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10장1절-15절)

남수연 2022. 9. 17. 00:15

https://www.youtube.com/watch?v=Rw3LzkK7MdE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진실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상대하시느라 진을 빼고 계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뒤에 보면 오늘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 미쳤다고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필연적으로 이루셔야 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해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오히려 범죄자로 고발되어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신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요한복음은 이 두 결말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따르던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진심을 보고 주님을 믿는 쪽에 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내가 선 이 복된 자리를 더욱 견고히 다지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알기 쉽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양의 우릿간, 문지기, 목자가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나는 양의 문이다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1. 첫 번째 단락은 양떼가 모인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와 목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우리 안에 모아 놓은 양떼는 이스라엘입니다.

문지기는 구약시대의 예언자, 선지자, 영도자들을 말하고 그들이 기록한 구약성경 전체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이 문지기들에게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상세합니다.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 다윗의 후손, 영존하시는 분, 목자, 대속제물, 은 삼십에 팔리심 같은 구체적인 예언들이죠.

예수님 당시에 이미 구약성경 완성본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천오백년 동안, 그 격랑의 역사 속에서 이 두꺼운 구약의 말씀이 보전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아니시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차서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양들을 구원할 그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지기가 검증해 문을 열어 줄 목자는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다른 자들이 와서 메시야라 해 봤자 문지기 검색대에서 삐익하고 걸리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예언 된 그 목자인지 아닌지를 철저히 걸러냅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야 예언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해도 60여개가 넘고 암시적인 내용은 수백개가 넘습니다.

그 예언 중에 하나라도 어긋나면 문지기에게서 막힙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예언과 백프로 일치하십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령께서 주님을 보며 계시하셨으니 틀릴 수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구약의 문지기 보안검색대를 통과 한 유일한 목자십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 된 메시야의 표적들을 행하신 것이죠.

맹인을 고쳐주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는 사역들이 바로 예언 된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37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예수님은 한 나라의 역사를 통해 준비하신 구원자시고 그 생애를 통해 완벽하게 검증되신 우리의 목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이 말씀은 ‘나는 구원의 문이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은 어딘가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실 때 그 문도 역시 구원을 얻는 문이었죠.

이런 말씀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성실히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살면 죽어도 뭔가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된 삶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편118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19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양들은 현재에도 목자로부터 좋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구원을 받은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서 꼴을 얻어야 합니다.

꼴은 양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들어가며 나오며가 다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서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계획을 치밀히 세워서 노력해도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얻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형통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그것을 경계시키십니다.

예수님을 거쳐서 오는 것만이 내게 가장 가치있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성공과 예수님의 검열을 통해 주신 성공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예수님께 나의 청사진을 내놓고 기도로 검열을 받으며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것들은 무해하고 모두에게 유익을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의 꼴을 먹으며 건강한 양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양 목축은 넓은 목초지에서 방목하는 것도 아니고 돼지처럼 우리에 가둬두고 사육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자와 함께 항상 풀이 있는 곳, 물이 있는 곳을 따라 다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과 같은 것이죠.

긴 믿음의 여정에는 울퉁불퉁한 자갈길도, 가시밭길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납니다.

초장에서 먹이실 때 잘 먹어야 거친 길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분주히 드나들며 영과 육의 좋은 양식들을 받아 먹고 건강한 양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양의 문이 아니라 담을 넘어 온 강도들에 대해서 경계하십니다.

1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보안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담을 넘어서 양무리에 접근한 강도를 말합니다.

구원자가 아니라 약탈자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사람의 영혼과 삶을 철저히 노략질하는 자들입니다.

이번에 PD수첩에 한 이단 종교단체에 대한 방송을 한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브라질 집단 농장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아이들 5명이 흙더미에 깔려 죽는 안타까운 사고가 보도되었습니다.

이번에 그 집단농장에서 생활하는 어린 아이들이 교주를 낭군님, 여보야로 부르는 영상이 PD수첩에 공개되었는데, 정말 충격적이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인격과 인생을 통째로 착취하는 이런 끔찍한 종교 사냥꾼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악질들이 종교 분야에도 있는 것이죠.

서신서에도 이런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약탈했던 일들이 나타납니다.

드러난 이단이 아니라 해도 이상한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종교 가스라이팅이 어떤 규모인지 실태 파악이 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도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하게 하고 목사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삼년 반 동안 제자들을 가스라이팅 하셨다면 막판에 제자들이 다 도망치지는 못했겠죠.

그러시려면 처음부터 선악과를 먹을 수 있는 자유도 안 주셨을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잘 안 생기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게 빠져들고 못 빠져 나오는 게 절도고 강도입니다.

예수님은 세뇌하지 않고 진실한 관계를 맺으시기에 시간이 걸립니다.

신자들은 내가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정신차리고 확인하며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사람을 따랐다간 그 결과가 참혹해 지는 것입니다.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런 도둑이 비단 신앙 지도자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가 절도이고 강도라고 하셨잖아요?

먼저 알던 지식과 경험과 생활방식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는 절도고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까?

저것만 붙잡으면 밥벌이는 확실할 것 같아 따라가는 그것이 점점 내 영혼을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저 목표만 이루면, 저 사람만 얻으면, 저만큼 인정만 받으면, 그러면 내가 더 잘 될 것 같은 그런 것들이 목자에게서 돌아서게 한다면 그것이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따라가는 그 길, 그 도둑들을 주의하고 양의 문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모든 좋은 것들을 받으며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양의 문’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면 ‘선한 목자’는 양과의 관계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은 목자가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었으니 이젠 내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능력만 좀 주시면 좋을 텐데 왜 매일 의지하고 구해야 하는지 불만일 수 있습니다.

