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가나의 두 번째 표적 (요한복음4장43절-54절)

남수연 2022. 8. 13. 00:22

https://www.youtube.com/watch?v=TQZQlYpmpbI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너무 모르잖아요?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참 감사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전기문 형식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씌어진 복음서입니다.

이미 기록된 내용들을 똑같이 진술할 필요는 없었겠죠.

요한사도는 그보다는 몇 가지 표적이 되는 사건들만 기록하고 예수님이 해석해 주신 말씀을 덧붙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긴 설교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나라와 영생에 대한 진리들을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쉬운 책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한 주간 내내 뻔히 이해되는 자연세계에 몸담고 있다 교회에 옵니다.

다 이해되는 설교는 거의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반만 이해돼도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진리를 자꾸 들어야 구원받는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주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을 찾아가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본문 앞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마을로 달려가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와서 보라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청해서 이틀간 구원의 진리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고 나서 그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42절,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 마을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표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풀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된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사마리아를 떠나 고향 갈릴리에 도착하시며 시작됩니다.

중심 사건은 가버나움에 살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주신 내용입니다.

요한사도는 이것을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기 위한 표적의 시리즈라는 것이죠.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 가나에서 있었던 두 번째 표적에 가까이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주의해서 읽으신 분들은 첫 번째 표적에서처럼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면 그건 자연계지 영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고의 틀에서 삐끗하는 부분이 영적인 문을 여는 열쇠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도 그런 세 가지 부분에서 두 번째 표적의 뜻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과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에 대해서입니다.

43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절,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이 고향인 갈릴리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왜 그런지는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처럼 저를 잘 아는 많은 가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물론 사람의 경우는 천부적인 단점 때문이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삼십년을 마리아의 장남으로, 요셉의 뒤를 이은 마을의 목수로 사셨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어려서부터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선지자 자질을 닦으신 것도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이라 훈련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시죠.

그런데 목수 청년 예수님이 갑자기 선지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6장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지금 주님께서 바로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신다고 하신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리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미 요한사도는 1장11절에서 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이 이천년 전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이천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이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시던 상황이 지금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 백성인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예수님이 높임을 받고 계신가요?

예수님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갈릴리로 들어가셨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45절,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예수님이 친히 증언까지 하셨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네요?

이것이 본문에서 삐끗하는 첫 포인트 지점입니다.

다들 그런 생각이 들으셨죠?

여기서 영접했다는 말은 1장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냥 환영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는지도 이유가 나오죠.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니더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적을 본다고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많은 이적을 베푸셨던 갈릴리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던 것을 성경은 증거로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앞으로도 표적들을 많이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주시는지를 가르치실 모티브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표적을 다 가르치신 뒤에는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초대교회에도 처음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이적이 일어났지만 교회가 세워지고 정착된 뒤에는 계시와 이적들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열광했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임박해 말씀만 가르치시자 다 주님을 떠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잖아요?

6장67절, 너희도 가려느냐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적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만 끝까지 남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배우고 구원을 이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동안 여러 방식으로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바탕이 되고 말씀을 근거로 한 체험이 되어야 바른 믿음이 됩니다.

말씀을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성순례권찰님이 벌써 레위기까지 다 읽고 민수기를 읽고 계십니다.

여기서 권찰님보다 나이가 많아서 성경을 못 읽으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음식값도 올랐는데, 점심에 뭐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건강하게 채울 양식을 매일 섭취하시길 강권합니다.

 

2. 이 때 왕의 신하가 다급히 달려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헤롯왕의 신하로 가나 인근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고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죠.

우리 나이만 되도 벌써 부모님과의 작별, 형제들과의 작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중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고, 갑작스런 사고로 죽는 것은 사람에겐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구원을 요청할 예수님이 계시구나.

벼랑 끝에 선 순간에도 내게는 손을 잡아주실 예수님이 계시구나.

오늘 말씀에서 성도님들도 이 말씀을 제일 먼저 붙드시길 바랍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집에 두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오는 동안 이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조바심에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아들이 지금 숨이 멎은 게 아닌가,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야 할까.

그런 갈등을 수없이 반복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겨우 예수님을 만나 제발 내 아들 좀 살려 달라고 간청했는데 예수님은 화를 내시는 듯 엄격히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 삐끗하는 두 번째 포인트 지점입니다.

48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그 느낌이랑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우린 세 가지 주님의 의도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표적을 봐야만 믿기 때문에 표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적만을 구하는 믿음의 상태로는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적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도, 엘리사도 죽은 아들을 살려줍니다.

주님의 이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 같은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사람들이 와서 인생문제만 해결하고 돌아가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대속으로 베풀어 주실 구원과 영생을 얻어야죠.

그것이 주님께서 주실 가장 귀한 선물이잖아요?

지금 이 아버지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만을 듣고 나왔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이 모시는 헤롯왕으로 말하자면 세례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을 모시는 신하가 하나님을 경외할 확률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하고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을 측근으로 두잖아요?

죽어가는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단지 기적을 베풀어 줄 신통한 능력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엄격한 말투에 뭐가 잘못되었나 멈칫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주님이 의도적으로 기적에 대한 일념에 사로잡힌 이 아버지의 의식의 흐름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주님께 거절당하는 것 같은 섭섭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가 불발되고 응답이 지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거절당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승낙보다 훨씬 더 강한 메시지입니다.

