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베다니마을의 잔치 (요한복음12장1절-11절)

남수연 2022. 10. 1. 03:16

https://www.youtube.com/watch?v=ctekUG5x3R0 

 

지난 주에 골가뭄에 시달리던 손흥민선수가 13분만에 세 골을 터뜨렸죠.

손선수 팬은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고 체증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사람들의 뜨거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얼마나 마음이 궁급할 지 우리가 다 알잖아요?

정말 조바심 났던 오랜 골 가뭄이었습니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예수님 가뭄이 점점 심화되는 걸 느낍니다.

예수교에서 예수님 가뭄이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번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통해서 예수님 가뭄이 싹 걷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주님의 십자가 엿새 전에 베다니 마을에서 열렸던 앞 뒤가 좀 안 맞는 잔치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데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유월절에 십자가 지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상황임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하죠.

이 떠들썩한 잔치에서 요한사도는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클로즈 업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살펴보며 주님에 대해서 알게 되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고,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이 날 나사로의 마을 베다니에서 열린 잔치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주 나사로를 살리신 뒤로 두어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다른 곳에 머무시다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려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에서 가까운 베다니 마을에 들르십니다.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잔치가 나사로의 집에서 열린 것 같지만 마태와 마가복음을 보면 장소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잔치가 나사로 가족만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아마도 시몬은 나병에 걸렸다 완치가 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 데 그 중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이 마을 이름인 베다니는 고통의 집이란 뜻입니다.

전에 베데스다가 은혜의 집인 것과 대조되죠.

마을 이름을 고통의 집이라고 지었다면 거기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살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성 지척에 있는 이 마을은 어찌 보면 화려한 강남을 마주하고 산밑에 자리 잡은 구룡마을 같은 곳일 것입니다.

구룡마을 사람들은 아침이면 강남의 상징인 타워팰리스를 바라보며 강남에 있는 식당이나 청소 할 일터로 향합니다.

베다니 마을에도 성 안으로 허드렛일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때는 성 안에서 버젓이 살았지만 가세가 몰락해서 밀려난 사람들도 있었겠죠.

나병에 걸린 시몬처럼 성전 제사장에게 완치 판정을 기다리다 눌러 앉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 안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을 알기에 성 밖 자신들의 삶이 더 씁쓸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이 가난한 베다니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 머물며 주민들을 만나고 병을 고쳐주시고 복음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가장 큰 표적도 바로 이 베다니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동네잔치나 다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것을 내놓아 잔치를 벌였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이들을 사랑해주셨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죠.

요한복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예수님을 우리가 보아왔습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병자와 죄인들을 진심으로 받아주시고, 누구에게도 군림하지 않으시는 그 모습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주님의 인상착의 속에 새겨 놓으시길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장면도 담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열광하며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빌려 타고 나타나십니다.

다락같이 높은 말을 탄 통치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쩌면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끌리며 나귀새끼를 타신 모습이 제자들에겐 창피했을지도 모르죠.

예수님께만 사람들에게 있는 외식, 인기몰이, 허황됨, 이런 게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어떻든 아무 동요 없이 성경에 정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성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러 평온히 입성하십니다.

그것이 스가랴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야의 겸손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았다고 하죠.

15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우리가 학식이나 스팩이나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그리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으로 우리를 평가해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느 새 세속적인 가치관에 젖어서 더 높고 가치 있는 주님의 뜻을 밀쳐내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밀한 인격을 상대하시고 겉보다 속을 복되게 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이름은 은혜의 집이었지만 예수님이 안 계셔서 은혜가 없던 곳이 베데스다였죠.

이름은 고통의 집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오늘 이 베다니의 마을잔치에서 요한복음의 역설을 또 발견하게 되죠.

죽음을 앞 둔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다가온 십자가의 죽음으로 천국의 영원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 담긴 예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잔치에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매일 잔치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매일 일하러 가는 베다니 사람 같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다니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곳이고, 부활의 장소이고 잔치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고단한 베다니 인생에 예수님을 모시면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크고 작은 잔치의 기쁨이 진짜로 끊어지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TS부산공연의 무료티켓이 인터넷상에서 고액에 거래되고 있다고 합니다.

