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9장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남수연 2022. 11. 6. 02:09

https://www.youtube.com/watch?v=_h2OWCiXxOs 

 

지난 주 18장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회와 헤롯왕과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십니다.

법정에서 빌라도는 세 번, 예수님이 무죄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자신을 왕이라 하는 예수님을 무죄라고 하는 것은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며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결국 빌라도는 정치적 결정을 선택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예수님은 밤에 체포되셔서 새벽에 이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요한사도는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상황을 전해줍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릴 때 마음에 걸리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이미지에 움찔하게 되죠.

저 고통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으면서도 가슴에 뼈저리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십자가를 대하는 신자들의 곤혹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은 자기의 고통만큼 감각되지 않습니다.

자식이라 해도, 가족이라 해도 내 고통과 똑같이 와 닿지는 않습니다.

내 고통처럼 아프다면 거기엔 나에 대한 연민이 포함되어서 일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 놓고 오는 데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울면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요양원에 두고 온 불효자가 된 것 같아 슬퍼서 울더랍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에서 고통, 슬픔, 눈물, 그런 감정적인 요소들을 싹 빼고 사실만을 전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길에서 애달프게 우는 여인들을 향해 말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애절한 감정으로 먼저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을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사도가 전해 준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실에 입각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사람의 구원과 심판이 실재라는 확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장차 죄인들이 받을 심판이 엄포가 아니라 사실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거나, 무능하거나, 대제사장의 정권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십자가형의 피해자가 되신 게 아니잖아요?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이 모든 상황을 예수님께서 진두지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과, 주님의 증언대로 구원과 심판이 다 사실이라는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다음 세상에서 받을 구원과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밑도 끝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다 죄 가운데 살다 그 값으로 영벌을 받을 운명이 맞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벌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성경에 예언하시고 더 확실히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이 구약성경 천오백년 역사에 행해진 동물의 속죄제사입니다.

예언 된 주님의 대속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구원과 심판도 다 사실입니다.

그래도 왜 하필 예수님은 저렇게 끔찍한 죽음으로 대속 하셔야 했나, 십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으셔도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사형제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것이야말로 내가 지은 죄와 잠재된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재판소에서도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중한 형량을 내립니다.

형량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알 수있는 것이죠.

계곡 살인의 이은혜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그 죄가 그만큼 흉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값에 대해 최고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과 비교해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돌덩어리 같은 양심을 살처럼 부드럽게 하시면 상황은 달라지죠.

내 안에 있는 흉악한 죄의 잠재성이 보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죄가 동기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그래야 내 죄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비로서 짝이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자기 백성죄인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재판에서 십자가형이 선고된 예수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십자가형은 잔혹하니만큼, 공정한 판결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죄 때문인지를 패에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죄목을 써서 붙였습니다.

19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이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다’입니다.

좀 의아한 죄목이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는 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보고 대제사장들은 발끈해서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그렇게 쓰지 말고 예수님의 죄목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쓰라는 것입니다.

왕이 아니면서 왕을 사칭한 중대 범죄라는 것이죠.

빌라도는 그들을 비웃듯이 말합니다.

‘나는 내가 쓸 것을 썼다’

자기가 쓴 명패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믿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을 이용해 십자가형을 받아낸 대제사장들을 얄밉게 보고 그들의 정곡을 찌르는 복수를 한 것이기도 하겠죠.

빌라도가 쓴 패에 쓰인 말은 두 가지에서 사실입니다.

먼저 액면 그대로 여기 달리신 예수님은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21절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알리러 온 천사가 예고했던 대로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십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인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믿는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대로 죄인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유일한 길, 십자가의 속죄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런 구원의 윤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이 높이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사람들은 둘로 나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마치 무빙카메라가 트랙을 따라 한바퀴 돌며 인물을 비추는 듯 십자가 주변의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거기에는 정치적 야망을 위해 무죄를 유죄로 바꾼 빌라도가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방해가 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관료들이 있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은 그저 남들의 판단을 따라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에게서 십자가 대속을 믿고 구원받는 자들과 믿지 않고 영벌을 받을 자들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과 함께 좌우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두 명의 강도입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 좌우에 두 명의 죄인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 두 명의 강도들 중에 한명이 구원받은 내용을 추가로 기록합니다.

처음엔 두 사람 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편에 있던 강도가 그 사이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같은 비유대권 나라에서는 메시야의 구원을 설명하려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부터 증명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도 알고 메시야도 압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 중에 보내주실 구원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메시야인지 밝혀지기만 하면 믿는 것이죠.

누가복음을 보면 우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는 좌편 강도를 이렇게 꾸짖습니다.

23장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정말 기적 같은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편에 있던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던 여섯시간 사이에 예수님이 그 메시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가 십자가형으로 끝나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누가 봐도 지금 남을 구원하실 처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보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자기 영혼을 부탁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자연현상에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셔야만 가능한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 구원자라는 것을 기적처럼 믿고 내 영혼을 안전히 예수님께 의탁한 사람들입니다.

두 강도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묘하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운명과 일치되죠.

그들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지만 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한 사람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를 두고 일어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구원받음에 안도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대비됩니다.

2)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들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23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절,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사형수가 입던 옷을 나누어서 가진다는 게 이해가 안되죠.

우리나라는 죽은 사람의 옷이라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고 해도 웬만하면 다 버리잖아요?

예수님 당시에는 물자가 풍족하지 않던 때입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마당에 빨래해서 걸어 놓은 옷가지도 훔쳐 가고 신발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가난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이 풍요가 믿기지 않을 정도죠.

지구상에 그때보다 더 못사는 나라들이 많은 걸 보면 이것은 세상이 발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은 축복이 분명합니다.

