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8장1절-11절)

남수연 2022. 9. 3. 00:09

https://www.youtube.com/watch?v=NvyaAeEcJx8 

만일 우리가 감추었던 죄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이전의 나로 대해줄까요?

한참 전 일인데 아직도 정치인 부인의 법카 유용 의혹이 뉴스가 나오더군요.

법카로 소고기를 구매했다, 점심값을 계산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제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당사자야 어떻겠습니까?

몇 년 전 정치인들이 성비위 사건으로 포토라인에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죄라는 게 지을 때는 모르지만 공개되면 왜 그렇게 추합니까?

오늘 요한사도는 다른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한 여인의 이런 부끄러운 사건을 전해 줍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 말씀 때문에 이 장면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착시현상을 주지만 사실 치정과 음모와 살해동기가 뒤섞인 범죄 현장입니다.

오늘 이런 상황에 대응하셨던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더 알아보고 우리 믿음에 필요한 교훈도 주시길 오직 성령님께 의지합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은 7장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초막절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초막절이 끝나고 여섯 달 뒤인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우리나라 추석과 날짜가 거의 같고 의미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한 해 마지막 추수를 끝낸 뒤 감사하는 절기로 일주일간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모여 초막을 짓고 지냈기에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또 곡식을 저장했다는 뜻에서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초막절 명절에 작은 도시 예루살렘은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겠죠.

특이 이번 초막절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은 예수님께로 집중되어 있었죠.

앞에 7장을 보면 그 때 예루살렘 공기를 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분위기였습니다.

반면 유대지도부에서는 예수님을 국민의 신앙을 미혹하는 불순한 자로 규정하고 죽이는 쪽으로 결론을 낸 상황입니다.

그 명절의 끝 날에 오늘 본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일주일간의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시던 예수님은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서 지내셨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도시 밖 동쪽에 있는 산입니다.

제가 감람산에 올라가서 보았는데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시가지가 마주 보이더군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약1킬로 정도라 내리막길을 삼십분 정도 걸어가면 예루살렘 성문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몰린 명절에 여관을 구할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주로 감람산에서 기숙하셨습니다.

거기에 겟세마네 동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밖에서 주무시고 그런 걸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사신 삼십 삼년은 참 가난하고 질박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8장 말씀처럼 부요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주님을 믿는 우리를 이렇게 부요하게 해 주신 것이죠.

주님을 믿고 다 부요해 지셨다고 믿습니다.

물론 꼭 부자가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람산에서 밤을 보내신 주님은 아침 일찍이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셨습니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읽으시고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715절에서 예수님이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냐며 유대인들이 의아해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이 성경을 읽고 가르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시 유대사회에서 예수님만큼 의혹과 신드롬을 일으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분명 믿을만한데도, 내 생각으로 자꾸 이리저리 재단하니까 스스로 의혹에 빠지는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렇게 스스로 의혹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침부터 잔뜩 기대하고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해 말씀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왁자지껄 소란한 소리가 들리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한 여자를 끌고 와 주님 앞에 세웁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며 예수님의 판결을 묻습니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간음하는 현장을 잡았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걸 누가 들키게 합니까?

또 분명히 두 사람이 죄를 지었을 텐데 남자는 없잖아요?

도망갔거나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겠죠.

이미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불륜관계의 남자 쪽을 매수해 놓고 현장을 덮친 느낌이 물씬 나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이런 함정을 팠던 일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자신이 시비를 거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의 도발에 예수님은 번번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경이롭고 지혜로운 답변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절대로 예수님이 빠져 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겠죠.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까지 죄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던 주님이시기에 무자비한 투석형을 선고한다면 자가당착에 빠지시게 됩니다.

또 율법에는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임으로 공동체가 죄에 빠지는 걸 방지하게 했지만 지금은 로마 지배를 받기에 그런 사형권이 없습니다.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라신다면 로마법을 어긴 고발조건이 되는 것이죠.

반대로 여인을 용서하라고 했다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구약의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 간음죄를 혹독히 심판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하라는 판결을 내리신다면 율법을 모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리게 되시는 것이죠.

좀 전까지 말씀에 푹 빠져 있던 군중들도 예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봅니다.

 

2.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시는지를 보겠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더니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아무 말 없이 몸을 굽히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고 합니다.

무엇을 쓰셨을까, 궁금하시죠?