지체와 거절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빌드업 해 가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신 것입니다.

빌드 업이란 말이 축구에서 많이 나오죠.

건축에서는 콘크리트를 타설할 때 두꺼운 층을 만들기 위해 여러 층을 순서대로 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빌드 업 해 나가십니다.

우리 믿음을 우리 혼자 만들어 가는 게 아니잖아요?

삶의 많은 문제들을 놓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응답과 지체와 거절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하는 믿음으로 점점 빌드업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늘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는 신앙과 삶의 부분이 있습니다.

그 문제로 하나님 앞에서 실갱이를 하는 동안 예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구원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해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까지 평균 11년이 걸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자기 인격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앞에 가져 나온 인생의 문제들이 그렇게 오래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해결이 안 되니까 못 떠난 것이죠.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소망이 없어서 못 떠난다면 그것도 결국은 축복이 됩니다.

하지만 병은 오래되었고, 여전히 통장엔 돈이 없고, 미래는 막막할 때 어떻게 그걸 축복으로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더라도 세상 사람들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 힘만으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버겁게 지낸 나의 하루를 최선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자식을 성의 없이 대하는 부모가 없잖아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답답한 인생이라도 우리는 주님께 핸들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서 우리 인생의 모든 여정을 인도하십니다.

다만 오늘 이 아버지께 간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딱딱한 반응에도 아이의 아버지는 절박하게 간청을 합니다.

49절,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주님의 목소리가 사뭇 엄중하다 해도 아버지에게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아이를 살리려고 주님의 발이라도 붙잡고 눈물로 호소할 수 밖에요.

우리에게도 사실 하나님 외에는 대안이 없죠.

그런데도 이 아버지처럼 예수님께 나와 간청하지도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토록 자식의 목숨을 애절히 구하는 아비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러나 우리의 소원이 빨리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않는 것이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철칙입니다.

예수님께서 끈질긴 기도를 강조하시는 불의한 재판장 비유에서 말씀합니다.

누가복음18장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 비유)

8절,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은 믿음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낙망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도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처음에 기적을 바라고 나왔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본문에서 뭔가 아귀가 안 맞는 것 같은 세 번째 포인트 지점입니다.

오늘 결과를 보면 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되었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냥 기적만을 얻고 돌아갔다면 이어지는 에필로그를 기록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성경을 기록할 때 한 사건을 무한정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두 번째 기적 하나만으로 제가 아홉 페이지 원고를 썼는데, 성경을 그렇게 세밀하게 기록하지 못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서 응답을 얻고 돌아가기까지 몇 마디 대화도 안 했습니다.

시간은 채 오 분도 안 걸렸을 것 같잖아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기적을 보고 갑자기 믿음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마술이 아닙니다.

더 많은 대화의 내용들과 그 다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과정이 생략되었을 뿐입니다.

요한사도는 이것을 추적할 단서를 남겼습니다.

51절을 보면 아버지가 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종을 만납니다.

아이가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급히 오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언제 아들의 병세가 나아졌냐고 물어봅니다.

52절을 보면 어제 일곱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하죠.

유대인의 일곱시면 오후1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살았다고 하신 시간도 똑같이 어제 1시였다는 걸 아버지가 확인해 주죠?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서 즉시 길을 나선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나와 가버나움은 거리가 약 3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쉬어가도 한 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장 집으로 향했다면 어젯밤 자정쯤에 도착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다음날까지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시 출발했지만 중간에 밤이 되어서 노숙을 하거나 여관에서 자고 아침에 계속 길을 가다 종을 만났다는 것이죠.

아니면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출발하지 않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집으로 가던 중 하인을 만난 것이죠.

어떤 쪽이 타당하겠습니까?

바로 가든 다음날 가든 도착시간은 어차피 내일 오후니 차라리 가나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일찍 출발하는 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종의 경우도 아들이 낫자 마자 출발해 중간에 괜히 여관에서 잤다기보다는 아침에 출발해서 왔다는 게 더 타당하죠.

밤에도 차가 다니는 지금과는 다르던 때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을 때 이 아버지는 아들이 살았다는 것을 믿었고 확신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뭐하러 죽어가는 아들을 두고 먼 길을 찾아왔겠습니까?

예수님이 살았다고 하면 산 것이죠.

아들이 살았다고 믿은 뒤 이 아버지는 가나에 머물며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고 주님은 성경을 풀어서 약속하신 메시야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도 갈릴리 사람들 속에 묻혀 복음을 듣고 결국 구원의 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기적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간 것이죠.

그는 종의 말을 확인하고 최종적인 결단을 합니다.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절망적인 문제가 있으십니까?

예수님 앞에서 구하십시오.

그것이 단지 기적을 구하는 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 계속 인도를 받으십시오.

요한사도는 이 사건을 두 번 째 표적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람 살리는 게 뭐가 대단합니까?

이 표적을 통해 이걸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5장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죽을 아들을 살려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영생으로 바꿔주신다는 표적인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나의 구주됨을 믿으시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