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요한복음11장1절-46절)

남수연 2022. 9. 24. 02:06

 

https://www.youtube.com/watch?v=Lm1rC5D3Yxw 

 

우리는 요한사도가 전해 준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마쳤을 때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롯이 담겨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

요한사도가 구성한 일곱가지 표적 중 마지막 표적입니다.

이 역대급 표적을 행하신 결과는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결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성도들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구원의 근간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부활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확고히 갖게 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1. 나사로의 부활을 둘러 싼 배경을 잘 알아야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가 많은 본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엔 나사로와 두 여동생이 우애 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본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가족들을 많이 사랑하고 가깝게 지내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라비 나사로가 병을 앓다 죽은 것입니다.

혈육의 정을 나누었던 가족의 죽음만큼 무섭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에도 피할 수 없이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슬픔도 그런 것입니다.

고난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나사로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3절,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그러나 지금 예수님도 자유롭게 처신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맹인을 고쳐주신 일로 극도로 예민해진 유대인들은 직전에 예수님과 논쟁하다 주님을 돌로 치려는 돌발 상황까지 갑니다.

앞장 40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의 마찰을 피해 나사로의 마을 베다니에서 하룻길 정도 떨어진 요단 건너 베다니 마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마지막 유월절까지는 아직 두어 달 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되 유대인들의 반응과 상황에 따라 사역을 조정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옳으시고 복음을 전하는 게 긴박해도 피할 때는 피하십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백프로 순종하는 천사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백프로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사람을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과 일해보면 내 계획대로 절대로 안 되는 거 알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지를 정하고 인도하실 때 마치 지하철 노선도처럼 지나가는 모든 역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삼가며 그 노선을 따라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길도 아닌 오프로드로 막 갑니다.

길 아닌데로 가면 거기서 또 길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고 돌았기에 이렇게 노선이 복잡한 내 인생이 된 것이죠.

이제는 최대한 하나님과 환경을 주시하며 좀 면밀하게 살아야 인생노선에서 탈선하지 않아야 되리라 믿습니다.

 

2.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이틀을 더 계시다가 나사로를 찾아가십니다.

이 때 제자들의 반응이 당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나 나사로를 살려야 했기에 예수님은 다시 유대땅 베다니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가 주님을 맞으러 마을 밖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집에는 유대인 조문객들이 많았다고 하죠.

얼마 전에 있었던 불상사 때문에 마르다가 마을 밖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나갔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나중에 마리아를 부르러 가서도 비밀리에 주님이 오셨다고 알리고 마을 밖으로 불러내죠.

그러나 마리아가 황급히 일어나 나가는 바람에 거기 있던 유대인들이 곡하러 하는 줄 알고 다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목도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 나사로의 부활은 이런 긴장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 보통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이틀을 기다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이라는 더 큰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러 지체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나 지난 번 앞을 못 보게 태어난 맹인의 경우에서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에게 고통스런 환경을 일부러 가중하지 않으십니다.

나사로가 숨을 거둘 때 두 자매가 얼마나 괴롭고 슬프겠어요?

죽음이 마취하고 수술실 들어가는 그런 정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상태가 더 악화되길 기다리셨다면 뭔가 애매하죠.

만일 그렇게 하고 나서 무덤 앞에서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셨다면 그게 뭡니까?

그것보다 더 정교하고 타당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이 복음서에서 굉장히 치밀하게 날짜를 다룹니다.

전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실 때도 절묘한 날짜 계산이 들어갔던 것 기억나시죠?

오늘도 그런 날짜의 비밀코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가셨을 때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바로 베다니로 가셨다면 거리가 하룻길인데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날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위중해서 사람을 보냈던 그 날 중에 나사로가 죽었던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출발했던 사람이 예수님께 오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1일, 소식을 듣고 머문 시간이 2일, 베다니로 가시는 데 걸린 시간이 1일, 합치면 4일이 되는 것이죠.

어차피 예수님이 소식을 듣고 바로 가셨어도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빨리 오셨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안 하고,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과 충돌만 없었다면 예수님이 유대에 머물러 있으셨을거잖아요?

예수님은 나사로가 그 고통 속에서 숨이 넘어가기를 계산하며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닙니다.

사람은 항상 속셈이 있고 꿍꿍이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나사로는 모든 인간의 죄의 결과로 온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여러 난관을 만나는 것은 이 땅의 생태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복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사로의 시신이 썩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삼일장을 치르죠.

삼일 간 고인과의 이별의 시간을 갖고 조문도 받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고인이 소생할까 기다린다는 의미의 넉넉한 사흘 시간을 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도 삼일간은 혼령이 시신 곁에 머문다는 속설을 믿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 되었기에 이미 시신에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법의학자들에 의하면 시신이 썩는 데 네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1일에서 7일 동안 진행됩니다.

그 단계에서는 체내에 있던 소화효소가 세포조직을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그걸 자기소화라고 합니다.

내 안에 있던 소화효소가 음식이 아닌 내 몸의 세포를 소화 시킨다니 좀 끔찍하지만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플라스틱처럼 썩지 않게 하셨다면 더 끔찍한 일이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면 이런 부패과정이 상당히 진행된 시점입니다.

이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신 기록이 또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인성에 살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죠.

이 두 경우는 죽은 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지금도 희귀하지만 죽었다가 몇 시간 뒤 회생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학적으로 나사로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 인정된 라자루스 신드롬은 세계에서 38건 정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의 1시간 이내에 회생했습니다.

나사로의 경우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다시 살리신 것으로 최후의 부활에 대한 표적입니다.

