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한복음 18장1절-14절)

남수연 2022. 10. 29. 00:00

https://www.youtube.com/watch?v=IXdUL5NmwD0 

오늘 말씀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대속에 대해 말씀과 표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속죄의 제물이 되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떻게 고난의 잔을 받으셨는지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체포되신 곳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곳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예수님은 자리를 옮기십니다.

예루살렘과 마주 보고 있는 산이 감람산입니다.

그 사이에 기드론 골짜기라고 불리우는 계곡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가 되면 거기에 기드론 시내가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이 시내를 건너 반대편인 감람산으로 이동하신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동산으로 들어가셨는데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그곳이 겟세마네동산이라고 합니다.

감람산에서 나온 올리브로 기름을 짜던 곳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자신을 짓이기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리셨죠.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모였습니다.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가끔’이라고 오역되었지만 원어의 뜻은 ‘자주’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 마지막 한 주간, 예수님은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순례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쉬셨다고 전합니다.

가룟유다도 당연히 예수님이 이곳에 계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이죠.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번 유월절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필 해방절인 명절에 체포한다는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니겠죠.

그래서 대제사장도 명절에는 예수님을 잡지 않기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찾아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려준다며 거래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유월절을 앞 둔 이 한밤중에 급히 예수님을 체포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누군지 나오죠.

여기서 군대는 로마 정규군을 말하고 나머지는 대제사장의 사병과 산헤드린 공회가 보유한 경비병들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군대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군인 6백명으로 구성 된 로마의 단위부대를 말합니다.

그 인원이 다 출동했는지 일부만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절에 천부장이 통솔했던 것으로 보아 상당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열 두명 밖에 안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군인들이 동원되었을까요?

메시야로 기대되는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도 백부장이 있었던 것을 보면 백여명의 군사들이 민란에 대비해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날 겟세마네동산에 경비병 몇 명이 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들은 다 공개적으로 이뤄졌지 제자들만 알게 은밀히 일어난 게 아닙니다.

당시 로마군 일지에는 이날 출동한 기록이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로마군대가 동원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와 빌라도의 사전 협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 법정엔 빌라도가 대기해 있었고 속전속결로 진행 된 재판 결과 예수님은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붙잡아 처형하는 일이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게 생각할수록 참 기이한 일입니다.

이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을 것 같습니까?

빌라도 조차도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게 실제였듯이 구원과 심판도 실제 일어날 확실한 미래임을 분명하게 아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 체포군단과 배신자 유다를 예수님께서 맞이하십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유다가 군인들과 암호를 짰다고 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가서 입을 맞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장정들이 모여 있으니 어두운 밤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유다가 입맞추는 장면을 생략하고 대신 이때 있었던 특별한 사건 하나를 전합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큰 무리들이 오는 것을 보시고 먼저 그들을 향해 마주 나가시며 물으십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하죠.

예수님이 그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이 말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번역되었지만 정확한 번역은 ‘나는..이다’입니다.

보어가 빠진 애매한 문장이죠.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도 정확히 이 방식으로 자신의 칭호를 밝히셨습니다.

우리 말로는 의역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세상 어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의 하나님 호칭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마치 나는 처음과 끝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님 칭호를 밝히신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지죠.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수백명의 군인들이 이 말에 갑자기 뒤로 밀리며 우당탕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칭호를 말씀하시는 순간 감추고 계시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찰나에 표출 된 것입니다.

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의 본래의 영광이 신체와 옷을 뚫고 나와 해 같이 밝게 되신 적이 있었죠.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군대 앞에서 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을까요?

동원 된 군대의 기세로 봐서는 절대로 예수님만 체포해 갈 상황이 아닙니다.

당연히 제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일망타진할 계획이었죠.

예수님이 만일 그냥 제자들을 보내라고 하셨다면 이들이 그 말씀대로 순순히 따랐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뚫고 나오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압도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를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째로 누구를 찾냐고 물으십니다.

7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 물으신대 그들이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말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두 번 똑같은 걸 물으시는 게 어색한 것 같지만 이유가 있으십니다.

두 번째 누구를 찾냐고 물으실 때 역시 군인들이 나사렛예수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 너희가 찾는 게 나라면 나만 데려가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세에 눌린 무리들이 얼떨결에 제자들을 놓아주게 된 것입니다.