그들은 예수님이 시간을 벌려고 딴청을 하신다 생각하고 계속 채근합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세상에 다 알려진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시죠.

7,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리고 또 다시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예수님은 탄복할 말씀 한마디로 이 문제를 처리하십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나님의 지혜로 해법이 안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전세는 급반전되었잖아요?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입장이 되버린 것이죠.

예수님은 이런 문제들이 다 죄 때문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오신 주님께로 이 사건의 흐름을 돌려 놓으시는 것이죠.

주님의 말씀을 듣자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합니다.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젋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사건은 주님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갔잖아요?

처음엔 간음한 여인만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죄하러 끌고 왔던 사람들, 구경꾼까지 죄인의 정죄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를 읽는 우리 모두도 죄인이라고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들 죄인인 줄 알고 돌아갔는데, 아직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죠?

사람이 바르게 산다 해도 동기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오지 않으면 분석해 보면 다 죄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선량한 사람도 자기 신념에 따라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기부를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심판받는다는 게 이상합니까?

그 사람의 나머지 모든 생각과 언행을 우리가 모르잖아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킨 바리새인들이 존경받던 자신의 위치가 위태해지자 돌변해 본색이 드러나잖아요?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과 미움이 회칠한 무덤을 뚫고 봇물처럼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죠.

결국 인간은 여인처럼 쾌락을 추구하며 죄를 짓든, 단지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살든, 그 동기는 다 내 왕국에서 나를 위해살겠다는 죄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나이가 든 사람부터 한 명씩 자리를 떠납니다.

소천하신 이어령씨가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시절에 쓴 수필 중에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래도 양심적이었다는 거예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 다 돌아가지 않았냐는 것이죠.

지금이라면 제일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제일 큰 돌을 집어 던졌을 거라더군요.

사람을 많이 파악한 분이십니다.

그날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할 때 악에 받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다음에 보면 이들은 곧바로 또 예수님께 반격을 준비하거든요?

그들이 차마 죄가 하나도 없다고 뻔뻔하게 나설 수 없었을 뿐이지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아니었던 것이죠.

우리 같은 죄인은 매일 성령님이 찌르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생전 그걸 모르고 사는 게 큰일이지 매일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은 큰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죄를 지으면서 자기도 모르고 성령께서도 회개하도록 양심을 찌르지 않으시는 게 큰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 떠나고 예수님과 죄 지은 여인만 남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읽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누가 속속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인간의 많은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은 인간이 악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약해서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악하기만 하지만 인간은 악하면서도 한없이 나약합니다.

마귀는 회개하지 않지만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회개합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이라 한 것이죠.

오늘 마음에 켕기는 게 있어서 그 자리만 피한 바리새인들은 더 두꺼운 거죽으로 양심을 가리고 다시 주님 앞에 와 대적합니다.

사실 이 여인이야말로 누구보다 제일 먼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들처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잖아요?

예수님 앞에 남았기에 정죄 받았던 죄에서 용서받은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주님 앞을 떠나지 못하게 된 모든 사유들은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4.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날 땅에 무얼 쓰셨냐는 것입니다.

낙서를 하신 건 아니실 거잖아요?

뭘 쓰셨다고 밝히지 않고 있기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사도는 예수님이 두 번이나 땅에 뭔가를 쓰셨다고 전합니다.

땅에 쓰신 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죠.

요한복음의 미스테리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불통이라고 말씀드렸죠.

뒤에도 보면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저가 자결하려는가이렇게 말합니다.

또 요한복음의 독특한 점은 의문과 함께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뜻이 있을 텐데 답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영적인 내용들을 많이 수록했습니다.

앞의 세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설교에 중점을 두었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과의 더 긴밀한 만남으로 인도합니다.

요한사도는 주님의 공생애 사역 내내 주님 곁에 붙어 다녔던 제자입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제자잖아요?

한번도 예수님을 못 본 사람들에게 이 복음서를 전하려 할 때 어떻게든 주님을 더 잘 알도록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오늘처럼 약간의 미스테리, 비밀 코드를 남겨 놓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스쳐 지나지 않고 좀 머물러 생각하게 되잖아요?

성경은 평범한 종교서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땅에 무엇을 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학자들도 다양한 생각들을 내 놓지만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머물고 생각해 보라는 부분이니 우리도 생각을 해 봐야죠.

