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3장1절-17절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남수연 2022. 10. 7. 01:06

https://www.youtube.com/watch?v=ZiG73V8IiYw 

지난 주 베다니의 마을잔치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메시야가 나라를 구원한다는 호산나 시편 찬송을 부르며 열렬히 주님을 환영을 했었죠.

이 유월절 명절 기간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께 모아졌습니다.

오늘은 그 주간의 목요일 유월절 식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많이 본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의 그 식사입니다.

이 만찬이 끝나고 겟세마네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데리고 온 대제사장의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십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전체적인 과정도 잘 이해되셨길 바랍니다.

예수님 없는 예수교,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이 만연한 중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잘 믿는 알곡 신자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내용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셨는지를 전해줍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지금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깨닫게 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표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발씻겨 주시는 사랑을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이 날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은 성찬식과 세족식을 행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성찬식을 전해줍니다.

요한복음은 성찬식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식을 전해줍니다.

사복음서들이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기에 서로 상호보완해서 기록한 것이죠.

오늘 요한사도가 상세하게 남긴 세족식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걸보면 요한사도가 작정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것이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데서 남겨질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또 이제 제자들을 곁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셔야 하는 주님의 안타까우심도 느껴집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영으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을 대면하여 모든 감각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못 보고 믿는 것이 답답해 주님을 좀 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가끔하죠.

바울사도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답을 해 줍니다.

고전13장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가 고대하는 그날에는 예수님을 온전히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볼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은 발을 씻겨주시고, 성찬식을 행하시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도록 끝까지 애쓰셨던 것입니다.

사실 위로 받고 제자들의 격려를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마음도 지금 십자가에 달리실 생각에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나는 마셔야 할 잔이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보다 주님의 십자가로 제자들이 받을 충격을 더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이신 성도님들은 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내가 고난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 약해지는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죠.

그런 나를 보고 자식들이 낙담할까 봐 그 정신력으로 모든 부모들이 애환으로 가득 찬 인생을 건너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나이가 들고 점점 힘이 빠지면 자식들 앞에서 언제까지 강한 모습을 보여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드실 것입니다.

결국은 자식들에게 의존하고 자식들의 도움을 받게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으로는 나이가 들어도 더 견고해져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는 든든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의지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강한 영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씀했죠.

고후4장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어 자식들에게 든든한 신앙의 부모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내 보이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9장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훅 들어오지 않습니까?

이제 스스로 십자가를 지러 가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더 이상 무슨 사랑의 증거를 우리가 요구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수양하고 치성드리는 이 세상의 종교가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오늘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옛날 우리 어릴 때는 골목이 다 비포장 흙길이었습니다.

온 동네를 뛰놀다 들어오면 발가락 사이에 까만 때가 낍니다.

방에 들어가려면 수돗가에서 발 먼저 씻어야 했죠.

예수님 당시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집에 가면 누구나 더러워진 손발을 씻었습니다.

만일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다면 그 집의 종들이 손님들의 발을 물로 씻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더러운 발로 식탁에 앉은 것은 그때 상황이 얼마나 위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기로 결의가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유월절 만찬을 나눌 장소도 상당히 비밀리에 마련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일행을 환대하고 발을 씻어 주는 대접도 대놓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제자들이 더러운 발로 다락방에 마련된 식탁에 둘러 앉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위해 발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발을 닦아 주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기꺼이 낮아지셔서 섬긴다는 게 정말 충격 아닙니까?

사람은 가족에게도,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그렇게 섬기지 못합니다.

가족끼리도 자존심 상하잖아요?

어쩌다 한번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 행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상대를 나보다 더 존중하고 섬길 수 있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존심이 그렇게 남보다 낮아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죠.

우리는 조금만 낮은 위치에서 남을 섬겨도 비굴해진다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누가 저 허드렛일을 할 것인지 예민하게 신경을 쓰죠.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것은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낮아지셔서 섬겨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라고 했다면 속으로 부글댔겠지만 주님의 마음은 아마도 어린 자식을 씻겨주시는 그런 마음이셨겠죠.