 

3. 이걸 보며 요한사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키고 보전하셨다고 합니다.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지난 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시고 하나되게 해 주시길 기도하셨죠.

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7장12절,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저는 이 기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키시는 게 기도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이셨을까?

예수님이시라면 당연히 그러실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다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고 믿음으로 이끌려 애를 써 보면 금방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간절히 원해도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되죠.

사람은 그야말로 자기 자유의지대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합니다.

자식들 문제로 아무리 애가 타 들어가도 애들이 내 마음대로 안 따라옵니다.

하루 아침에 사람 마음이 바뀌고 상황이 뒤집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우자’ 이런 좋은 동기를 가졌다 해도 삼년 기간 중에 얼마든지 변해서 돌아설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께 나왔다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잖아요?

제자들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 하나님나라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까지도 여전히 예수님께 의구심을 보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세뇌시킨 것도 아니고, 미혹시킨 것도 아니고,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신 것은 당연히 될 수 있었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인생이 수수께끼 같다지만 그 중 사람이 제일 수수께끼인 것 같습니다.

요즘 매일 진실공방을 벌이는 정치인들을 보면 정말 사람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진실이 무엇인지 자고 일어나면 뭔가 또 달라져 있잖아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이 시인이 사람이란 존재의 크고 심오함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어마어마한 자신의 세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 열두 명을 예수님께서 삼년 동안 따르게 만드셨다는 것은, 그것도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는 도발 속에서 지키신 것은 신의 권위로 하신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인격으로 제자들의 인격을 움직이시고 감화시켜 붙잡아 두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도록 보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십년, 삼십년, 십년, 오년, 그렇게 이 믿음을 간수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보전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군사들의 손으로부터 지켜 내십니다.

영혼만 지키시는 게 아니라 고난으로부터 그들의 육체의 안전도 지키신 것입니다.

신자들에겐 하나님이 고난주기를 좋아하신다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아껴서 이 고난으로부터 빼돌리려 하시는지 아시길 바랍니다.

현대의학은 점점 무통치료를 지향하죠.

전에 치과에 갔더니 잇몸에 여러 대 놓는 마취주사도 아프다고 무통마취기를 쓰더군요.

잇몸에 마취연고를 먼저 바르고 무통마취기로 한번 찌르고 서서히 마취가 되게 합니다.

나을 것이니 아픔을 참으라는 것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해도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면 하나님은 그 길을 강제로 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시잖아요?

그렇게 우리를 지키고 보전하셨기에 고난 중에도 하루하루 숨을 돌리고 살아낸 것입니다.

신림동에서 작은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는 젊은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의 설교를 들어 보면 ‘젊은 목사가 정말 설교에 진심이구나’가 느껴집니다.

전에 기독교방송에서 간증하는 것을 듣고 왜 그런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게임중독에 빠졌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집이 잘 살았는데, 개척교회를 하겠다는 친지를 위해 아버지가 연대보증을 서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잘 안되고 그 사람이 다른 데 여기저기 일을 벌여 빚이 커지고 결국 집은 넘어가고 공직에 있던 아버지는 월급까지 압류됩니다.

순식간에 빈민으로 추락한 것이죠.

이제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겠구나 이것이 시작이구나 그런 생각을 어린 나이에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유일한 낙이 되었고 결국 중독이 된 것이죠.

밤새 게임을 하고 새벽4시에 엄마가 새벽기도 가는 시간이 되어야 잠을 좀 자고 아침에 학교에 가는 생활을 십여년 반복했다고 합니다.

밤새 게임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부모님께 미안하고 신경이 쓰였겠죠.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게임 음향은 소거하고 인터넷에 나오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크게 틀어 놓고 밤새 게임을 한 거예요.

밖에서 엄마가 들으면 설교를 듣는구나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러려고 틀어 놓은 설교가 이상하게 점점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게임을 하면서 설교를 듣는 데 나중엔 설교가 분석이 되고 비판이 됩니다.

아, 저 부분은 이렇게 말해야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들을텐 데.

아, 저 목사님 너무 설교 준비를 안 했네.

나중에 이 분이 고려대에 입학해서 포스코에 입사를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결국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해 보니 이전에 밤새 설교를 들으며 쌓인 성경 지식과 설교에 대한 통찰이 그렇게 중요한 몫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목숨을 걸겠다는 포부를 밝히더군요.