성경을 해석할 때는 먼저 성경 안의 비슷한 예시들 찾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이 뭔가를 쓰신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쓰신 것은 십계명 돌 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단서인 것이죠.

그리고 성경의 큰 주제, 큰 틀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의 큰 틀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렌즈로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을 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1) 구약에서 하나님이 손으로 쓰신 것은 십계명 돌판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쓰시는 행위는 말로 하신 것과 똑같이 실제적인 효력이 있는 것을 아시죠?

기록된 성경 말씀들이 실제로 이뤄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언가를 쓰셨다면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하는 것이나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나 똑같은 실효성이 있는 것입니다.

2) 또 두 번 쓰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틀에서 볼 때 한번은 공의를 한번은 사랑을 기록한 것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을 때 첫 번째 쓰시고 나서 죄 없는 자들이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죠.

죄없는 자들이 돌로 치라는 말씀은 여인에게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여인의 죄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간음하면 하나님의 법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뿐만 아니라 둘러서서 정죄하는 자들도 모두 다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닥에 쓰신 것은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규정해 주신 모든 율법과 계명들을 바닥에 다 쓰신 것입니다.

물론 그 많은 계명들을 우리처럼 한 글짜 한 글짜 다 쓰신 것은 아니죠.

주님은 율법 전체를 단 한 문장에도 담을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니까 짧은 시간에 그 율법들을 다 복기하신 것이죠.

거기에 섰던 사람들은 모조리 그 율법에 걸려 정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글자 안에는 여인의 간음이 있고,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시기가 있고, 죽이려고 몰려온 사람들의 포악함이 있고, 남의 고통을 흥밋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 속의 온갖 죄악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창세기부터 기록된 그 율법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정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할 때 두 번째 글을 쓰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겠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실 창세기부터의 예언들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글을 쓰신 뒤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10,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이 첫 번째 쓰실 때는 정죄 받았던 여인인데 두 번째 쓰신 뒤에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고발하던 그들, 정죄하던 자가 다 어디갔냐고 하십니다.

고발하던 자들이 없어졌다는 것이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잣대로 남을 정죄하고 고발하던 사람들로서 사실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두 번째 쓰신 주님의 대속의 말씀의 효력 때문인 것입니다.

그 효력이 공의의 심판이 작동되는 가운데서 이 여인이 정죄를 받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속을 받았다고 해서 지금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도 죄의 삯인 사망과 심판은 여전히 시행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의 대속을 의지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여지없이 공의로운 심판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요한사도의 미스테리에서 우리는 다시 복음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계속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어느 구름에 비가 올지 모른다는 속담처럼 언제 은혜를 받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소동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둑질이 습관인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도둑질을 안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본성의 죄가 반복되어 육체의 습관이 되면 그것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걸 모르고 그러셨겠어요?

이제 오순절이 되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이 여인에게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점점 죄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새롭게 된 양심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살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 알만큼 알잖아요?

아는 대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산다는 것은 죄의 본성과 세상 경험이 빚어낸 이전의 인격대로 사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되 마음에 갈등이 없이 자동으로 되는 것은 거의 이전 인격성입니다.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고 성도들도 그렇게 많이 살지만 그렇게 살면 성도들은 공허합니다.

그렇게 살았던 인생을 돌아보며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다 스르르 다시 옛인격으로 돌아갈 때가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사는 게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이제는 다릅니다.

세상과도 찰떡같이 붙지도 않고, 그 맛도 달지 않고 씁쓸합니다.

그 허무함과 씁쓸함에 깜짝 놀라 다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더 이상 죄의 흔적, 죄의 추억을 더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담대히 진보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새로운 생명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매일을 만족과 보람과 행복으로 꽉 채워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에 가서만 행복하겠습니까?

당연히 이 땅에서도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복음과 구원이 좋다고 하면서 옛날하고 똑같이 사는 게 오히려 모순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두 가지 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오는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십자가의 대속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한 합의점을 찾은 것이죠.

더 이상 의혹을 갖지 말고 믿고 구원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달리신 끔찍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동안 죄로 어지러웠던 불행한 삶을 계속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주일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전투력이 상승해서 돌아가는 것예요.

상승된 전투력으로 세상과 내 옛사람의 죄와 잘 싸워서 이번 주도 평안과 복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