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5장1절-18절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인가)

남수연 2022. 8. 19. 01:03

https://www.youtube.com/watch?v=51iSuNZW3DA 

 

요즘 모르면 젊은이들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MBTI라는 성격 유형 검사입니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별로 나눠서 특징, 장단점, 알맞은 직업, 서로 잘 맞는 유형 같은 것을 분석해 놓은 것입니다.

이 검사 결과가 자기와 너무 똑같아서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해서 유형을 나누었으니 당연히 들어맞는 것이죠.

MBTI에 빠진 사회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만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문가에게 판별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제일 모르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만든 어떤 검사지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군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는 데 사실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를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경 말씀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해석해 주시는 것이죠.

자기를 모르면 성경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마음은 커녕 피부에도 와 닿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실하고 깊어진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많이 안다기 보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성령께서 본문 말씀을 통해 나를 알게 해 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잘 지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베데스다라는 못은 모든 군상들이 모인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명절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못을 찾아 가십니다.

예루살렘 시내를 둘러싼 성곽에는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는 문들이 있습니다.

그 중 양문은 제물로 드려질 양을 끌고 들어가던 문이라 양문이라고 합니다.

양문 곁에 이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저도 예루살렘에 갔을 때 이 베데스다 연못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주변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었고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천사가 와서 연못을 한번씩 휘젓고 가는 데 그때 제일 먼저 물에 뛰어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옛날에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가보면 강대상 앞에 불치병 환자들이 다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죠.

그런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그야말로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게 미신인지, 자연현상인지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 보면 이 소문을 사실로 믿었다는 것이죠.

아니, 사실로 믿고 싶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입니다.

절망적인 사람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아갈 구실이 되는 거잖아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면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같은 중환자들입니다.

세상의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은혜의 집은 과연 은혜의 집일까요?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간 모든 사람이 낫는다면 은혜의 집일지 모르지만 얄궂게도 제일 먼저 들어간 한 사람만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저 사람보다 내가 먼저 가야 살기에 서로가 오직 경쟁 상대인 여기가 과연 은혜의 집일까요?

옛날 가난하던 시절, 다닥다닥 붙은 동네에선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죠.

아낙네들은 공동 수돗가에서 싸우고, 집에선 술 취한 아버지와 엄마가 싸우는 소리가 창호지 문을 뚫고 나왔습니다.

먹고 사는 게 힘들면 너그러운 마음은 사치일지 모릅니다.

중국에서 코로나지역을 봉쇄한다는 소문이 나면 마트 물건이 순식간에 동이납니다.

서로 내가 먼저 집었다고 멱살잡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서 움찔하게 됩니다.

오늘 이 베데스다는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문제를 갖고 있지만 기대할 것이라고는 언제 한번 휘저어질지 모르는 저 연못 뿐입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근거 없는 희망을 갖죠.

이번 일은 왠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데 하늘이 나를 돕지 않겠어?

이 일만 성공하면 빚 다 갚고 나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봐야지.

이런 막연한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죠.

이 베데스다가 잔인한 것은 가장 심한 중환자에겐 결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해로 안타깝게도 반지하에 거주하던 가족이 참변을 당했습니다.

정치인들이 반지하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마구잡이 대책을 쏟아내고 있죠.

저도 신혼 때 반지하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과연 반지하, 고시원, 쪽방촌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기회가 옵니까?

베데스다 못에서 물방울이 솟을 때 맹인이 어떻게 그걸 보고 뛰어들겠어요?

다리 저는 사람이 제일 먼저 물의 소용돌이를 보았다 해도 일등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까?

만일 정말 누군가 병이 나았다면 아마도 제일 기동력 있는 경증 환자였겠죠.

아니면 24시간 병자 옆에서 물을 관찰하다 냅다 집어 넣어 줄 사람을 고용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언제 기회가 올지 옴짝도 않는 나의 환경, 기회인 것 같지만 뛰어들 능력이 없는 나의 형편.

그래도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오늘 이곳을 주목하는 것은 이곳이 하나님을 잃고 안식을 잃은 모든 영혼들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2. 강자만 승자가 되는 이 은혜 없는 은혜의 집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중 가장 불리한 삼십팔년 된 병자에게도 기회는 옵니다.

저도 예수님이 오셔서 기회를 잡은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에 오셔서 인생 전쟁터의 야전병원 같은 현장을 바라 보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십니다.

전쟁터 같은 삶에서 너덜너덜해진 누군가의 마음도 보고 계십니다.