그렇기에 창조주의 사랑엔 자존심 같은 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7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발을 씻어줄 수 있는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목숨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보고 남을 볼 때 다 잘난 것이 별로 없는 죄인들이잖아요?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오셔서 죽으셨다는 게 너무 낭비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지난 주 마리아가 삼천만원짜리 향수를 예수님 발에 부었다고 제자들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비싼 것을 허비했냐고 난리였죠.

그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어떤 낭비를 하셨는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지금 그런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경험이 된다면 아마 지금처럼 내 생각만 하면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주 조금 알게만 되도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렇게 다르잖아요?

무엇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2. 이 날 만찬에서 요한사도는 특히 두 사람을 주목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1) 이날 만찬에는 역사가 기억하는 가룟유다의 배신이 있었죠.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제자들이 받을 충격과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함께 삼년 반을 주님의 사역에 동고동락했던 한 제자의 배신은 제자공동체을 충분히 와해할 수 있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이 그때 제자들에게 충격적이듯 지금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큰 의구심을 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다시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삼년 반을 함께 했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냐 아니냐입니다.

오늘 이 식탁에서 일어난 가룟유다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의 걸음은 예수님이 거기 가실 것을 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있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게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가룟유다에게서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마귀가 유다의 생각에 드나든다는 것입니다.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렇기에 우리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내 본성과 마귀의 제안이 뒤섞입니다.

이 둘은 어두움의 일이고, 죄에 해당 되고, 같은 편입니다.

반면 우리 안에는 거듭나 새롭게 된 양심과 성령께서 감화하시는 선한 생각들도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어느 정도 빈번히 개입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음엔 이 네 가지 생각들이 서로 이기려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 마약투약 혐의로 붙잡힌 한 연예인이 상담 프로에 나와서 자기 안에 서로 다른 네 명이 살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네 가지 생각이 섞여 있지만 그렇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다 내 생각으로 인지됩니다.

그 중 언제나 최강자는 내 본성이죠.

그리고 마귀는 내 본성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기에 그 부분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다 각자의 약점과 단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내 마음에서 두드러질 때 즉시 다루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는 데 항상 걸리는 우리의 약점은 미래에 대한 염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죠.

마귀는 유다에게 불안과 염려를 제안한 것입니다.

‘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어떻게 할라고 그래?’

그 마귀의 제안에 유다는 나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겠다고 결정합니다.

대제사장편에 서면 적어도 출교는 면할 것이잖아요?

유다가 돈 문제에 약했지만 백프로 돈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밀고한 댓가 은삼십은 밭 하나 살 정도로 그리 큰 돈이 아닙니다.

유다가 나중에 후회하며 이 돈을 가져다 성소에 던졌을 때 대제사장이 그걸로 밭을 하나를 사서 나그네의 무덤으로 삼잖아요?

유다는 예수님은 끝났으니 나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유다의 생각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룟유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막상 예수님이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걸 볼 때 유다는 정신이 듭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 다음 유다를 배신에 대한 자기혐오로 몰고가 스스로 목을 메게 만듭니다.

안타까운 것이 그것입니다.

그날 유다만 배신한 게 아니잖아요?

제자들도 다 주님을 두고 도망갔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배신합니까?

그런데 제자들과 가룟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지만 가룟유다는 다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룟유다의 운명을 내다 보시고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배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한 죄가 최악이라고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정해진 대속의 길을 가시는 것이고 유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믿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 것을 안타까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십자가에도 부활에도 다시 오실 재림에도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길 축원드립니다.

 

2)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발을 씻겨주시는 중에 베드로가 싫다고 거부하는 실랑이가 일어납니다.

