겠어요?

확실치도 않은 하나님을 믿느니 저도 팥쥐처럼 콩쥐나 부려먹으며 편히 사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믿음이 없이 세상의 판단에 흔들리면 믿음의 완주를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처럼이나마 나를 희생하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주님이 거부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심을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속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지으신 그대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키 작은 삭개오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겠다’ 금방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모르시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실 때 성격과 외모와 기질을 남과 구별해서 하나하나 사랑의 마음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그런 창조주의 사랑을 지금은 다 알지 못합니다.

왜 나를 남보다 못하게 지으셨나 차별하셨다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만든 우열의 기준과 내 죄성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근본 하나님이 만드신 나에게는 악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창조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내 약점이었던 것들도 원하고 노력하는 만큼 얼마든지 본래처럼 아름답게 개조됩니다.

또 지금의 부족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위장하고 포장해야 하기에 그것이 얼마나 큰 짐인지 모릅니다.

가족일지라도 내 모습, 내 마음 그래도 내놓고 살지 못하잖아요?

아무리 그렇게 힘들게 살아도 사람 관계는 늘 만족스럽지 않고 지치고 부대낍니다.

그럴 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도 괜찮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면 정말 맥이 풀릴 정도로 편하고 위안을 받게 됩니다.

남들에겐 나를 쉴 새 없이 이해시켜야 되지만 하나님은 그냥 나를 아시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잘 자라고 잘 살아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창조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믿으면 죄로 인해 왜곡 된 모든 상태에서 우리를 점점 온전하게 재창조해 나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11절, 자기 땅에 오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성육신하셔서 예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한계 속에 자신을 제한시키며 사람으로 태어나신 이유는 모든 성경이 일치되게 알려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야만, 자기가 지은 죄로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죄 없는 누군가가 대신 짊어질 수 있다고 합법화 해 놓으신 것이 구약성경의 희생제물의 제사법입니다.

그러나 누가 아무 죄가 없어서 내 죄를 속죄 할 자격가 될 것이며, 누가 자신을 생명을 버리고 대신 나를 구해 주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심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을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인생을 빗대어 표현하실 뿐입니다.

49장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나를 향한 이 깊고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젖먹이가 어미 품에서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안과 고독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 빛, 자녀의 권세입니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죽지 않을 것 같이 살아 가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보통은 잊고 살지만 내면 깊은 곳에 해결할 수 없는 이 숙제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에 대한 시름이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죽음은 세상을 주무를 권력과 부를 가진 자에게도 무자비합니다.

사람은 자기 죽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아베 전일본총리가 총격으로 사망한 보도에 다 충격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찰나에 산 목숨에서 죽은 목숨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죠.

이게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의 죽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몸은 유효기간이 있게 창조하셨잖아요?

육체의 죽음은 인정하지만 죽음 뒤에 살아 갈 내 생을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생의 삶만큼 내세의 삶도 확실하게 믿어집니다.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야겠지만 그 뒤의 삶에서도 내가 여전히 지금의 나로 영생하며 산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죠.

물론 지금의 불완전한 내 모습이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듯이 죄의 몸을 벗고 부활의 몸으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알고 나면 이 땅의 생명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아주 분명하게 정리가 됩니다.

점점 모든 시간을 영원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고 이 영원한 생명을 반드시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밝히시는 빛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서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장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이 밝고 찬란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한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빛이 비취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빛이 비취면 당연히 어둠이 알아야 하고, 어둠이 물러가야 맞죠.

그러나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완전한 맹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맹인의 어둠은 여러 가지 나쁜 상황을 내포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죄도 모르고, 죄로 인해 심판 받게 된 자기의 멸망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세상도 어두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이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를 보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영의 눈으로는 봅니다.

보니까 믿는 것이지 못 보면 이렇게 언제까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안 보이시는데 영의 눈이 보고 있기에 안 계시다고 부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어느 순간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배운 대로 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눈을 열어 주셔도 볼 게 없는 데 뭐하러 열어 주시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부지런히 성경으로 계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시면 하나님만 보이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 싼 오만가지 죄와 악의 모습들도 비로소 보입니다.

과거에는 그런 것을 못 보았다 지금 보고 있다면 내가 눈을 떴고 빛 가운데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게 없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든지 아직은 영적으로 눈 뜨지 못한 상태입니다.

-눈을 뜨면 세상이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악과 어둠에 있다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오히려 어둠에 속한 것들이 내게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밝고 화려하게 사는 것 같지만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신상에 변고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어둠에 빠집니다.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이 다 가망이 없이 깜깜해도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다 해도 어둠에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 빛 가운데로 걸어가 마침내 어둠을 빠져 나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작은 위기에도 앞이 캄캄해지지만 예수님을 알면 큰 시련 중에도 빛 가운데 행하게 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못 보고 못 믿는 세상은 영적 맹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육적으로도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따로 요한사도는 3장19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단지 못 보는 것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악한 본성에 어둠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뭔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보려면 예수님을 피하지 말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눈을 뜨신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시고 눈을 뜨지 못한 성도들은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아! 저것이 그것이구나! 볼 수 있도록 열심히 성경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습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 이름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본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 나의 창조주,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성육신,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었던 내 마음의 보좌를 다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높은 곳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중해 주시면 우리가 사람에게도 존중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영접하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랜 타향살이에서 다시 고향집에 돌아온 것처럼 내 평안한 거처인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피흘린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나도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성도들이 왜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권세를 실제로 못 느끼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엄청나신 분으로 알지 않고 그렇게까지 경외하며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대단하지 않으신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대단하게 느껴질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거대한 세상 앞에서의 두려움도 지워줍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부터 세상의 어떤 권세자나 유명인 앞일지라도 주눅 들지 않을 자신감은 한번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나의 창조자로,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본성을 역행하고, 죄로 조성 된 인격과 습관을 따르지도 않고, 거룩함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증표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내게 얼마나 비싼 가격표가 붙었는지를 알기에 그에 맞는 생활을 스스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전해주신 대로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 외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마음에 깃든 어두움과 죽음처럼 조여오는 현실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무슨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항상 누리기 위해서 피곤을 이기고 더 굳건한 믿음을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는 사각지대 신앙이 되지 않게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며 주님을 밝히 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은 따로가 아닙니다.

지식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식을 차근차근 배워 놓아야 영적 맹인에서 눈을 떴을 때 그 지식대로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로, 구원자로 영접하셔서 빛과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