많은 병자 중에서 예수님은 삼십팔년 된 병자를 보십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겠지만 삼십팔년이라면 거의 평생입니다.

그 정도면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행각에서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적선으로 살아가고 있었겠죠.

오늘 예수님이 이 사람을 주목하신 것은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죄인들의 실체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이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이 병자가 모든 죄인들의 모습인 것이죠.

이미 이 베데스다의 삶이 인생이 된 병자에겐 여기를 떠날 생각을 잊은지 오래입니다.

절망도 이골이 났고, 여기선 구걸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잖아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람들은 죄를 치료받길 원치 않습니다.

삼십팔년 된 병자도 사실은 치료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낫고 싶다고 안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유일한 희망은 연못인데, 넣어 줄 가족이 없다고 한탄하며 남을 탓합니다.

여기 있는 병자들은 그래도 다 나보다는 낫다는 것이죠.

20대 청년들에게 가장 불행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2위가 취업이 안될 때였습니다.

1위는 무엇일 것 같습니까?

행복한 친구들의 SNS를 볼 때였습니다.

다 나보다는 나아 보일 때 내 처지가 더 불행하고 슬프잖아요?

다 나보다는 낫다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절, 곧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한사도가 말하려는 세 번째 표적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병자의 치료는 우선 사람의 고통에 긍휼로 반응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병자를 치료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게 우리에게 최선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치료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속에는 표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고통에서 안식을 얻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은 다 영적인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받지 않으면 언제나 똑같은 고통이 반복됩니다.

베데스다의 인생에서 안식을 원하다면 예수님을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3. 이 세 번째 표적에서도 뭔가 흐름이 꼬여서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병자가 병석에서 벌떡 일어난 자기를 보고 놀라고 감격해서 예수님께 엎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말이 없습니다.

감사도 없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도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선에서는 이 병자가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끝나야 깔끔하고 편합니다.

대체 이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찜찜하죠.

구원도 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왜 예수님은 굳이 이 사람을 골라서 병을 치료해 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이미 이 병자가 병이 나은 다음에도 천부적인 죄의 성향과 고달픈 병상 생활에서 얻은 고약한 성질대로 살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걱정하신 대로 이 병자의 행동은 점입가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입니다.

문제는 병자가 누웠던 자리를 걷어서 들고 걸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지나치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상식을 무시한 해괴한 세부 수칙들을 236가지나 만들어 놓았고 안식일 준수냐 아니냐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그 안에는 안식일에 공공장소에서 짐을 들고 1.8미터 이상을 걸으면 안된다는 수칙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깔았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다 유대 지도부에 딱 걸린 것입니다.

그들은 왜 안식일에 짐을 나르냐고 추궁합니다.

병자는 병이 나은 생각만 하고 기뻐서 자리를 들고 갔는데 생각해 보니 큰 일이 난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유대사회에서 출교 당하게 된 것이죠.

이젠 구걸도 못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어디가서 벌어 먹고 살겠습니까?

그 생각이 들자 병자는 재빨리 예수님 핑계를 댑니다.

‘난 그저 고쳐주신 분이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그런 명령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다그치지만 병자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유대관리들은 이미 예수님인 걸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증거가 필요했습니다.가서 너를 고쳐준 사람을 알아오라고 병자를 보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가 자기를 찾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곤궁에서도 구해주시기 위해서 다시 병자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그랬더니 15절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보고했다는 뜻입니다.

이 병자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자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 16절,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결국 예수님이 이로 인해 유대교인들과 정면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이 병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 감사를 모르는 인간 같으니라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이 병자가 바로 죄의 본성대로 사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은 이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 한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다 용납하는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데 군종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종병에 합격시켜 주시면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다는 증거로 알고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나님과 딜을 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열심히 군종병이 되길 기도했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 일을 하겠다는 데 나를 거절하셔?’

얼마나 화가 나고 실망했는지,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리가 없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게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그나마 말씀대로 착하게 살려던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지더랍니다.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지?’

하나님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어떻게든 이 땅에서 즐기고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잘되기만 하면 된다는 게 결론인 것이죠.

그게 그야말로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동물의 왕국 같은지 아시겠죠?

나를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더라도 허용되던 게 본래 우리였습니다.

본성과 세속에서 만들어진 본래의 내 인격이 포장 하나만 뜯으면 이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 모습이 우리에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지금도 하나님까지 이용해 내가 살아보려고 합니다.

어제 큰 은혜를 받았어도 오늘 작은 불편함에 왜 이것까지 해결해 주지 않으시냐 당장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는 새마음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나의 옛 인격체를 매일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본성과 습관이 만들어 낸 옛사람대로 살면 언제나 우리는 옛날과 똑같습니다.