8절,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식사 중에 조용히 일어나 대야에 물을 담아 들고 오시는 예수님께 모두가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은 윗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묶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닦아 주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 발을 맡긴 제자들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도 세족식 해 봐서 알지만 가족들이나 형제들에게 발을 맡기면 그냥 눈물이 후두둑 쏟아지잖아요?

갈릴리의 투박한 어부들 눈에도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에게나 받을 대접을 예수님께 받을 때 마음은 복잡미묘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차례가 되자 그 불편한 심기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제자 된 도리라면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하잖아요?

반대로 주님의 섬김을 받으니 수석제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죠.

또 남에게 호의를 받으면 왠지 고마움보다 불편함을 더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사코 발을 내놓지를 않았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못 씻는다는 말은 원어대로 보면 ‘주님, 내 발을 영원히 씻지 못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이 난동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의미를 영적으로 해석해 주시게 됩니다.

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발씻어 주심이 단순히 사랑의 섬김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섬김을 안 받았다고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말은 ‘상속받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씻어주지 않으시면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씻어주신 것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스가랴선지자가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했죠.

스가랴13장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예수님이 지금 이 예언의 말씀대로 죄를 씻으실 것을 발씻음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받을 유산이 없다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에 베드로가 대뜸 이렇게 말하죠.

9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엉뚱하긴 하지만 예수님과 더 가깝게 더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것을 희망하는 베드로의 소박함이 묻어납니다.

현대의 신자들은 하나님과도 스스로 거리두기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게 복인데 그걸 모르는 게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말에 우리 죄를 씻으시는 영적인 원리를 한가지 더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의 몰이해로 인해 주님의 말씀은 점점 심화되는 것이죠.

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제자들은 이미 목욕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목욕시키셨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에 이미 모든 죄가 씻겨졌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죄가 씻겨집니다.

그렇게 목욕한 자들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 구원이 무효화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죠.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살면서 짓는 모든 죄도 씻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하는 측면보다는 예수님이 씻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죄를 뉘우쳐 회개하고 그 죄로부터 멀리한다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히 넘어가는 더 많은 죄들도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매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또 자녀 된 우리를 씻어서 깨끗한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살게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이십니다.

우리는 제대로 못 살 때, 하나님께서 자꾸 책망하고 화를 내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삼년 반 동행은 매일이 갈등이었을테고 제자들 중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더러워진 것을 매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껏 죄를 짓고 예수님께 매일 발을 내밀면 되는거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나를 괴롭히는지 아는데 어떻게 마음껏 죄를 짓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싸워 스스로 이기도록 성령님을 통해서 도우시는 것이고 이기지 못한 죄는 예수님의 중보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씻기심을 통해 매일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활짝 열어 주셨으니 매일 그리로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발씻어 주시는 사랑이 마음에 와 닿으셨습니까?

주님의 발씻음은 영원한 속죄와 지금도 사랑으로 섬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도 이와같이 행하라고 하십니다.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의 그 사랑을 갖고 누군가를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씻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그 사람들이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님께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죠.

15절에서 본을 보였다는 것은 그대로 따라 할 교본이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처음 배울 때 글자 모양을 점선으로 흐리게 쓴 펜습자 같은 교본이 있죠.

점선으로 보여진 모양 그대로 그리면 교본과 똑같은 글씨가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따라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강력하게 반드시 주님의 사랑의 본을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내 제자인 걸 인정하시겠다고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제일 죄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울산의 한 버스기사가 운행 도중에 길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차를 세우고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해 목숨을 구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버스 기사보다 먼저 한 여고생이 쓰러진 남자의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첨부된 동영상을 보니 진짜 한 앳된 여고생이 온몸에 힘을 실어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여고생 나이에 부끄러움도 많을 텐데 아저씨가 죽어가는 그 모습을 피해가지 못하고 바닥에 앉아 살려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죠.

자기만 살고 보자는 세상에 던진 무엇보다도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야말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본을 따라 사랑의 섬김을 통해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