사형수의 옷은 형을 집행한 사람들의 부수입이었을 것입니다.

시장에 내다 팔면 얼마간의 돈을 받았겠죠.

예수님이 무슨 그렇게 고급 옷을 입으셨겠어요?

지금 주님의 옷이 있다면 경매에서 엄청난 가격에 팔렸겠지만요.

당시에는 몇 푼 안되는 그걸 챙기느라 옷의 박음질을 풀어서 넷이 나누고 속옷을 가져갈 사람은 제비뽑자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사람들이 지금도 별짓을 다 하잖아요?

전에 영안실에서 시신의 금니를 뽑아서 판매했다 붙잡힌 장의사도 있었죠.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그 하찮은 이득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참 별것도 아닐 일, 하찮은 것을 위해 그렇게 목을 매고 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입니까?그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종일 십자가 아래 땅의 일, 땅에 속한 생각으로만 삽니다.

그게 믿어지는 성도들은 종일 땅에서 살지만 눈은 십자가와 하늘의 유업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신자들의 관심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내가 영생할 하나님나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우리 믿음을 항상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3) 또 한 그룹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여인들의 무리입니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태복음은 이모라는 말 대신에 세베대의 아내라고 기록합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죠.

세베대의 아내면 요한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모라고 했으니 요한사도와 예수님은 사촌간인 것이죠.

십자가 곁에는 이 여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큰 고난의 시간에 여인들이 곁에 있었던 것은 그나마 주님께 작은 위안이 되셨을 것입니다.

힘든 사람 곁에 끝까지 있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이천년 전이었다면 우리도 거기 함께 앉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켜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과 동일시합니다.

성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를 고난 당하는 예수님으로 알고 함께 하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입을 벌리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사도에게 맡기십니다.

의지했던 맏아들 없이 살아가야 할 마리아의 심정과 형편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런 것이죠.

전에 여수에서 남편의 의처증과 폭행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이혼을 결심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흉기에 찔려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간신히 한 말이 가슴을 턱 막히게 하더군요.

‘저 죽어요? 우리 아기들 어떡해.

자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자식들 걱정이 먼저인 게 부모죠.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마리아의 남은 생을 위해 요한을 아들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처럼 여자들 일자리가 많아서 뭐든 해서 먹고 사는 때와는 다릅니다.

그런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이사람 저사람 도움으로 거지같이 살게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지 아십니까?

우리가 자식의 생활을 생각하는 것, 그것 보다 더 하십니다.

우리는 걱정만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한 대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정말 구체적입니다.

그걸 점점 더 경험하며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요한의 집은 갈릴리에서 큰 어업을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대규모의 생선유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충분히 마리아의 생활을 책임질만 했기에 예수님이 요한에게 맡기신 것이죠.

나중에 요한이 에베소로 떠나는 데 그때도 마리아를 모시고 갑니다.

지금 터키의 에베소에 가면 거기 마리아의 집터가 있고 마리아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또 이 장면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생겨날 새가족을 상징합니다.

이전에 집을 나와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을 마리아와 동생들이 찾아왔던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전하자 예수님께서 모두가 당황했을 말을 하십니다.

마태복음12장48절,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50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십자가 아래에서 지금 새로운 혈연관계로 예수님의 새가족,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도우며 대속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저 고통이 나를 위해 당하시는 것을 알고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슨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단지 주님의 대속을 믿고 붙어 있는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를 책임지시듯 그렇게 책임져 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이 교회 안 다니는 것보다야 조금은 낫겠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탄생한 교회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모여서 주님의 복된 새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3. 요한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경의 예언이 이뤄진 것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생애와 대속은 하나님에 의해 빈틈없이 계획되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정말 작은 일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 주님이 하나님이신 것, 죄인을 대신해 죽으실 것, 등등이 다 예언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헷갈리지 않게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고 구원 얻게 하시기 위해서죠.

주님은 그 모든 예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최종 성취하고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의 예언의 퍼즐 조각을 십자가의 주님께 하나하나 맞춥니다.

마치 예언의 퍼즐 조각들이 스스로 십자가에 맞춰져 속죄와 구원의 그림을 완성하는 신비감이 느껴집니다.

요한사도가 십자가를 예언의 성취라는 초점에 맞춘 것은 구속의 진리가 구약성경으로부터 맥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이사야서53장12절의 메시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2)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은 것은 다윗의 메시야 시편22편17절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3)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대속이 완결 된 시점을 아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예수님의 신성으로 아버지의 진노의 잔이 비워졌고 이미 대속을 완수하셨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마지막 예언을 수행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것은 다윗의 메시야 시편인 69편과 22편의 예언입니다.

3절,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22편 15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4) 그리고 군인들이 우슬초에 적신 신포도주를 드리자 그걸 받으시고 스스로 고개를 떨구고 운명하십니다.

시편 69장 21절의 성취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후 장례하는 과정에서도 예언들이 속속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에 대해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치밀한 계획을 공개하시고 그대로 성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사도가 복음서를 쓴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믿지 않고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잘 이해가 되고 점점 더 믿음이 굳건해 지고 계십니까?

이 땅의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항상 고개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내가 받을 영광을 바라보시길 축복드립니다.

그 천국을 소망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놀라운 기쁨과 힘과 위로가 됩니다.

천국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이죠.

천국을 소망하는 만큼 오히려 세상도 즐겁고 보람있게 살게 됩니다.

’내 인생 왜 이래‘, 이런 푸념은 너무 세상을 바라고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던 여인들처럼 옹기종기 십자가 아래 모여서 서로를 지켜주며 예수님께 붙어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