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장1절-11절 (물로 된 포도주)

남수연 2022. 7. 20. 17:41

https://www.youtube.com/watch?v=TE1GkkGERfc 

지난 주는 요한사도의 증언에 따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시고, 성육신하신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게 생명을 주시고, 빛으로 오셔서 나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은 먼저 이 사실을 선언하고 이어서 이 사실을 뒷받침할 예수님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먼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증언했던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이어서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경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가나의 한 혼례에 초대 됩니다.

거기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표적을 행하신 것이죠.

이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유년부에서부터 재미난 구연동화처럼 가르치지만 사실은 구절마다 의문부호가 찍히는 난이도가 높은 사건입니다.

이미 읽으시며 머리가 여러 번 갸웃하셨을 겁니다.

이 물음표 뒤에 하나님이 주시려는 말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물음표를 따라 이 표적에서 의도하신 핵심을 다룰 것입니다.

말씀을 그렇게 이해해야 믿음도 생기고 삶에 적용하는 것도 구체적이 되고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어떻게 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을 행하게 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 근처 가나에서 한 혼례식이 있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거기에 있었다고 하죠.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마리아와 혼주가 가까운 친척 관계 같습니다.

마리아는 미리 와서 혼례식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그 혼례에 예수님과 막 주님의 사역에 합류한 제자들이 함께 초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피로연에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하객을 예측하고 준비했을 텐데, 말술을 먹는 사람들이 많이 왔나 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 문화는 일주일 정도 길게 잔치를 하며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지금도 잔치에는 술이 빠지지 않듯이 당시의 결혼식에도 포도주는 기본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피로연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술에 취한 하객들이 계속 포도주를 찾으면 흥이 깨지는 건 고사하고 언성마저 높아질 수 있죠.

그럴 경우 결혼식을 서둘러 끝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일생일대의 결혼식이 곤궁에 빠진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 결혼식 준비에 관여해서인지 곤란한 상황을 에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하죠?

4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와 선을 그으며 도움을 거절하십니다.

그래놓고는 결국 하인들에게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시죠.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연회를 주관하는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십니다.

물은 포도주로 변해 있었고 연회장은 포도주를 맛보고 최상의 포도주라고 감탄을 합니다.

그렇게 혼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흥겹게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연히 이 표적을 행하게 되신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든 에피소드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었거나, 메시지를 담을 수 있게 계획 된 것입니다.

첫 표적을 즉흥적으로 행하실리는 당연히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문을 여시며 첫 번째 표적을 이 혼례에서 보여주려 계획하신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질 것을 미리 아셨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것을 다 아셨다는 것이죠.

연극 대본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신기하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잖아요?

사람 사이에서도 고수는 하수보다 몇 수를 미리 내다 보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요한사도는 이 사건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 사전에 기적은 없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나 기적이지 하나님은 마음먹으면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사도가 1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먼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보며 ‘아니,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냐. 이건 거짓말이네’.

그래서 못 믿겠다고 한다면 저는, ‘물로 포도주도 못 만드신다면 그런 예수님을 뭐하러 믿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이것을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메시지를 담은 표징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이 첫 표적은 주님의 사역 전체를 보여주는 큰 그림, 빅픽쳐입니다.

 

2. 그러면 왜 첫 표적의 장소가 혼인잔치였을까요?
성경의 인류 역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되죠.

그리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천국 혼인잔치로 마칩니다.

이 두 사건을 노골적으로 연결시켜 놓은 게 에베소서입니다.

5장31절,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결혼에 대해 하신 말씀이잖아요?

바울사도가 이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최초의 결혼부터 하나님은 마지막 그리스도와 성도의 혼인관계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계시록19장7절에서 천국의 혼인잔치를 이렇게 보여줍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교회를 피로 값주고 사셔서 영원한 아내로 삼으실 예수님이 그 공생애 사역을 혼인잔치에서 시작하는 게 아주 적합하신 것이죠.

우리의 구원을 신랑이 신부를 맞는 혼인으로 비유한 것은 예수님이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짓이겨 우리에게 혼인의 증표인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편에서도 그런 주님을 믿고 정숙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야 하는 것이죠.

