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4장1절-14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남수연 2022. 10. 15. 01:02

https://www.youtube.com/watch?v=G6NjjsViH9E 

오늘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 식탁 앞에서 나눈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에도 예수님은 중대한 믿음의 이치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시잖아요?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살펴 보았죠.

니고데모도, 우물가의 여인도, 마르다도, 유대인들과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때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걸 요한사도가 계속 회상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원에 대한 이런 내용들을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들을 깨닫게 하실 것이기에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내용을 가르치십니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믿음을 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소통의 난맥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떠나신다는 예수님께 답답한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기독교 앞에 모든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질문에 답하신 내용들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진수인 것이죠.

오늘 다시 한번 이 답을 생각해 보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근심으로 꽉 찬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니만큼 우리 안의 근심도 물리치는 답이 될 것입니다.

 

1.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을 이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까지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이제야 주님의 십자가에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사형수가 되실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주님을 따랐던 자기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듯이 모든 것을 버렸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었던 제자들입니다.

생업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배도 버렸잖아요?

제자들은 겉잡을 수 없는 근심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을 만나기도 하죠.

오늘도 우리 마음에 크고 작은 근심이 있습니다.

이런 근심들을 어떻게 벗어날지 예수님이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1) 먼저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금 가장 큰 근심에 사로잡히셨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대로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지금 영화롭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의 근심을 맡으시고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본성상 다 한 근심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성격상 근심을 해도 꼼꼼히 잘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근심하는 문제의 결과를 다양하게 생각하되 가장 안 좋은 경우까지 생각합니다.

단 각 경우마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제일 좋을 것이고 그렇게 해 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 가장 나쁜 결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어떻게든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죠.

지난 날에 우리가 염려했던 일에 가장 나쁜 결과를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지금처럼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근심거리를 잊어 버리라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걱정거리에 하나님을 가장 중심으로 고려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과가 내 원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는 일은 이변 없이 그대로 일어났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성령을 받아야 하는 제자들에겐 필연적으로 마주쳐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근심하는 일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타당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대로 될 수도 없을 텐데 항상 그렇게 바라면 사람은 더 불안하고 소심해 집니다.

조금만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바들바들 떠는 약체가 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왜 근심만 하고 기도하지 않냐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위기와 어려움에서 우리의 믿음은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이든 하나님은 최고의 코치를 해 주시고 최선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2) 또 근심을 이기려면 지금 세상이 내 인생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앞으로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믿는 것이 세상의 근심을 이길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는 제자들의 코 앞의 근심에 대해 마지막 날로 답하십니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고, 낫지 않는 중병에 시달리고, 큰 근심거리가 있은데 천국을 믿는 것이 답이 되겠습니까?

그게 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땅의 행복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면 안되는 것이죠.

제자들이 하늘이 무너질 듯 근심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며 목적이 이 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의 실체를 파악하신 것이죠.

미래가 불확실해서 두려운 게 아니라 내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아파트가 없어서 근심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집을 생각하지 않기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부였지만 땅도 안 사고 집도 안 짓고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아브라함의 집에서 훈련시킨 무사가 삼백 십팔명이라고 창세기14장에 나오죠.

그 정도였다면 성을 하나 짓고도 남을 재력가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11장9절, 믿음으로 그가..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6그들이..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성도들은 내게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일부러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삶이 우리에게 단지 괴롭고 악한 것이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그런 근심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 집’ 하면 유대인들은 성전을 떠올립니다.

제자들이 본 적 없는 천국을 막연히 생각할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성전의 이미지로 말씀하시는 것이죠.

제자들은 46년에 걸쳐 지은 눈부신 금빛 성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성전엔 아름다운 많은 방들이 딸려 있습니다.

그 방들은 대제사장과 권위 있는 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최고의 권력과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바로 그 명예를 누릴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물거품이 아니라 천국 아버지 집엔 더 영화로운 거처가 있다고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 있을수록 큰 근심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 소원을 성취하는 것과 영원한 천국을 위해 사는 것은 안타깝게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십자가를 지심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상실한 우리를 다시 상속자의 지위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확고한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삶의 근심거리는 요구하는 댓가를 다 지불해야 물러갑니다.

근심이 도전해 올 때 이 궁극적인 소망으로 응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좀 안되도 괜찮아, 좀 덜 좋으면 어때, 앞으로 누릴 것을 지금과 어떻게 비교하겠어?’

그래야 근심에 짓눌려 필요 이상의 에너지와 고통을 댓가로 지불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보고 온 바울사도는 슬쩍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8장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라기는 일시적인 이 땅의 행복보다 영원한 복락에 더 관심을 갖고, 열렬히 기대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또 예수님이 거처를 마련하시면 우리를 영접하러 온다고 하십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중하러 오겠다고 하십니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죽어서 천국을 더듬어 찾아가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외국 공항에 내렸을 때 친한 사람이 마중을 나오면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천국길에 직접 우리를 맞으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걸 사실로 뒷받침해 주는 장면이 있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집사가 순교할 때 자기를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외치잖아요?

사도행전 7장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 성도 스데반을 영접하시잖아요?

우리 각자의 인생의 종말에 예수님은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역사를 종결지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땅의 성도들을 맞으러 재림하신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심판에 앞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던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천국에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지 않겠어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빨리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시겠죠.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천국을 소망하라, 주님이 영접해 주신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 짧은 이 땅의 인생을 너무 근심하며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2.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이 말씀만으로 근심이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구원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다투어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 덕택에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구원의 진리들을 더 가르쳐 주시게 된 것이죠.

