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6장 (생명의 떡)

남수연 2022. 8. 27. 01:10

https://www.youtube.com/watch?v=DHNVzu98rW0&t=180s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의 사역 중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불통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통이 전혀 안 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냐는 엉뚱한 말을 하죠.

사마리아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니까 다시는 물길러 오지 않게 그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의 이야기를 하시는 데 사람들은 육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오늘도 예수님은 영생을 위한 생명의 떡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원한 것은 당장 먹고 배부를 떡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세에서 영원히 복을 누리며 사는 것과 지금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할까요?

만일 영생을 원한다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겠기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배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한 방의 기적이나 체험을 통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기적을 보고도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그걸 확인 시켜줍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십자가의 대속은 무엇인지, 예수님을 이해하는 만큼 내 인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50인데 100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신앙을 뻥튀기해 주지 않으십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뒤 그것을 모티브로 주님이 구원자되심을 설명하신 내용을 이 복음서에 모아 놓았습니다.

이 말씀들이야말로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지식의 진수인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 진리를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1.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시작됩니다.

1절부터 기록된,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표적에 이어지는 담화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병고침이 소문을 타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숫자만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죠.

작은 동네 단위로 살던 당시를 생각하면 오천명 숫자는 예수님의 인기가 어땠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렇게 병자를 고치시고 복음을 가르치시던 빈 들판에 날이 저물어 갑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제자들은 사람들을 해산해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자고 하십니다.

빌립은 모두에게 음식을 나눠주려면 2천만원 이상이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합니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 온 보리떡과 생선을 떼어서 모인 사람 전부를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의심하는 것은 1장에서 선언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은 대화와 사람들의 반응은 이 기적이 사실이었기에 관련해서 일어난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고 떡을 얻어먹고 나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열광합니다.

이분이야 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선지자가 맞다, 성경에서 계속 예언되었던 그리스도가 맞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서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앞세워 로마총독 관저까지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해산하고 자리를 피하십니다.

다음 날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여전히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이죠.

이 담화가 길어질수록 유대인들은 주님이 자기들이 원하던 메시야와 다르다는 것에 점점 실망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떡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 적어도 로마에서 해방시켜 그들의 착취로부터 재산을 보호해 줄 메시야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 땅의 빵 문제의 해결자로 오신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그들과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 것이죠.

지금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육신의 떡일 것입니다.

내 불안한 마음에 평안을 얻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도 다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믿어야 그것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요한복음에서 다양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빛이다, 양의 문이다, 선한 목자다, 부활이요 생명이다, 길이다, 포도나무다.

오늘은 생명의 떡이라고 주님 자신에 대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21세기에도 지구촌 수많은 사람들이 빵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삽니다.

코로나와 내전, 기후 문제로 굶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유엔보고서를 보면 지구인 10명중 1명은 기아 상태이고 세 명 중 1명은 식량 불안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끼니 걱정을 안 하고 사는 것만 해도 지구촌에서 상당히 특권층인 것이죠.

냉장고에 쟁여 놓은 것만 파먹어도 몇 주는 버틸 정도잖아요?

로마지배하에 굶주리던 이스라엘 국민들에게는 빵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세주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경제를 살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 지도자를 다 원하잖아요?

오병이어의 표적 다음날, 다시 주님을 찾아서 나온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잘못을 알아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시죠.

우리가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포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똑같이 우리에게 물어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겠어요?

‘너 오늘 왜 나를 보러 왔니?’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하나님까지 동원해 보려는 마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죠.

하나님이 그것만 좀 도와주셔도 얼마나 우리 짐이 가벼워지겠습니까?

그걸 예수님이 모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에는 음식과 돈이 다 떨어진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염려하시는 주님의 마음도 당연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나온 우리를 굶겨 보내지 않으신다고 믿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한다는 말씀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는 짐을 점점 벗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찢고 떼어서 우리 입에 넣어주시려는 데 사람들은 보리떡 얻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근심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을 영원한 양식에 돌리게 하십니다.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은 영생하는 양식과 대비해서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을 말합니다.

원어에서 ‘썩을’이란 단어는 파괴, 무너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돈이든, 명예든, 사람이든, 그것에 행복을 거는 한 그것은 반드시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그 늪에 점점 깊이 빠져, 영생을 향해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맛에 빠지면 예수님께로부터 얻는 영적인 맛에 점점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게 둘 다 동시에 될 수는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죠.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핀잔과 멸시만 돌아옵니다.

썩을 양식으로 죄의 금자탑을 누가 더 높이 쌓는지 경쟁을 벌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인생임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세상에서 양식을 위해 일하고 세상에서 얻은 걸로 즐기고 누립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근본 목적이 영원한 양식을 위해 산다는 분명한 믿음과 원칙이 세워져 있다는 게 다릅니다.

세상살이의 염려가 점점 더 압박하고 조여오는 장년 이상의 성도님들!