이미 구약의 옛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이스라엘도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주님의 이 새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은 율법 준수를 전제로 한 불완전한 옛언약이 예수님의 속죄를 통한 완전한 새언약으로 대체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 예식에 쓰는 돌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의도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6절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유대인들은 밖에서 돌아오면 꼭 손을 씻고 옷에다 물을 뿌리는 정결 예식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부정 탔다고 소금을 뿌리고 그랬잖아요?

정결예식은 단순히 위생문제가 아니라 그래야 부정에서 깨끗하다는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부정한 것은 공동체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부정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죠.

그게 얼마나 철저히 유대인들 몸에 배었는지를 사도행전 베드로에게서 나타납니다.

환상 중에 부정한 동물들이 담긴 그릇이 보이고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들리자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그렇게 거절하잖아요?

새 언약을 믿고도 그 의식이 남아있을 정도로 몸에 밴 것이죠.

본문을 보면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세 통 드는 항아리는 한 백리터 정도 되는 크기를 말합니다.

이사할 때 쓰던 제일 큰 종량제 봉투가 100리터였습니다.

한없이 들어가죠.

이렇게 크고, 게다가 무거운 돌항아리가 왜 여섯 개씩이나 이 잔치집 입구에 놓여져 있었겠습니까?

하객들이 많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이웃에서 빌려다 놓았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돌항아리를 장정들이 굴려 와 준비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정결예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결예식에 쓰던 항아리를 예수님이 포도주로 채우셨다.

바로 감이 오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구원받으려고 부지런히 씻었던 그 물로 부정한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결예식 자체도 주님의 상징이고 예표입니다.

물이 어떻게 죄를 씻어주겠습니까?

진짜 죄를 씻어 주실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주시겠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새언약을 주실 예수님은 자신이 주셨던 그 옛언약을 사수하려는 유대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마귀와 더 많이 싸우셨을까요, 사람하고 더 많이 싸우셨을까요?

사람하고 더 많이 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각을 세우시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리신 갈등이 크게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새언약으로 오신 길에 유대인들의 율법 신봉이 가장 큰 방해이자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과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의 구원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표들이었잖아요?

출애굽 때 유월절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장자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얼마나 잘 설명해줍니까?

이스라엘은 구약성경과 율법을 받아 잘 배우고 지키며 예수님이 완전한 구원자로 오실 것을 기다리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 일이 엉뚱하게 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알고 맞이하라고 주신 모든 것을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무기로 씁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죠.

유대인들이 옛언약인 율법에 길들여져 새언약을 배척한 게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 아직도 그것을 모릅니다.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버림으로 주님 안에만 있는 복을 버린 것이죠.

참목자 예수님을 버렸으니 아무도 돌보지 않는 2천년 고난의 민족사를 겪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 걸림돌도 옛세계관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경험, 가치관, 물질주의, 전문지식들로 성경을 판단하죠.

유대인들이 정결예식의 물로 씻으며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안도감을 가졌듯사람들이 옛것을 목숨처럼 붙듭니다.

그걸 붙잡고 예수님을 놓으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서 티없고 흠없이 깨끗하게 된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왜 혼례에서 첫 표적을 행하셨는지, 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지는 알면 알수록 이렇게 은혜롭고 복된 진리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3. 왜 예수님은 마리아의 청을 처음에 냉정히 거절하셨을까요?

3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누가복음2장에는 예수님이 부모를 순종하며 받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어머니를 대하시던 태도는 아닌 것이죠.

상식적인 대화가 아니라면 이것은 영적인 대화입니다.

주님은 육신에 속한 질문에 영적으로 대답하신 경우가 많으십니다.

이 부분은 학자마다 해석이 다양한데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삼십세가 되었고 제자들을 모으시는 것을 보며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 혼례에서 예수님이 뭔가 비상한 능력을 보이시고 출사표를 던지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을 예수님께 알리며 주님의 사역에 관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경건하고 당차고 똑똑한 여인입니다.

당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야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는 큰 권능을 행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엔 메시야와 포도주를 언급한 예언도 많습니다.

이사야 25장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요엘 2장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포도주를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메시야의 징표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죠.