양이 구원받았다고 사자새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양처럼 약하고 우리 안에는 악한 본성이라는 간헐적 늑대가 날뜁니다.

그래서 누군가 목자의 뒤를 따르지 않고 성급히 앞장서서 가는 모습이 보일 때 걱정이 됩니다.

저 앞에는 곰도 있고 사자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미리 깨닫고 안전하게 목자를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 목자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해도 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실제로 있을까요?

지난 달 큰 피해를 냈던 수도권 집중호우 때 동작구 상도동에서 50대 여성이 키우던 고양이를 구하려고 침수된 집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고작 고양이를 구하려다 죽냐는 댓글을 단 몰지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려동물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사건들이 가끔 뉴스에 나오죠.

처음부터 반려동물을 살리고 내가 대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위험에 빠진 가족 같은 반려동물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고 하셨을 때 목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입니다.

고작 양 한마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허풍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1) 이것은 근본적으로 양을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는 진상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만일 양에게 위기가 오면 목숨을 바쳐서 싸우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내 양을 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이 확정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다는 것은 사람이 반려동물을 구하려다 죽은 정도와 비교가 안되는 차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한갓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주시려 마음을 정하셨을까요?

이유가 없는 과한 선물은 감사보다 경계심과 의혹이 앞서는 것이죠.

그 이유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14절,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씀을 신중하게 읽으면 놀라운 사실에 말문이 막힙니다.

성부와 성자하나님이 서로를 아시는 그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고 완전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을 아버지와의 관계처럼 그렇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래서’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티끌 같고, 뼈속까지 죄로 물들었고, 건져 낼 가치가 없는 죄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 말씀에서 대반전이 숨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목숨을 버리실만한 소중한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다는 놀라운 말씀이 에베소서에 있죠.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는 우리가 창조됐고 존재합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직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주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미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내가 타락해서 영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영화배우 주윤발이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재산이 8천억이지만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재래시장에서 싼 옷을 사 입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산의 99%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윤발씨는 배우들의 흔한 스캔들도 없이 평생 한 아내와 사는 데 그 사이에 아이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첫아이를 임신해서 출산하기 한달 전에 갑자기 잘못되어 사산한 경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루 아침에 죽어버린 아기를 수술로 꺼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내가 딱 한번 안아 보는 데, 그 마음이 미칠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8천억을 다 들여서도 살릴 수만 있다면 살렸을 것 같습니다.

있다가 없어진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오래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더군요.

다시 또 그런 일을 당할까봐 결국 아이를 안 갖는 쪽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를 놓치신 마음을 그렇게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레미야서를 보면 주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따라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 창자가 끓는 것 같다는 격정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르시더라도 다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죠.

우리를 아시는 그 사랑과 친밀함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큼이라고 예수님이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런 관계이기에 영벌에 빠진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 더 앞뒤가 맞는 것이죠.

로마서에서도 말씀하시잖아요?

5장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3) 여기서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이라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다른 종교나 무신론이나 이단에 빠지지 않은 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말을 들으면 왠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 다른 어떤 곳에도 빠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된 것이야말로 신묘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이고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인 것이죠.

오늘 이 선한목자 선언은 지난 주 보았던 맹인을 보게 하신 표적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맹인이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이 어떤지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 앞에 보면 맹인이 눈을 뜬 뒤 바리새인들에게 불려 가서 취조를 당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게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때 눈을 뜬 맹인이 당당하게 바리새인들과 맞서서 주님을 옹호하는 걸 보면 정말 통쾌합니다.

결국 예수님 편에 섰다는 이유로 맹인은 눈을 뜨자마자 유대교사회에서 출교 당합니다.

5장에서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병자가 걱정했던 그 일이 일어난 것이죠.

이때 예수님이 맹인을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야를 상징하는 호칭입니다.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환상 중에 하나님 앞에 나와 심판할 권세를 받는 분을 보고 ‘인자 같으신 이’라고 지칭한데서 나온 말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맹인이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주여, 인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믿겠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이시라면 뭐든 다 믿겠다는 이 말투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엎드려 주님께 절한 내용이 앞9장의 끝에 나옵니다.

우리도 복음을 듣고 성경을 배우며 이것이 목자의 음성이라는 것을 믿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성도의 믿음의 강인함은 놀랍습니다.

성도들의 특징은 부드럽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자이자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양만을 따릅니다.

박해가 오면 광야와 산중에서 유리하면서도 예수님만을 믿습니다.

우리 믿음이 의외로 강하다는 것은 믿음을 위협하는 위기에 처해보면 압니다.

내게 이런 믿음이 있었나 나 자신도 놀랄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계시록14장4절,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이 말씀대로 어디든 믿고 따라갈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과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거듭 가리켜 오셨던 검증되신 그 구원자십니다.

요한복음을 따라가는 동안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이 사라지리라 믿습니다.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는 매일 주님 앞을 드나들며 좋은 꼴을 얻어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먹는 것들은 거의 독초이고 자아만 비대해지게 합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영혼을 살리실 양식을 차려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창세전부터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사람들이었는지, 다시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이해하셨나요?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사랑받는 자녀의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