신자들도 참 안 변하는 게 다 옛날 인격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방법은 예수님의 교훈과 새롭게 된 양심을 따라 매 순간 옳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긴장 속에 살고 힘이 든 건 사실이지만 둘 사이를 오가다 보면 육신으로 살아가는 게 더 힘들고 괴롭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말씀과 속사람으로 내 인격을 통제하며 살려고 하게 되죠.그러다 보면 말씀에 맞춘 새로운 습관이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팔아 먹은 이 병자에게도 결말은 열려있다고 보아야겠죠.

길고도 긴 병에서 완치된 흥분도 가라앉고 남들 같은 일상을 되찾았을 때 그는 곰곰 예수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추적해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현장에 슬그머니 나타났을 수도 있죠.

오병이어의 표적을 주시던 벳세다 들판에서 군중들 틈에 앉아 보리떡과 물고기를 얻어 먹다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알게 되었기를 상상해 봅니다.

기적적으로 이번 문제가 해결되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면 죄의 뿌리에서 언제든 더 심한 것이 자랄 수가 있습니다.

가짜 은혜의 집, 베데스다 같은 세상에서 진짜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이 표적을 계기로 예수님은 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십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표적의 목적이 사실 이것입니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심으로 유대인들과 정면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식겁할 말씀을 하시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것은 명백하게 자기와 하나님을 동등하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의도를 알아 들었기에 펄쩍 뛰는 것이죠.

본문 이후에 예수님의 긴 강론이 나옵니다.

말씀을 잘 읽어보면 자신을 성부하나님과 동등하게 부상시키십니다.

성부께서 사람을 살리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살리시고,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분도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유일신 성부하나님만을 믿던 유대인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을 공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발이 어떨지 예상이 되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성자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본 자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유대교는 성부하나님만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열심을 내면서도 실패했을까요?

보지 못한 성부하나님을 믿다보니 인격자이신 분으로가 아니라 현실을 초월해 계신 모호한 신으로 밖에는 믿을 수가 없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알신이나 하나님이나 다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성자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게 성육신하셔서 우리가 감각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자신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체험했다고 요한사도는 1장에서 증언하잖아요?

성자하나님을 통해 주님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령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패스하고는 알지도 못하는 성부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유대교식으로 성부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 동학에서 믿는 천주, 천도교의 한울님 같은 신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예수님을 이해시키기보다 성부하나님을 내세우는 게 전도하기에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교처럼 성부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 문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보지 못한 성부하나님이시니 유대인들처럼 비인격 신의 차원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이기에 그 명령을 따를 책임감도 희석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겸손하라고 하시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 하시고, 오늘 병자에게 더 심한 병이 들지 않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격으로 맞대면 하는 신이십니다.

우리 믿음이 성부하나님 중심에서 성자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져야 인격으로 대면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은 성령하나님을 믿음의 중심으로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님을 본 적이 있나요?

본 적도 없고 계시 된 적도 없는 성령하나님께 자꾸 치중하니 엉뚱한 영을 성령과 분별하지 못하고 무작정 따르는 것입니다.

거의 접신하는 것 같은 수준의 집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이 각자의 인격으로 존재하지만 한 하나님이십니다.

생각도, 하시는 일도, 성품도, 완벽하게 똑같으신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면 성부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고, 성령님을 예배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19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부께 종속되어서 성부의 뜻을 대행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똑같이 보시고, 성부의 생각과 똑같고 성부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똑같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좀 헷갈리잖아요?

성부하나님께 기도하다 예수님을 생각했다 성령은 어디 계신가 생각하고.

이런 혼돈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또 자칫하면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는 게 천지신명에게 막연히 소원을 비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그 예수님과 똑같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삼십팔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처럼 고통스러운 제 병도 좀 관리해 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의 인격에 대면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막연하신 분은 우리가 배우는 예수님께 기도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장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복음서에서 수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한 게 그게 기도잖아요?

예수님께 기도해도 성부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 인생이 은혜의 집이 되려면 거기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요행을 바라고 뭔가 얻어걸리길 기대하지 말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기적이 없다 해도 꾸준히 동행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주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도 영혼은 여전히 베데스다 못에 누워있는 가망 없는 죄인입니다.

고침받은 이 병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구원을 얻었기를 기대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안식일에 행하신 이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종속된 분이 아니라 동등한 분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성자하나님 중심의 믿음으로 자리 잡도록 예수님을 더 배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며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