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빌라도의 재판 (요한복음19장6절-16절)

남수연 2020. 4. 7. 13:56

https://www.youtube.com/watch?v=zyf9KVC6Qws&t=1829s

<주일예배 실황>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로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코로나전염병으로 인해 교회가 이 소중한 절기에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누가복음21장에서 예수님은 지구역사의 종말에 있을 일들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종말에 가깝고 이런 종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예수님은 이런 재난과 박해 속에서도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으리라.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우리가 이렇게 영혼의 구원과 삶의 안전을 약속을 받게 된 게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나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속죄로 인해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믿음과 삶을 확고히 세우면 어떤 위기가 와도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믿음을 굳게 하고 영혼의 구원과 삶의 승리를 강건히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로마 총독부의 법정에서 받은 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법적인 기록이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도 호적을 정비하라는 법이 생겨서 출생에 대한 기록과 족보가 전해지게 되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 사회의 법을 활용하신다는 것은 다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돕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습니다.

이 재판을 통해 우리는 세상 법정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를 역사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료가 되는 것이죠.

막연한 신앙은 사실 아무런 유익이 안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셨습니다.

밤중에 긴급 소집된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고 신성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십니다.

그 뒤 유대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로마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발 당시의 죄목은 신성모독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메시야, 유대인의 왕이라 칭했다는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죄였습니다.

이스라엘 대다수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분위기에서, 대제사장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되 책임은 면하려고 로마법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재판의 전체 과정을 보면 신성모독죄와 황제 반역죄가 같이 거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재판에는 물론 주님의 속죄에 대한 중요한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1) 먼저 로마법정에서만 내릴 수 있는 이 십자가형은 예수님의 죽음이 속죄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가 고안한 이 잔인한 십자가형은 구약성경 속죄제사에서 보여준 제물의 죽음과 가장 닮았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제물이 된 동물은 먼저 그 피를 다 쏟아내고 번제로 태워졌습니다.

십자가형에서는 몸에 있는 피가 다 흘러나와 사망에 이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두 죽음을 관련시켜 이렇게 십자가를 해석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제물의 피처럼 죄를 속죄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대속제사는 예수님의 속죄를 미리 학습시킨 것이죠.

2) 또 이 재판은 세상 법정이 예수님을 어떻게 조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6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일당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란을 피웁니다.

이미 일차 심문을 마친 빌라도가 나와서 이렇게 말하죠.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법정에서 털어도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빌라도의 재판이 밝혀주는 것입니다.

비록 불법이 개입 된 재판이라 할지라도 빌라도의 재판은 예수님이 죄없이 죽으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또 예수님의 신상에 대해서 법정이 무엇을 밝혔냐는 것입니다.

7절에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고발하죠.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실제 예수님의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빌라도가 다시 심문하지만 38절에 보면 빌라도가 나와서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사기꾼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빌라도의 법정은 예수님이 세상법에서도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에서도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공증해 준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도 더욱 공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심리 결과를 보면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제일 싫어합니다.

최근 김용0 씨가 예수님에 대한 황당한 책을 펴냈죠.

김용옥씨는 책에서 예수님이 한번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에게 심문당할 때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셨습니다.

7절에서 대제사장들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하면 이 재판은 성립되지도 않았고 십자가형을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안 믿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주인인 하나님 따위는 없다고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속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과 형벌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죠.

빌라도의 법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억지 부리지 못할 법적 기록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 기록을 남긴 요한사도는 대제사장과 가까운 사이였고, 그날 모든 재판의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하셨고, 빌라도는 그 말에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판결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잘 믿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이 재판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정확한 때에 맞춰 빌라도가 진행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런 엄청난 재판에 어쩌다 연루가 된 것이죠.

그렇기에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점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빌라도는 유대에 파견 된 로마의 총독으로서 이스라엘에 돌풍을 일으키던 예수님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선 애굽에서의 해방절이었던 유월절만 되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치솟았습니다.

민중을 선동해서 독립전쟁의 불을 지피는 인물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메시야로 추앙하는 헤프닝이 종종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왜 진작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았겠어요?
이미 알아 볼 만큼 알아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을 몰고 다니시지만 로마의 반역의사가 없고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단지 한 때 인기몰이를 하는 신비한 종교인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직접 만나 심문해 보니 주님께로부터 점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닳고 닳은 정치인 빌라도도 예수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빌라도에게 해 준 똑같은 말을 앞서 대제사장의 공회에서 하셨을 때 그들은 전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모독이라며 뻔뻔하게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참된 신앙의 표지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종교가 되어 버리면 하나님 앞에 뻔뻔해집니다.

