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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에 당도했습니다.
성도님들 마음 속에 각 장마다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잘 새겨져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하늘의 절대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긴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그 아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졌던 각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도들이 부활과 같은 기적에 대해 대충 알고 넘어가면 신앙 전체가 종교나 신화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부활의 사건들을 꼼꼼히 잘 이해해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하시길 바랍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와 있습니다.
지난 주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모습을 보이셨죠.
그리고 그 뒤에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두 번 찾아오십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세상을 구원할 복음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게 20장에서 복음서가 끝났거나 아니면 21장에서 제자들이 이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것으로 끝나면 자연스러운 결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마지막을 이렇게 잘 마무리합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부활 이후 제자들의 동선이 좀 꼬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와 있습니다.
게다가 제자 7명이 함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1) 우선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오게 된 이유부터 알아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14장28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만난 여인들에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다시 전하라고 하십니다.
또 천사도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 다시 모으시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뜻이 있으시겠죠.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었는지 갈릴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저녁에 이들이 모인 곳으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도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팔일 뒤에 예수님이 두 번째로 방문하십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실 무슨 일인가를 하시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하셔야지 왜 시골 갈릴리로 내려갑니까?
그래서 미적거리고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그 이후 나타나지 않으시자 결국 갈릴리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오늘이 세 번째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갈릴리로 다시 모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고향이 갈릴리 나사렛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서9장1절에 이미 예언된 일입니다.
이사야9장은 유명한 메시야 예언의 장이죠.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예언이죠.
그리고 메시야가 갈릴리에 임하실 것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갈릴리는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살며 고통당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던 지방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가난한 마을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인 걸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수근댔죠.
41절,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52절,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갈릴리에 오실 그리스도의 예언이 버젓이 이사야 성경에 있거늘, 매일 성경만 본다는 사람들이 대체 뭘 보는 건지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증거되는 갈릴리 복음입니다.
실력이든, 돈이든, 공로든, 구원받을 자격있다며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대속의 복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화려한 정치 인생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겪은 것은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의 잔혹함이었죠.
그들이 주님을 끔찍하게 죽였잖아요?
성공의 꿈은 짓밟혔고, 권력자들의 벽은 넘사벽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취하는 자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복음은 그런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으로 장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려고 한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실패와 좌절을 맛 본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부르셔서 이 복음으로 새역사를 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릴리로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시 갈릴리라면 차라리 옛날처럼 고기나 잡겠다고 나섭니다.
신자들 중에도 이러시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죠.
3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한 말은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물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맛보았던 사람들의 환호와 탄성과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꺽여 고향에 왔으니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상의 권력, 성공, 부와 명예, 그걸 한번 맛보면 놓지 못하잖아요?
어떤 블로거가 항공 마일리지를 다 긁어 모으고 무리를 해서 인생 최초로 비즈니스석을 탔다고 합니다.
럭셔리한 대접을 받으며 비즈니스석의 상류사회를 실컷 누렸습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뒤에 있는 커튼을 젖혔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이코노미석에 빽빽이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그 사람들이 마치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 같았다는 거에요.
불과 몇시간 만에 이코노미석 사람들과 비즈니스석의 자기를 스스로 분리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번 업그레이드한 삶을 맛보면 내려오기가 참 고통스럽죠.
제자들이 그런 침통하고 화가 난 마음으로 밤새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했어도, 성령을 받았어도, 우리 안에 이런 옛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손에 잡히는 현실처럼 생생할 수는 없습니다.
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위력이 이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지난 한 주간 고기잡는 일에 빠져서 살았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성도들의 고기잡이는 더 이상 내 실력과 경험과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베테랑 어부들이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가 잡을 물고기를 몰고 다니십니다.
제자들처럼 물고기만 잡아먹고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겠다면, 세상 바다에 아무리 그물질을 해도 고기를 다 쫒아버리십니다.
성도들의 직업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난 다음에는 내 직업과 삶이 하나님나라와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죠.
성도들은 돈을 많이 벌어도 많이 모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지도 않는다면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세상에서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쉬지 못하고 고생했지만 그래서 남들보다 얼마나 잘 살게 되셨나요?
행복해 보려고 그렇게 좆았던 것들이 행복을 주던가요?
그렇지도 못할 바엔 뭐하러 그렇게 세상의 노예처럼 매달려 종사를 합니까?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수님 신앙 중심으로 살아도 지금 정도는 충분히 살게 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빈 그물로 인해 허탈하던 그때 바닷가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말 미스터리였습니다.
4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여기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죠.
‘날이 새어갈 때’에는 원어의 바른 뜻으로 ‘아침이 되었을 때’입니다.
새벽이라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속 서 계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누군가 서 있는 것도 몰랐고 예수님이신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이 준비하신 식사를 할 때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이신 것은 분명히 맞는데, 그 모습은 ‘당신 누구십니까’라고 묻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하신 날 보았던 주님과 똑같은 모습이었기만 해도 제자들이 이러지는 않았겠죠.
마가복음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16장2절,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주님이 계속 다른 모습을 보이신 것은 일정한 얼굴을 예수님으로 기억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사도 만큼 주님을 잘 알았던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사도가 본 천상의 예수님은 결국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1장13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인자 같은 이’라고 하잖아요?
또 처음 보는 모습이셨다는 것입니다.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제자들에게 번번히 바뀌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미스터리였겠습니까?