이 대답을 이해하고 믿는 만큼 인생의 근심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1) 도마가 첫 번째 질문을 합니다.

5절,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 성격상 좀 퉁명스럽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삼년 반을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고 동거했던 제자들이 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만 그렇겠습니까?

신자들도 말을 못해 그렇지 도마의 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십년, 이십년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이 오늘 하신 이 말씀, 천국의 거처에 대해 안 믿어지는 것이죠.

이 말을 하는 도마 자신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천국이 믿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신자들도 답답합니다.

과연 천국이 있습니까,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습니까?

세상에 종교도 많은 데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속에 이런 질문들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죠.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의 가장 위대한 진리를 선언하십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반발하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말씀이죠.

한 기독교 방송에 잘잘법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번에 어떤 신학교수가 ‘이순신장군은 구원받았을까요’ 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분이 한 말을 그동안 배워 온 기독교의 진리에 맞춰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 분이 미국인이 쓴 책에서 읽은 설문조사 내용을 먼저 제시하더군요.

설문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은 선하게 살았으니 꼭 천국에 갈 것이다’ 확신하는 사람들을 생각나는 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수녀가 전체 2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이클 조던도 나오고 다이애나 왕비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테레사수녀보다 더 많이 나와 1위에 오른 사람이 있었는데, 누굴까요?

바로 ‘나’ 라고 합니다.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거라고 말한 사람이 무려 87%가 나왔다고 합니다.

백명 중 87명이 나는 구원받는다고 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유리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이 6절 말씀을 언급합니다.

‘내가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독교인들이 비신자들에게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위의 설문처럼 주관적으로 나는 구원받는다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6절 말씀은 당시 주님의 제자들과 도마에게 한 말이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여기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그러면서 이순신장군이 구원받았는지, 안 믿고 착하게 살다 죽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결론으로 마치더군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우리 성도님들 분별이 되십니까?

안 믿는 분들에게 젠틀하게 보이려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흐려놓은 것입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본의 아니게 예수님이 없이도 구원받을 길을 본인이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예수님이 뭐하러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게다가 사람이 착하다는 기준이 뭐예요?
이 영상에 좋아요가 육천개가 넘고 칭찬하는 댓글이 천 개가 넘게 달렸습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왜 죽으셨고, 제자들은 왜 이 복음을 전하다 저보다도 더 젊은 나이에 순교했겠습니까?

편히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그걸 버리고 오지에 가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웬 의미 없는 생고생입니까?

그 교수는 선하게 살면 예수님을 안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묘한 시그널을 준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가 좁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 중 교수의 말에 반대 의문을 제기하는 기막힌 댓글이 하나 있더군요.

‘목사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착하게 산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을 텐데 예수님이 괜히 오셔서 착하게 사는 사람들 다 지옥으로 보내버리셨네요.’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더 알고 주님의 말씀을 알려는 이유가 마지막 때 유일한 구원의 진리가 혼잡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셔서 이 말씀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백프로 수긍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 구원이 성취되기까지 수천년 동안 있어 온 죄 문제의 발생부터 밟아 온 과정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배우며 이것만은 확실하잖아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겠어요?

예수님만큼 참말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 말이 거짓이라면 역사가 판단해 종교사기꾼으로 낙인찍어 영원히 역사의 감옥에 가둬야지 왜 4대성인으로는 인정합니까?

진실한 사람인데 그 말은 거짓이다라는 건 누가봐도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기에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빌립이 두 번째로 질문을 합니다.

이제와서 제자들의 다급함이 막 느껴지죠.

8절,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의 본성은 항상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순간 문득, 하나님이 정말 계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셔? 십자가가 사실이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옛자아는 항상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없길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살짝씩 들 때 너무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끝까지 믿고 갈 것입니다.

결과가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할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삼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어도 하나님도, 구원도, 예수님도 전혀 몰랐다는 게 미스테리죠.

육과 영이 그만큼 차원이 다른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잘 이해된다면 둘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내가 거듭났거나 아니면 설교자가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물론 육적인 이해와 영적인 이해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인 이해는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영적인 이해는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을 받은 다음에야 제자들은 이렇게 답답하기만 했던 말씀들을 급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들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뒤 가룟유다를 대신 할 사도를 뽑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시편을 깨닫고 사도를 충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1장20절,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게 시편69장25절과 시편109장8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삼년 반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들이 이제야 생각나고 믿어지고 깨달아 적용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거듭나지 않은 제자들을 계속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천국은 단체관광을 가듯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얹혀서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내 스스로 성경을 계속 읽고 듣고 이해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제자들처럼 답답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반드시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아버지도 알게 됩니다.

9절,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그렇게 답답해 하시는 것 같죠?

내가 아버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자하나님으로부터 성부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못 보았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아버지는 낯선 신이 아니라 예수님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분이심을 천국에 가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근심거리는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근심하며 사시겠습니까, 믿으며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자녀들의 미래에도, 내 노후에도, 내가 준비하는 진로에도,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광스러운 결말을 미리 알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고 와서 너희를 영접하리라

우리의 관심이 이 땅에 치우치지 않게 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지도, 아프지도, 못나지도 않은 영화로운 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근심하지 말고 용기내어 살아가는 모두가 됩시다.

그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복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