빌라도 같이 기독교 안에 뭔가 경이로움이 있음을 감지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신앙을 가진 교회 안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뻔뻔한 것을 본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회를 등지게 될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처음 느끼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9, 너는 어디로 부터냐

예수님이 대답이 없자 초조해진 빌라도는 너를 놓을 권세가 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대답을 독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빌라도 자신의 판단과 권세로 결정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대제사장과 빌라도는 자기가 가진 권세와 야욕으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내렸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조장하시는 상황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특별하게 조장 된 상황 속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모르는 사이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의 모든 상황과 환경은 하나님이 모르는 사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당할 것은 당하고, 부딪힐 건 부딪치고, 해결할 건 해결해 가면 주님의 뜻을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같은 최악의 결정이 구원이라는 최고의 결말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어떤 나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최선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빌라도가 내렸지만 인간을 속죄해서 구원하시려는 삼위하나님의 일치되는 뜻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합의 된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주님과 동일하게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처럼 육체의 죽음 같은 끔찍한 것을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에 심한 고난이 있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옛사람과 충돌합니다.

옛사람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은 우리 안에 피가 튀는 전쟁과 다름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덤덤한 신자의 삶에 대해 히브리서124절에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다 세상과도 부딪치고 세상에서 억울한 일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삶의 태도와 죄의 습관이 저절로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동호목사님은 이것을 두고 신앙은 자동이 아니라 수동이라고 말씀하더군요.

만일 신자들이 이전과 같은 안일한 태도와 죄를 쉽게 생각하고 산다면 실생활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잡아 놓은 불신자보다 신자들을 노립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 귀신 하나를 내 보내고 집을 청소했지만 그 집이 그냥 비어 있다면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님은 반드시 받으신 자녀들을 신실하게 징계하시면서 온전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매일 져야 할 십자가를 팽개치고 본성을 따라 쉽게 살아간다면 결국 삶은 고생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은 하나님의 선한 뜻과 타인의 유익과 자기 영혼의 복된 성장은 한 뼘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이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믿고 얻은 구원의 축복 뿐 아니라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의 삶을 다시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빌라도의 재판 결과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판결이 알고 보니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건 선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 과정을 잘 읽어본 사람들은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믿었고 주님을 죽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판사가 아니라 마치 변호인처럼 대제사장과 팽팽한 변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서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으셨다고 하죠.

빌라도는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사형판결을 하는 빌라도보다 법정으로 주님을 끌고 온 유대지도자들이 더 죄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빌라도 역시 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고발했던 그 죄목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뭔가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사람이 예수님께 대한 호의를 갖고 또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믿는다 해도 그것이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최후에 무엇을 붙잡느냐로 확인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두 마음을 갖고 삽니다.

정치적이고, 계산이 빠르고 영리하지만 완전하게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죠.

빌라도의 본심을 드러나게 한 결정적인 말은 12절입니다.

이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 당시 괴팍한 디베리오 로마황제는 왕위를 넘보는 자들을 잔인하게 다룬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여 반란을 주동한 사람을 두둔했다는 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빌라도의 정치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이 땅의 왕과 땅의 왕이 주는 영광을 선택하는 것이죠.

15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받드는 양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발했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도 하늘의 왕이 아니라 땅의 왕과 땅의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일과 사람이 늘 우선이라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왕이 아니라 세상의 왕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는 신자들 조차 실생활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고려하지 않는 것도 큰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모든 것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결정되고 사람을 통해서 그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시험 당할 때 세상 왕을 택하지 않으려면 훈련해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서 지키는 훈련입니다.

작은 일, 오늘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는데, 오늘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지 못했는데, 죽음 같은 위기와 세상 유혹에서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고 견고해 집니다.

내 믿음이 단순히 성경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는데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말씀대로 선택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결정적 순간에도 예수님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쪽을 붙잡느냐가 바로 내 믿음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상식이나 종교, 좋은 사상이 아니라 생명임을 굳게 믿고 생명의 말씀대로 선택하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기사를 읽을 때 우리를 당황시키는 게 무엇입니까?

주님의 고통과 아픔이 절절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서둘러 감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인격 중 감정은 가장 성급하지만 가장 불완전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고난을 공감할 만큼 깊은 영의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가족 간에도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잖아요?

예수님의 고난에 우리 심령이 진심으로 아픔을 느끼고 운다면 사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슬픔이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고난의 의미를 알고 믿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운다면 먼저 그것이 바로 내 악한 죄 때문이라는 이유여야 합니다.

만일 내 부모가 나 때문에 매 맞고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걸 보며 내 부모가 너무 불쌍하다, 너무 아프겠다는 생각으로 울겠습니까?

먼저 나 때문에 당하는 수욕을 보며 내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울어야 맞는 것이죠.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울던 여인들을 향해 말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눈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렇게 나를 사랑하신 것을 믿고 흘리는 감사의 눈물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우리에게 그런 눈물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진정한 믿음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지 않습니다.

묵묵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들을 통해 온전하게 뜻을 이뤄가십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내며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믿음을 갖고 힘써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편에서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