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요한복음9장1절-12절)

남수연 2022. 9. 9. 15:28

https://www.youtube.com/watch?v=cZG5qltIBys 

 

오늘 나눌 말씀은 요한사도가 뽑은 예수님의 일곱가지 표적 중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단지 기적을 행하셨다는 자체보다 그걸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맹인으로 태어 난 사람의 눈을 고쳐 보게 해 주십니다.

이 표적의 의미를 알면 우리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1.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아마도 이건 모든 사람들이 갖는 의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초막절 끝 날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데려왔던 사건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아직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당시 앉은뱅이, 맹인, 불구자들은 주로 사람들이 북적이는 성전 주변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길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을 관심있게 바라보시는 걸 보고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참 남의 불행에는 참 무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런 질문을 합니까?

맹인은 앞이 안 보이는 대신 청각이 뛰어납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두고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 듣는 맹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사람은 남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합니다.

정말 타인의 고통에 공감이 된다면 궁핍하고 소외당한 사람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통은 남의 고통을 보며 감성팔이만 하는 것이죠.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기의 안전을 확인하고 안도감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좀 가까운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도 내가 개입할 선을 긋습니다.

나도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다 필요에 의해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필요치도 않은 데 변치 않고 사랑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상한 분이신 것이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게 그래서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맹인은 여러 사람들이 부모의 죄까지 들먹일 때 울컥 설움이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 큰 어려움에 빠질 때 우리도 무심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일을 당할 걸 보면 무슨 죄를 지었나 보네’

그래서 목사들이 중병에 걸리는 게 제일 두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병이 무섭기 보다 성도들 눈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기도가 부족한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나’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대해 관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맹인을 보며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물었을까요?

우리가 흙수저로 태어나서 고생만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야 합니까, 복도 없는 나를 원망해야 합니까?

인지심리학자들이 사람을 연구하다 보니 사람이 안 변하는 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능이고 또 하나는 성격입니다.

부모의 재산만큼이나 내가 사는 데 절대적인 것들이죠.

그러니까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맹인은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못 갖고 태어난 것이죠.

이런 모든 불리한 상황과 불공평함, 인간의 모든 고통이 결국은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맹인이 된 게 자기 죄 때문이라면 태중에서 대체 무슨 죄를 지었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부모의 죄 때문이라면 왜 그래야 하나 억울한 것이죠.

제자들은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질문한 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죄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버린 아담의 원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죠.

결국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죄성으로 인해 죄를 짓고 불행이 왔다면 그게 내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하시고 맹인을 고쳐주십니다.

3절,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1) 주님이 제자들과 얼마나 다르신지가 느껴지십니까?

이번 요한복음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의 속죄자이신 확신을 가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의 말과 행동에서 주님의 인격이 내 마음에 와 부딪치는 만남이 있기를 더욱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이 어색하고 멀게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왜 날 구원하셨는지 의아할 뿐인 것이죠.

그렇기에 요한사도는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파고들어 보도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나 고생하는 맹인을 단지 신학적 논점의 케이스로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 있잖아요?

중병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했는 데 회진 도는 주치의가 인턴들을 몰고 와서 여기저기 내 몸을 가리키며 설명할 때, 참담하죠.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실 때 우리가 인격이 있기나 해 보이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도 실망의 눈길로 보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어 보면 압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를 의롭게 보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심판의 눈길이 와서 꽂히면 아무도 죄 못 지을 걸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심문당하시던 예수님이 뒤를 돌아 베드로를 쳐다보시죠.

만일 그때 예수님의 눈빛에 실망이나 입가에 냉소가 보였다면 베드로가 나가서 통곡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이 있습니다.

그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나 같은 모질이,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하다 온 나를 환대하시는 그 사랑에 다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의 1/n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1억명이 구원을 받으면 내가 받은 사랑이 1억분의 1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에게 백프로의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시는 진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비유가 그런 것입니다.

만일 구원해야 할 사람이 베드로 한 사람이었다면 그렇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마다하셨겠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이 나 한사람이라고 해도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주님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알수록 내 가치도 알게 됩니다.

 

2) 주님의 대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먼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 온 맹인의 누명을 벗겨주십니다.

그게 맹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맹인이 죄가 없는 의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은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자가 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는 당연히 세상에서 반드시 나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다만 고난이 다 내 죄와 직접 관련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언제 터질지 모르게 팽팽하게 부풀어가고 있는 사회악은 당연히 인간의 죄가 만들어 온 결과입니다.

누가 그 거대한 악의 구조에서 피해자가 될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파키스탄은 지옥이 열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홍수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국토의 삼분의 일이 물에 잠겼고 삼천삼백만명의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파키스탄 산지의 빙하가 녹은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누가 또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맹인에게 하신 말씀이 모든 고난이 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도 악이나 불행을 조장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기원에 대해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논리가 부족하거나 해명이 궁색해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무엇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통의 유대인들을 보여주잖아요?

다만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아담의 원죄는 사람 속에 하나님과 인간에게 악을 행하는 성향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원죄를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 죄를 관리하지 않고 하나님과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흉악한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잖아요?

또 하나는 원죄든 자범죄든 다 용서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맹인 된 게 누구의 죄냐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보다 치료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죠.

우리는 맹인의 경우처럼 때로 해석되지 않는 고난을 만납니다.

질병, 재난, 빈곤, 고독, 실직, 대인관계의 고충, 이것들이 백프로 다 내가 잘못해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오늘 맹인의 경우처럼 의미 없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표적의 의미는 영적인 죽음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맹인이 눈을 떳잖아요?