티켓을 무려 사백만원에 팔려고 시도했다 고발당한 사람도 있다죠.

팬이라면 그날 그 공연장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영광일 것입니다.

이미 초대권을 가진 팬들이 지금 얼마나 설레며 10월15일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서 잔치하는 날들을 소망하고 떠올릴 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베다니같은 현실과 팍팍한 일상도 넉넉히 살아내지 않겠습니까?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화려함에 놀랐다고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시던 감람산 내리막길에서 예루살렘성의 종말을 내다보며 우셨다고 기록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거기 예수님이 안 계시면 멸망할 성읍 장망성일 뿐입니다.

아무리 내 처지가 베다니 같아도 거기 예수님이 계시면 잔치집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일에 예수님이 계시도록 늘 기도하길 축복드립니다.

 

2. 요한사도는 이 날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 마리아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던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때도 언니 마리아는 열심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알고 계시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을 듣느라 꼼짝도 않자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던 그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잔치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요한사도가 분주히 돌아다니는 마리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이 모습을 기록했을까요?

‘사람 성격이 참 안 변하는구나’

마르다와 같은 성도들이 교회에 계신 것이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더 좋은 쪽을 택했다고 하셨지만 마르다의 봉사를 인정하지 않으신게 아닙니다.

봉사하다 힘들어서 화가 나지 않을 정도만 하라신 것이죠.

봉사하다 지치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화가 납니다.

집에서도 주부들이 당연히 가사일을 한다지만 힘들 때 누구하나 거들지 않으면 화가 나죠.

마리아가 아무리 좋은 쪽을 택했다고 해도 마르다에게는 내게 맞는 일이 좋은 쪽인 것입니다.

사람의 기질과 성격을 다양하게 창조하신 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다양함이 모여서 모자란 곳을 서로 채워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 연약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내가 이 땅의 주님의 교회에 어떤 약한 부분을 메꾸는 보강제가 될 것인지 모두가 각자의 은사에 따라 기쁨으로 섬기는 우리교회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2)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요한사도가 굳이 이 장면을 기록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란 열두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열두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있는 모습은 나사로의 변화된 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은 나사로가 어떻게 그 사건 이전의 나사로와 똑같겠습니까?

예수님을 더 따르는 제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더 나가서 나사로와 같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성도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장면입니다.

9절부터 보면 죽었다 살아난 이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순례객을 보며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나사로라는 존재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활생명을 가진 우리들도 다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하러 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로 예수님을 증거하겠습니까?

나사로 가족의 이야기는 이후에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후 나사로의 흔적은 터키 아래 있는 섬나라 사이프러스공화국에서 발견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구브로라고 하는 곳입니다.

바나바가 구브로 출신이었고, 바나바와 바울이 1차전도여행에서 들렸던 곳이 구브로입니다.

그곳에 가면 나사로 무덤이 있는 나사로교회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살해를 피해 멀리 구브로까지 피신한 나사로가 거기로 선교여행을 온 바울과 바나바를 만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나사로에게 안수해 구브로의 감독으로 세웠고 거기서 죽기까지 나사로가 주님의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신앙은 살아있는 목숨으로 죽기까지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잔치에서 가장 눈 길을 끌었던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스라엘은 귀한 손님을 초대하면 향유나 기름을 발라서 환영하고 존대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의 가격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죠.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 보면 농장주인이 농장서 하루 일한 일군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고 하십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인 것이죠.

마리아가 가져온 나드향유의 가격이 삼백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들의 일년 연봉입니다.

삼천만원 이상이 되는 것이죠.

나드향유는 결혼식에서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엄청난 고급 향수입니다.

그 향수 한 근을 예수님께 다 부어드린 것입니다.

중형차 한 대 값을 순식간에 부어버렸다면 실감이 더 나실까요?

그러니 잔치 석상이 술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장 격분한 사람은 가룟유다라고 하죠.

가난한 사람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사람들이 화내는 이유는 다 자기이익과 상관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한 가룟유다가 주님을 따른 목적은 예수님 정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지위를 얻으려는 것이었겠죠.