티끌로 사라진 모든 사람들이 다시 부활한다는 걸 시연해 보여주신 것이죠.

 

3. 나사로의 부활은 목적을 분명히 밝히신 마지막 표적입니다.

1)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봐라, 하나님이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도 살려내실 수 있다’

이런 영광을 보이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그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대단한 영광도 아니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주로서의 책임감 있는 희생,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공감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위대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시다 한들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부모가 돈과 능력으로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게 부모의 영광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이 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한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도 죽으신 뒤 무덤에서 부활하시게 될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시려면 하나님이 죽으셔야 합니다.

이런 자기희생이야말로 하나님의 위엄이고 가장 큰 영광이신 것이죠.

2) 또 나사로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심장이 멎으면 영혼도 소멸되고 모든 것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영혼이 어딘가 살아있다 다시 육체로 돌아온 것이잖아요?

솔로몬은 영혼의 영원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서12장 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하나님은 부활에 대해서 구약성도들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두개인들을 제외하고는 다 부활을 믿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환상 중에 또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12장2절,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이런 말씀을 통해서 막연하지만 내세가 있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3) 그러나 이들이 과연 진심으로 부활을 믿었을까요?

우리가 부활을 사실로 믿을까요?

만일 내세와 부활을 믿었다면 현재 사는 게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인정만 했지 내게 일어날 사건적으로 믿지는 않았다는 것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십니다.

자색옷을 입고 혼자만 호의호식하던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 집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가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습니다.

부자는 죽어 보니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좀 보내서 이 상황을 전달해 그들도 나처럼 살다가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선인과 악인의 부활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부자가 다시 간청합니다.

아닙니다, 만일 죽은 자 나사로가 살아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오늘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절,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지금도 부활신앙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정말 소수입니다.

또 부활에 대한 참신앙이 있다면 반드시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날에만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부활신앙을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 것이다라고 하자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나 무덤의 돌문을 옮기라고 하시자 손사래를 칩니다.

주여, 죽은지 이미 나흘이라 냄새가 나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에 살리시는 주님께서 지금은 살리지 못하십니까?

예수님은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어야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시라는 것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부활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죄인의 숙명인 사망을 제압했습니다.

그래서 사망이나 사망의 그림자인 어떤 고통에 직면해도 그 기세가 우리를 장악하지 못합니다.

물론 죽음의 과정과 아픔을 겪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에겐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공포가 있습니다.

내가 눈을 감은 뒤, 그 다음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께서 투병하고 돌아가시는 과정을 다 지켜 보았습니다.

신체의 고통도 있었고 자식들과 세상과의 이별은 힘드셨지만 죽음을 무서워하시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성격상 담대해서가 아니라 죽음 뒤의 삶도 현재의 삶처럼 실제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믿는 성도들과 아닌 사람들의 차이는 삶에서도 선명히 드러납니다.

저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사람들도 눈치가 있어서 다 압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사는 목적이 벌써 다릅니다.

우리 청년 세대들은 내세와 부활에 대해 멀리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은 현재를 살아가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또 만일 장래의 부활을 믿는다면 내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신중히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4.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과정입니다.

1)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33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런데 원어의 뜻을 보면 비통히 여기셨다기 보다는 감정을 주체못할 정도로 격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섭리가 완전히 전복된 광경 앞에서 발현 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영원한 생명 대신 죽음이, 기쁨과 희락 대신 슬픔과 애통이 가련한 죄인들을 짓누르고 있는 참담한 광경에 인생의 창조주께서 어찌 참을 수 없이 격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같은 불의한 사람들도 전쟁으로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뭔가 올라오는데요.

그리고 3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의 감수성이 오라비의 죽음에 애곡하는 자매들을 보며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인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가족상을 당해 조문을 가면 저도 들어가면서부터 눈물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진노하심에서 저는 우리를 위협하는 사망을 호령하시는 창조주의 위엄을 보며 견고한 안전을 느낍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진노하십니다.

또 내 슬픔에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하시는 유일한 한 분 예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은 공감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은 내가 죽음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우렁차게 명하실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와 같이 절망적인 우리의 모든 상황들도 이렇게 불러내어 회복시켜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그리고 나사로가 주님의 명령대로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얼굴은 수건을 싼 채로 수족은 수의로 동여맨 채로 겨우 걸어 나오는 데 그 광경이 어땠겠습니까?

그 순간은 기쁨보다 경악과 공포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의를 풀어서 걸어 다니게 하라고 하십니다.

수의를 푸는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땠겠어요?

무서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수의를 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왕이면 수의까지 다 풀고 멋지게 걸어서 나오게 하시면 좋지 않았겠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은 나사로가 그 이전에 회생해 있다가 돌문을 치우자 걸어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렇게 믿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잖아요?

묶여있는 수의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순간 살아났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죠.

또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전의 몸과 똑같이, 예수님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신비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나중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들어가 보고 마치 굉장한 증거물을 발견했다는 듯이 한 장면을 세밀히 기록해 놓습니다.

20장6절,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예수님은 사라지고 안 계신데 덮었던 수의가 누우셨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고 얼굴을 감았던 천이 말려진 채 머리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사로처럼 이전 몸으로 부활하셨다면 몸을 감쌌던 수의와 얼굴 천을 스스로 풀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감았던 천이 돌돌 말린 채 그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나사로와 다르다는 것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셔서 수의를 그냥 빠져나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사로의 영혼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의 영혼은 불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가 판명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믿으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과 소망을 더 확고히 가짐으로 사망의 그림자인 현실의 어려움과 시련도 넉넉히 이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