육체의 필요에서도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어쩌다 빠지게 된 늪과 같은 환경일지라도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또한 믿고 항상 기도하며 이겨내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이렇게 맹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우리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4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살면서 나 혼자의 믿음을 간수하기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먼저 눈을 뜬 성도들은 눈 먼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가 비신자들을 위해 하는 수고와 중보기도를 반드시 유효있게 하신다는 보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필요 뿐 아니라 맹인과 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필요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수님까지 일관되게 주시는 계명은 가난한 자와 억압된 자, 약자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만 행복하면 끝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가족 중 누가 불행하면 나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추세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빈곤에 빠지면 부자들의 파티도 흥겨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 약자들과 더불어 살라는 것은 그럴 때 인간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작은 친절만 베풀어도 내 마음이 좋잖아요?

최근 일본의 어떤 분이 이런 실험적인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중증 장애인들, 자폐인들을 한명씩 고용하자는 것입니다.

그 장애인분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월급을 주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그냥 회사 로비에서 뛰어다니게 하고, 휠체어에 앉아라도 있게 하자는 것이예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일하는 그곳에 이 사람들도 한 구성원이 되어서 함께 생활하게 하자는 것이죠.

교회가 이런 관심으로 약자들을 대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폐지를 모아서 20년 동안 1억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한 사람이 있더군요.

우리가 소액이라도 자꾸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을 위해 돕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을 주고 영적 맹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예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맹인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겠습니다.

6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절,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발라주신 것이 좀 꺼려지십니까?

이천년전의 생활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급하면 어머니가 치맛자락에 침 묻혀서 꾀죄죄한 자식들 얼굴을 대충 닦아 주곤 했습니다.

모기 물렸을 때도 얼른 침을 발라 주셨죠.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침을 쓸 때는 이렇게 느낌이 좀 다릅니다.

일단 자식처럼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내 침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바닥에 앉아있던 맹인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합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이질감 때문일 것입니다.

또 사람 안에는 뿌리 깊은 차별이 있습니다.

나보다 뭔가 부족하다 생각하면 무시하고 절대로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 예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이 맹인을 고쳐주시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상 속 예수님도 맹인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고, 얼굴을 감싼 채 진흙을 눈에 발라주시는 데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내 아이라면 아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이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말씀으로만도 이 맹인을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여러번 고쳐주셨는 데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진흙을 발라서 눈을 고쳐주신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으셨다는 것이죠.

고대 문헌에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기록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분은 진흙으로 맹인의 눈을 만드셨다’

듣고 보니 무엇이 생각납니까?

창세기에서 처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던 것이 생각나죠.

이레니우스란 신학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해 놓았습니다.

‘창조자인 말씀, 그 분께서 태 속에서 만들기를 빠트렸던 것을 공중 앞에서 보충하셨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다시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하니 뭔가 느낌이 다르죠.

우리에게도 없이 태어났던 영의 눈을 재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재료가 진흙과 같이 하찮은 것, 침처럼 기피하는 것이라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문제 삼고 학력을 문제 삼고 상류사회에 인맥도 없다고 무시하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침과 땅바닥의 흙처럼 뭉개지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멸시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오늘처럼 주님의 그 살과 피에 감사하며 성찬을 나누며 기념하는 것입니다.

 

5. 그럼 왜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옆에 수도가 없고, 대야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실 거잖아요?

예루살렘 성지순례 코스엔 이 실로암 못도 들어갑니다.

열왕기상에 보면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이 침공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성은 시온산 정상에 높이 세워진 천연요새입니다.

적이 함락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죠.

그런 경우는 장기전으로 성을 포위 해 굶주려 항복하게 하는 전술을 썼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안에는 식수가 될 샘이 없습니다.

지난 주 베데스다 못도 양문 곁에 위치합니다.

예루살렘의 수원은 성 밖에 있는 기혼샘입니다.

이 물이 성곽 밖의 긴 도랑을 타고 흘러와서 성안에 있는 이 실로암 저수조에 저장됩니다.

만일 포위 당할 경우, 적들이 밖에서 들어오는 이 물길을 막아버리면 성안에는 물이 한방울도 없이 고갈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왕은 기혼샘의 입구를 숨기고, 기혼샘부터 실로암 못까지를 연결하는 도시 밑 지하수로를 뚫었습니다.

지하 암반을 깎아서 500미터 정도의 긴 수로를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죠.

30분 정도 걸으면 이 수로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실로암 물은 예루살렘 주민의 생명수였습니다.

본문7절을 보면 실로암의 뜻이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굳이 밝히죠.

실로암은 근원인 기혼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뜻이죠.

맹인이 씻고 보게 된 이 실로암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서8장6절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웃나라를 의지한다고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라고 하시죠.

이미 실로암을 하나님으로 상징해 놓으셨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이 생명의 물을 버리고 다른 것을 쫒지 않으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맹인을 고쳐주신 표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을 보게 하실 상징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뒤에 보면 맹인이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정말 영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구주되심을 고백합니다.

38절,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죄인이 구주를 만나 믿음을 고백하는 모습만큼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다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오늘 세례식에 이런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을 행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죄인들, 병자들,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거기서도 구원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에 진흙을 발라 고쳐주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아마 실로암 안과병원으로 인도하셔서 개안 수술을 하게 해 주시겠죠.

우리는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구한다고 우리를 구박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구원받을 믿음을 주시길,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육체의 필요들을 채워 주시길 늘 기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