게임중독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던 한 소년도 하나님은 보전해 주십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틀었던 설교로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너무 자상하고 따뜻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님과 똑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약한 믿음과 기질과 신체의 약점과 한계를 무조건 질시하지 않고 오히려 참고해서 인도해 주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받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잖아요?

그러면 게임중독에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진행자가 그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목사가 어리지만 이러다 내가 망하겠다 싶어 게임을 끊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도 그걸 기도하고 ‘하나님, 저 이렇게 기도했지만 게임 못 끊어요, 아시죠?’ 이렇게 툭 한 마디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 나 이제 게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더니 곧 게임을 안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까지 안되었던 그 결심이 어떻게 자기 안에서 생겼겠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중독 중에도 믿음을 보전해 주시고, 계속 기도하게 하시고, 응답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죠.

가정의 힘든 문제들, 쇠약해지는 건강, 답답한 진로, 죄 문제, 어떤 것이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털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어느덧 쑥 빠져 나오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키시고 자신은 고난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또 일을 벌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것 같자 격앙된 베드로가 칼을 빼서 휘두른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경비원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어 넣으라고 하시죠.

그리고 말고의 귀를 만져서 고쳐주셨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이 행하시는 뜻을 가로막은 사람입니다.

절대로 십자가 지지 마십시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마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형을 받으셔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칼을 휘두릅니다.

당시 베드로의 머리 속 회로가 얼마나 빨리 움직였을까요?

‘예수님을 저렇게 잡혀가시게 할 순 없잖아’ 그런 마음도 진심이었겠죠.

‘그래도 수석제자인데 예수님을 지켜야 체면이 서지, 좀 전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는데’

베드로가 그나마 용기를 내서 칼을 뺄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아직은 옆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홀로 남은 베드로는 여종의 추궁에도 겁을 먹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런 쫄보의 모습을 보이잖아요?

우리가 보통 용기가 나고 강하게 느껴질 때는 조건이 받쳐줄 때입니다.

믿었던 게 흔들리면 용기도 툭 떨어지죠.

베드로의 문제는 예수님의 뜻보다 늘 내 생각이 앞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 생각을 앞세우고 사는 게 이렇게 위험합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내가 아까 동산에서 분명히 널 보았다’ 이렇게 저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공교롭게도 베드로가 귀를 잘라버렸던 그 말고의 친척이라고 26절에 나옵니다.

그나마 예수님께서 귀를 붙여주지 않으셨다면 베드로가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급하게 저질러 놓는 많은 일들로 봉변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때문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 데 베드로 때문에 자칫 유혈사태가 될 뻔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신 잔을 스스로 마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1절,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군대를 맞이하시기 전에 할 수 있으시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에는 생살이 찢기고 못이 박히는 육체의 고통만 담긴 게 아닙니다.

배신과 누명과 모욕과 치욕이 담겨있었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진노와 두려운 심판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잔이 어찌 두렵지 않으셨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잔을 마시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늘과 땅에 죄인을 구원하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도 좀 하고, 남에게 욕은 안 먹고 살다 죽은 분들이니 그래도 좋은 데 가셨을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사도는 놀라운 비상함과 절제 속에 이 모든 상황을 콘트롤해 가시는 예수님을 어둠 속에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헐크는 자신을 해치는 상황에서 통제하지 못하고 괴력이 폭발하죠.

제압할 능력이 있는데 불량배에게 맞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폭행을 당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통제하셨습니다.

불의에 대한 공의로운 대응도 스스로 통제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셔서 무죄를 입증받으시면서도 결국 십자가형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죽음에 넘겨지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통치자이셨습니다.

오늘 요한사도가 그런 믿음직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으시려 스스로 체포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우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고통의 쓴 잔을 받으셨겠습니까?

또 그 대속의 결과를 아셨기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요한사도가 우리도 그 잔을 마시겠다 호기를 부릴 때 말씀하셨죠.

그래, 너희도 그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오늘은 도망간 제자들이 결국은 다 그 잔을 마시게 되잖아요?

내가 받을 잔을 주님이 받으셨고 내가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게 주신 작은 잔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주시는 희생의 잔, 인내의 잔, 겸손의 잔이 누군가를 복되게 한다면 기쁘게 그 잔을 받으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그 성실하심으로 지키시고 보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