요한사도는 가룟유다가 돈궤를 맡고 그 돈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전직 회계사인 마태가 있음에도 유다가 재정을 맡은 것은 아마도 본인이 나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태와 마가복음을 보면 거기 있던 제자들도 다 마리아에게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26장8절에서는 이랬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다고 제자들이 이걸 보고 허비했다, 낭비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자들이 이렇게 말할 때 상당히 기분이 언잖았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 이 말 속에는 그걸 말리지 않고 용인하신 예수님께 대한 비난도 섞여 있는거잖아요?

제자들의 도를 넘은 분노에 마리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그리고 마태복음을 보면 마리아의 향유사건을 복음과 함께 온 천하에 전해서 마리아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마리아는 왜 향수 삼천만원 어치를 한번에 쏟아 붓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까요?

-베다니라는 마을이 그렇듯이 마리아도 부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결혼을 위해 평생 모은 돈으로 향유를 샀을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의 이 모습이 바로 주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참성도들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는 십자가의 대속을 지금 마리아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늘 말씀에 집중했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성령께서 그런 마리아에게 십자가를 깨닫는 마음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대속과 구원을 몰랐다면 오늘 이 선물과 행동은 납득이 안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읽고 들어야 대속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불통의 한 장면이 또 있죠.

예수님은 공공연히 주님의 장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당하실 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전혀 실감도 공감도 못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지금 어떠신지 27절에서 말씀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얼마나 주님의 큰 고통과 번민이 느껴집니까?

우리처럼 완전한 인간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어떻게 초연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난 주 제가 사랑니를 발치했는데 마취하고 사랑니 하나 빼는 데도 손에 땀을 쥐잖아요?

저는 몸이 좀 불편하고 아플 때 특히 십자가를 묵상할 기회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취도 없이 생살이 찢기고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쿵 내려앉고 살짝 몸서리가 쳐집니다.

가늠하기도 힘든 그 고통을 죄없는 주님이 나를 위해 감당하셨다는 걸 생각하며 다시 주님께 대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공감하고 슬퍼한 사람은 유일하게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런 마음을 아셨고 향유가 장례준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일까요?

아니면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이실까요?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께 감사의 선물로 이 향유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주님께서 오래 사용하시도록 드렸겠지 한번에 다 쏟아 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향수를 누가 그렇게 사용합니까?

전부를 붓는 건 장례 때 쓰는 방식이잖아요?

더는 주님께서 이 향유를 사용하지 못하실 것을 알았던 것이죠.

마리아의 이 헌신을 복음과 함께 전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복음과 마리아의 헌신이 한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성도의 헌신이 이렇게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셨듯이 참성도 역시 주님께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까워서 주님께 더 헌신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다 주님의 것이지만 먹고 사는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더 못하는 것 뿐입니다.

-또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낸 것은 예수님의 존귀하신 실체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가의 향유일지라도 예수님 발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는 데 쓰였다는 것만도 영광이라는 것이죠.

어떤 값비싼 것도 주님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마리아 자신도 바닥에 엎드려 여자의 자존감의 상징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잖아요?

세례요한이 나는 예수님의 신발끈 묶는 일도 감당 못한다고 했던 바로 그 마음인 것이죠.

제자들도 오늘은 향유를 허비했다고 마리아를 야단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을 받은 뒤 그들의 인생 전부를 주님께 부어드립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주님께 인생을 부은 것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해도 아깝지 않은 분을 안다는 것, 우리 모두가 그런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의 고통의 베다니에도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주셔서 영원한 천국 잔치로 데려가 주신 것이죠.

또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베다니에서도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 받는 교회의 일원 중에도 가룟유다 같이 가는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어쩌면 마리아와 같이 거듭난 새사람과 가룟유다와 같이 내 길로 가려는 옛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죠.

그런 나의 옛사람을 억제하고 마리아와 같은 새사람이 강해져야 믿음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며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시길 바라며 주님께 집중하면서 살면 정말 얼마나 평안하고 형통한 길로 안내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길 가장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매일 속사람이 강해지길 기도해서 주님의 인도를 잘 따르고 또 날마다 예수님께 헌신하는 기쁨으로 살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