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0장1절-18절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남수연 2022. 11. 15. 01:26

https://www.youtube.com/watch?v=sW1EOTXgb3k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종교의 창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고등종교는 없습니다.

인간 역사에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이었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고등종교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믿는 신앙이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진리라는 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까지 하신 모든 말씀과 표적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은 부활로 입증됩니다.

예수님이 한 인간이셨다면 죄인이었을 것이고 죄인이었다면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는 오늘 부활의 아침에 일어난 일과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믿음의 종착지를 선명히 보여 줍니다.

오늘 목표는 우리가 함께 그 믿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본문에 따라 세 단계로 볼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 둘째는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시신이 사라진 현장을 조사하고 돌아간 것,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뒤의 부분과 부활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도 참고합니다.

 

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급히 장사되셨습니다.

다음날 토요일 안식일에는 안식일이 그렇듯이 모든 일이 올 스톱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 후 첫 날, 주일이죠.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와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갑니다.

본문에선 막달라 마리아만 언급하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여인들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도 마리아가 ‘우리가’ 라는 복수를 쓰죠.

여인들은 갑자기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신 예수님께 늦게나마 향품을 바르고 시신을 깨끗이 수습하기 위해 일찍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돌아가신 슬픔과 허전함과 극도의 우울감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다하고자 여인들은 낙담한 마음을 스스로 일으켜 무덤을 찾은 것이죠.

때로 우리 믿음도 죽은 것 같고 막막한 절망감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은 그냥 눈 앞에 있고, 믿음은 항상 내면에서 끌어 올려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죠.

그럴 때 마리아처럼 내 스스로 의지를 일으켜 예수님께로 나가면 다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의 미스터리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불통이었죠.

그 미스터리가 부활의 아침에도 이어집니다.

부활의 미스터리는 제자들 모두가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전에 여러 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던 당시에나 부활의 아침에나 제자들이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상상 못할 만큼 죽음은 인간에게 압도적이고 강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찾는 것도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이미 돌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천사가 돌문을 굴린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틀 전,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낸 뒤 군인들이 돌문을 인봉하고 경비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선 여인들이 누가 돌문을 열어줄지 걱정하며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해서 돌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자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그러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이럴 수가! 어떤 놈이 우리 주님의 시신에 손을 댔구나’ 그렇게 확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들을 의심했겠죠.

그런데 그 가능성은 1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뒤 대제사장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무덤을 경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대죠.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자신이 죽은 다음 사흘 뒤에 부활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지 않지만 혹시라도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숨기고 부활했다고 퍼트리면 살았을 때 보다 죽은 뒤에 더 골치 아프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덤을 봉인을 하고 군인들이 철통 같이 지켰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시신을 없앴다는 건 전혀 타다성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사라진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찾아내 부활이 날조라고 밝혀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도 이렇게 주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을 알고 있었잖아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상상도 못하고 있다는 게 더더욱 미스터리이죠.

 

2. 마리아는 시신이 사라진 이 황당한 소식을 전하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제자들에게로 달려 갑니다.

2절,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님의 시신까지 누가 가져갔다는 말에 제자들은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저들이 시신까지 훼손했나 울분하며 더 절망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었기에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만 현장을 확인하러 서둘러 달려갑니다.

무덤이 있는 동산은 십자가 형장에서 가까웠기에 두 제자가 쉬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4절에서 요한사도가 앞서 달려간 것은 베드로보다 더 젊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덤이 있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먼저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에 세마포만 남은 것을 보고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습니다.

시체와 시체가 닿은 모든 것을 부정하게 여겼던 유대교 전통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주춤했을 것입니다.

사실 요한사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참한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무덤에 이르렀을 때 그 기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이태원참사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트라우마를 겪고 있죠.

저도 그날 밤 12시가 넘어서 온 재난문자를 보고 놀라서 TV를 켰는데요.

처음엔 희생자들 모습을 보호하지 않고 그냥 막 방송에 내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래도 되나 깜짝 놀랐죠.

길바닥에 사람들이 꽉 들어 앉아 여기저기서 막 심폐소생술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 이게 재난영화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지난 주엔 운전하다 구급차 소리가 들리면 왠지 깜짝 놀라며 더 허둥지둥 비켜주게 되더군요.

현장에 있었던 분들의 트라우마가 심각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형을 보지 않았죠.

또 본래 직진하는 성격대로 오자마자 그냥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무덤 안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사도가 이런 세세한 내용들을 다 기록하는 것은 어떻게든 그 날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이 복음서를 쓰던 때엔 이미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출현했을 때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조사해서 밝혀 낸 것이 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여기서 베드로가 ‘보았다’는 원어의 뜻은 그냥 둘러본 게 아니라 꼼꼼히 살피고 조사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몸에 대해선 나사로의 부활에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살펴보니 몸을 감쌌던 세마포가 그대로 몸 위치에 놓여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돌돌 말린 채로 머리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처럼 회생해서 수건과 세마포를 풀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마포의 상태로 보면 마치 몸만 그대로 증발된 것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우리처럼 만져지는 육체가 있으면서도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해서 영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 내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죠.

그것도 내 몸이 완전한 몸으로 부활해서 산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나이 먹어가며 여기저기 아픈 것 너무 싫잖아요?

우리의 미래가 영화로울 것임을 늘 기억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세마포가 놓인 모양을 조사한 베드로도 시신이 도난당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누가 시신을 가져갔다면 천을 다 벗겨내고 가져갈 리는 없는 것이죠.

그제서야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사도도 뒤따라 들어가서 그것을 보고 믿게 됩니다.