우리들만 예수님이 신비롭고 베일에 가려진 것 같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분명히 믿지만 때로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죠.
예수님께서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십니다.
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말의 원어 뜻은 ‘너희 고기 없지?’ 그런 말입니다.
없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는 데 왼쪽에는 안 던졌고 오른 쪽에는 안 던져 봤겠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조업을 하는 이유는 해가 뜨면 수온이 올라가서 고기들이 깊은 바다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미 해가 떴으니 고기는 다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른 쪽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에 이끌려 제자들은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그물이 가득 차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베드로를 보고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겉옷을 챙겨 입고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좋아하고 가까이 가고 싶은 베드로의 마음이 느껴지죠.
여기서 요한사도가 베드로사도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서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웃통을 벗고 조업을 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원어대로 하면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챙겨 묶었다는 것입니다.
헤엄쳐 갈려면 입었던 옷도 벗어야 될 텐데 베드로가 하는 짓이 이상했다는 것이죠.
주님 만났을 때 예의를 갖추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처럼 편하게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전과 다른 경외심이 제자들에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신 누구십니까’?라고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오늘 제자들을 통해 우리 인생 조업에서 기억할 것은 그것이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고기가 없을 때 내게 주신 어장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쪽에 그물을 내릴지 기도하며 예수님과 함께 조업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은 고기 잡으러 돌아온 제자들을 다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이것은 단지 제자들에게만 해당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만 사명을 주셨다면 제자들이 죽고 나서는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겠습니까?
주님은 바닷가에 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떡을 구워 조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9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모습은 낯설지만 하시는 행동을 보면 예수님이란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그동안 요한복음에서 알아왔던 예수님,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던 예수님의 애정 어린 마음이 숯불의 온기처럼 전달되고 느껴집니다.
반가운 마음에 백여미터를 헤엄쳐 예수님께 나온 베드로는 막상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갑게 맞아주셨을 것이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 주님께 사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예수님과 단 둘이 마주한 순간이 얼마나 어색하고 마음이 복잡했을까요?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숨통을 터 주시죠.
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이런 일이라면 베드로가 잘 하죠.
베드로가 일어나 그물을 그대로 끌며 해변에 다가오는 배로 달려갑니다.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일어나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좀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물고기가 백오십마리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제가 전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갈릴리바다에서 잡은 베드로고기라는 생선튀김을 먹어 봤습니다.
크기가 꽤 컸습니다.
한 1킬로 정도로 계산한다면 백오십삼마리니까 백오십삼킬로가 나오겠죠.
백오십킬로면 성인 남자 두 명 정도 무게인데 그 정도면 장정 일곱명이 들어 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죠.
그래서 제가 갈리리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좀 조사해 보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엔 18종 정도의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먹을 수 있는 물고기가 딱 세 종류라고 해요.
보통 식사 때 먹는 정어리 같은 작은 생선과 베드로고기라고 알려진 중간 생선, 바르부스라고 하는 아주 큰 생선입니다.
이 바르부스는 무게가 7킬로까지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르부스가 백오십삼마리 잡혔다면 1톤 정도 무게인 것이죠.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걸 보면 그 정도는 무거웠다는 것이죠.
물론 바르부스만 백오십삼마리 잡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서 지금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을 때 그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큰 물고기만 백오십삼마리이고 잔챙이들도 다소 섞여 있었다는 것이죠.
주님은 숯불에 잔잔한 생선들을 굽고 계셨고 빨리 구울 수 있는 작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면 큰 놈, 작은 놈, 섞여서 걸립니다.
그물을 던졌는데 바르부스만 백오십삼마리가 잡히는 것은 기적의 낭비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기적도 절대 과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일상에 섞여서 기적인지 아닌지도 모를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기적의 상황을 만드셨을까요?
이걸 보며 베드로와 제자들은 삼년 전 그 장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날도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 했을 때 그대로 했더니 그때도 이만큼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두 배에 나눠 실었음에도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베드로 일행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1장1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때 하셨던 그 말씀, 그 상황이 안 떠오를 수가 없는 것이죠.
제자들도 지금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일로 눈을 마주치기도 민망했을 것입니다.
무슨 염치로 주님의 사역을 하겠다 나서겠습니까?
또 위험한 순간 도망쳤던 기억에 자신감도 다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처음과 똑같은 상황을 준비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뻔하잖아요?
다시 해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반드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이 충격적인 1톤 물고기를 보며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도 말씀의 은혜로 살지만 때때로 경험하는 기적 같은 기도응답에서 하나님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되잖아요?
예수님은 밤샘 조업에 지치고 추위를 느낄 제자들을 불가로 불러 모으십니다.
1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13절,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이 요한사도가 에필로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능력의 예수님, 그러나 우리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의 주님.
그리고 어벤져스와는 거리가 먼 과오와 연약함으로 얼룩진 제자들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다시 머리를 맞대고 하나님나라를 얘기하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모습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뤄가시는 예수님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의 시간이 펼쳐질 것이라는 요한사도의 아름다운 결말인 것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도 믿고 성령도 받았지만 여전히 몸에 밴 옛사람 삶과 약점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약한 자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세우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한 대안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늘로부터 능력으로 덧입혀지기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연약한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명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성경은 거듭 강권하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성령으로 거듭났다 해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제자들처럼 늘 세상의 고기잡이로 돌아갑니다.
매일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우리가 던지는 삶의 그물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잘 감당하며 살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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