마리아는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아직은 정치적인 활동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고향에서 출사표를 던지고 점점 지지 세력을 키워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갈릴리 지방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마리아는 지금이 어떠냐고 예수님께 넌즈시 제안을 해 본 것입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의 문제에 생각과 힘을 보태고 싶어하잖아요?

이 마음을 보신 예수님이 그 순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메시야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로 마리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인이여, 이 일은 당신이 관여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혼례식의 기쁨을 줄 내 때가 지금은 아닙니다.’

내 때는 물론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때를 말씀하신 것이죠.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신다고 정해 놓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게 안되면 토라지죠.

내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주님이 하실 영역에 월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져야 할 짐만 져야 합니다.

내 짐이 아닌 것, 내 힘으로 안되는 것까지 내가 지고 짐을 부리려 하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지쳐서 못 갑니다.

마리아가 일손을 돕는 것까지 했다면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영에서나 주님을 위한 봉사에서나 항상 이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하실 영역은 기도로 맡기고 부탁드려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자여 하시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이제 예수님과의 혈연적 모자 관계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이젠 어머니로서 아들을 쓰다듬던 육신의 정을 끊어버리고 주님으로 따라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고 당혹감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좀 애잔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죠.

우리의 사람 관계도 때로 바뀝니다.

내 육신으로 계속 안고 싶은 자식 같은 애틋한 관계도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합니다.

가득 찬 연민으로 쓰다듬던 내 자신도 떠나보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불쌍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예수님 안에서 나 자신을 포함 한 모든 관계들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족도 혈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으로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혜로운 마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의 평생에 아들이 아닌 메시야 예수님을 따르며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4. 예수님은 아니라 하고 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까?

본래 예수님이 계획하신 일이었잖아요?

마리아는 그 사실은 몰랐지만 단지 예수님이 이 상황을 모른 척하지는 않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5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삼십 년을 하나님하고 산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가득한 죄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과 며칠 지내면 누구나 ‘이 분은 사람과 다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 본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다윗은 잘 이해가 되고 바울의 심정이나 인격도 쉽게 공감이 됩니다.

사람은 다 빤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질적인 사람이 아니시라 사실 그렇게 마음에 쏙 들어오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간 예수님으로서만 안다는 것은 무리이고 오히려 위험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믿고 신뢰하는 게 우선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배우는 것이고, 교감이 되는 것은 성령께서 감화하시는 만큼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완벽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따뜻하고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주님만은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실 때 어떠셨을까요?

노파의 집에 문짝이 떨어지면 연장통을 들고 가서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지붕도 올라가서 손봐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시는 것은 숨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셨습니다.

어느 인간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과 필요를 자신의 문제로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크게 도울 것 같아도 시간이 가면 점점 발을 뺍니다.

우리 문제를 주님의 문제로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이신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문제를 떠맡기고 걱정의 기색도 없이 자리를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전한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이 표적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주님은 곤궁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시고 혼례의 기쁨이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가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정결한 신부가 되게 하셔서 천국의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다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를 만들어 기쁨을 주셨듯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도 필요와 기쁨이 고갈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영적인 내용들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으면 상상이고 공상일 뿐입니다.

우리 삶의 필요는 주님으로 부터 계속 채워지고 기쁜 일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부가 신랑을 기뻐하는 것 같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점점 더 예수님 그 분 자체를 한없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씻어 영원한 주님의 신부로 맞아 주셨습니다.

아직 불완전한 이생에선 모든 것이 만족하게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항상 무언가가 다 채워지지 않은 부족 속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무언가 동나고 난처한 일이 벌어질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늘 염려가 떠나지 않는 심약한 마음이 됩니다.

떨어지면 하나님께 구해서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담대해집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맹물과 같은 내 삶을 얼마든지 기쁨을 주는 포도주와 같이 만드실 수 있습니다.

연회를 주관하던 연회장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가 극상품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냥 보통 포도주만 주셔도 감사한 처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최고와 최선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를 판단해 누구에겐 최고를 누구에겐 그 아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 가장 알맞은 것을 주시되 돌항아리 여섯 개를 다 채울 만큼 풍성하게 주십니다.

단 구하지 않으면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만 잡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하고 구원의 기쁨과 삶의 풍성함을 위해 기도하고 항상 채워지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