8절,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이들은 현장을 보고 타당하다 생각이 들어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사도가 자신들이 믿었던 부활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덧붙이죠.

9절,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왜 부활하셔야 하는지,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했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고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지 말씀을 믿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뒤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뭔가를 보고 믿는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을 그냥 인정하는 것이죠.

믿음은 불확실성과 상대에 대한 신뢰라는 요소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요한사도가 이 복음서를 통해 어떤 믿음으로 안내하는지가 드러나죠.

보이는 현상과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에서 바울사도도 그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제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늘 다지는 말씀이 에스겔서 3장17절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성경으로만 사람을 깨우쳐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은 것은 성령을 받기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22절에 가서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창세기6장에서 사람을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성령을 거두신 말씀이 나오죠.

악한 죄인들이 더 이상 성령의 감화에 협조하지 않으니 철수 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대속으로 죄를 씻은 심령에 다시 성령께서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은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니다.

부활의 아침에 아직 성령이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수여되지 않으신 것이죠.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조사해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10절,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치고는 너무 맥빠지지 않습니까?

이건 부활을 믿은 건지 안 믿은 건지 애매하죠.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은신처로 돌아가서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갔을 뿐입니다.

요한사도가 이 부활의 이야기를 쓰면서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령이 안 계시면 신자들의 신앙 행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을 받고 성경을 깨닫게 되자 사도행전에서 얼마나 달라집니까?

베드로의 용기가 달라졌지만 또 말씀을 깨닫는 것이 달려졌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유대인들에게 전파합니다.

그 때 다윗의 시편16편을 들어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 설교를 하죠.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썩었기 때문에 이건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메시야가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을 다윗을 통해 이렇게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니 ‘아, 이 시편이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하신 것이구나’베드로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한 사실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믿으면 나의 부활이 믿어집니다.

이 부활신앙의 위력이 현실의 난관도 거뜬히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처럼 ‘부활에 대한 설교만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닙니다.

여전히 힘없이 생활의 근심에 치여 살아가게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도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부활이 믿어지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문제 되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성경과 성령을 통해 믿은 부활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어떤 역경도 성공도 가난도 부요도 개의치 않고 오직 영광의 종착지를 향해 갑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성령께서 이런 부활 신앙을 모두에게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최초로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을 조사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마리아는 다시 무덤을 찾아옵니다.

영원에 뿌리를 내린 믿음이 아니면 부활의 소망이 없기에 항상 우울합니다.

우리나라 우울증 유병률이 37퍼센트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그만큼 우리 사회가 버티고 살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무덤에서 울며 서성이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공허감이 느껴집니다.

영혼의 허기와 공허감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본성에서 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생을 알아야만 채워집니다.

공허를 세상의 것으로만 평생 채우려는 것은 갈증을 바닷물로 해결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허무와 이 우울사회를 이겨내는 힘이 되는 부활신앙을 오늘 꼭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울며 또 무덤 안을 들여다 보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곳에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흰 옷을 입은 천사라면 분명히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를 텐데 마리아는 전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설령 천사가 사람처럼 보였다 해도 무덤에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천사에게 예수님 시신을 못 봐냐고 하소연할 정도로 마리아가 정말 패닉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 뒤에 나타나셔서 마리아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알고 주님께 주님의 시신을 보았냐고 묻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 즉시 예수님을 알아차립니다.

16절,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예수님의 음성이나 어조가 옛날과 같아서 알아 들은 게 아닙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몰랐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도 즉각 주님의 음성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못 알아 본 것은 우선 예수님이 이전의 모습과 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목격담을 보면 예수님이 달라지셔서 제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기 힘든 부활을 단호히 증거 해야 할 복음서가 의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겼다는 게 성경의 진실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의 몸의 신비겠지만 제자들에겐 특별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육체에 계실 때의 그 관계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이 육으로 주님을 알았지만 이제 성령을 통해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갈릴리의 주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똑같다면 그 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에 방해 요소가 될 부활 이전의 모습을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르신 말씀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은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발을 잡고 경배했다고 합니다.

또 도마에게도 손을 내밀어 못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시잖아요?

마리아에게 붙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전처럼지내는 것으로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연히 주님이 옛날처럼 계시겠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상태로 우리 곁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일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이 역시 성경이 예언해 놓은 구원 그림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오셔서 더 완벽한 연합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17절,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힘주어 말씀하는 것 같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기쁨과 만족감이 저는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고난은 바로 이것을 위함이시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유업에서 영원히 삭제되었던 우리를 대속해 주심으로 다시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번 요한복음의 부활에서 바로 이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고 예수님의 형제 된 놀라운 은혜와 혜택을 매일 누리며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한사도는 오늘 의도적으로 부활사건을 구성합니다.

부활이 실제 사실이라는 것을, 오히려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증거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예고하신 부활에 그토록 무지했던 것은 성경과 성령님의 부재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령님과 성경이 우리가 구원을 알고 구원을 이뤄가는 엔진입니다.

창조와 죄와 십자가와 부활과 구원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령의 빛으로 꿰어 통째로 한 줄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부활을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세가 진짜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자꾸 환기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적을 이 영원한 삶에 집요하게 맞추지 않으면 이 땅의 삶에서 균형잡힌 믿음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세상에 휙 끌려 들어가 버리는 걸 아시잖아요?

현재를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세상 문제만 파고 들어가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오히려 영원한 삶에 대한 이런 진리를 자꾸 확인하고 견고히 하는 것이 세상을 풀어가는 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말씀이 성령님의 은혜로 내 부활에 대한 믿음이 되게 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