세상에서 뭔가 더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해진다면 그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열심히 안 살았던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안에 모든 게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도 그 안에 답이 있고 우리의 노후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기도를 더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명예와 돈이 청년 성도들의 목적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잊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육의 양식보다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청중들이 듣기 원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영생을 갈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배부를 떡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떡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미 반신반의하는 마음인 것이죠.

28절,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수천년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 일을 완수하실 주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자되신다는 것을 구약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을 통해 미리 예고하셨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예언 된 표적을 보여주시고 주님이 바로 구원자되심을 입증하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삯을 갚을 다른 방도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을 신앙의 세월에서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확고히 믿어지도록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만큼 이것은 절박합니다.

그게 보물이 있는 밭을 발견하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비유의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떡을 먹여주셨을 때는 왕으로 추대하자고 열광했던 사람들에게서 점점 실망감이 묻어나죠.

30절,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그러면서 모세를 들먹입니다.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늘 무언가 들먹이며 핑계를 대죠.

31절,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주님의 의도대로 이들이 구약성경의 만나를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은 만나를 통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으로 이들이 광야의 만나를 연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미리 박아 놓으신 그리스도의 예표들과 예수님을 연결해서 아는 것은 믿음을 한층 고양시킵니다.

전에 정옥금권사님과 수요예배를 드릴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죽어가던 사람들이 모세가 만든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순간 살게 되잖아요?

그것이 신약시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연결되고 깨닫게 된 순간 권사님이 굉장한 믿음의 확신을 얻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신 것도 광야의 만나와 관련해 생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만나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식량입니다.

출애굽 세대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생존했던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영생을 위한 유일한 생존양식이십니다.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2)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2백만명의 인구를 사십년 동안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 식량을 땅에서 얻게도 하실 수 있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땅에서만 양식을 구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라는 성자하나님의 존재를 예표하는 것이죠.

3) 만나에는 심판과 구원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를 먹은 것을 특권처럼 자랑하지만 하나님이 처음부터 만나를 40년간 먹이실 생각은 아니셨습니다.

만나가 신비로운 하늘의 양식이지만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맛 같았다고 합니다.

이 땅에 없는 맛이 아니라 아는 맛이라는 것이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천국의 음식 맛이 아닙니다.

그걸 40년 동안 먹고 사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고기를 달라, 애굽에서 먹던 향신료를 달라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이죠.

본래 하나님은 출애굽 뒤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실 계획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뒤 거긴 들어가서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거절했던 가나안땅에 못 들어가고 사십년간 광야에서 살게 된 것이죠.

거절하면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이들의 죄로 인한 광야 심판 때문에 먹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나에는 심판과 구원의 의미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시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이 대속해 주신 내 죄를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로 인한 심판의 상태임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오늘 예수님께 실망했다고 난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죄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속죄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해도 예수님께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이 목숨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 뭐를 아끼고 안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얻으면 결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먼저 이 말씀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알고 믿은 사람에게는 영의 굶주림, 목마름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도 주님을 먹고 마시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사람이 존재함으로 매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생활의 염려가 항상 우리에게 있죠.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상황마다 튀어나오는 여러 안 좋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하나님의 구원조차도 의심이 되고 불평과 원망도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지난 주 저희 집 화장실에 고칠 게 있어서 아파트 관리기사분이 오셨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전화가 울리는 데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찬양이 우렁차게 수신음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기사분이 전화에 대고 다짜고짜 버럭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시는 거예요.

기도하며 주님을 잘 따르고 싶은 것도 진심이고, 그러나 여전히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실체입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점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해도 우리의 구원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매일 육체를 위해 음식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거듭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을 주셨지만 그 생명이 매일 충만하기 위해서도 항상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제품이 가장 완전하게 기능하려면 매뉴얼대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때가 가장 완전한 상태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가고, 지킬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생각이 예수님을 향해 정조준되어 매일 완전한 기능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권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떡 담화는 말씀 그대로가 다 진리이고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겠다고 더 주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를 보면 이 강론의 결말이 나옵니다.

결과는 잘 먹여 놓고 진리를 가르쳤더니 다 떠났다는 것입니다.

66절,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께 잘 대접하고 봉사해도 그냥 떠나죠.

예수님처럼 정확히 복음을 가르쳤더니 다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면 오히려 딱딱한 음식이 싫다고 떠납니다.

그러니 과연 어떤 죄인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해답을 주님께서 3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먼저 무슨 조치를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구원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처럼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다 떠나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다면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감화하셨기에 우리가 관심도 없던 주님께로 나오게 된 것이죠.

구원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면 우리는 시작도 못하고 끝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주권을 갖고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택하여 예수님 앞으로 나온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떠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선택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가려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누군가는 돼지가 진주를 짓밟듯 멸시하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께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한복음을 묵상하며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대속제물이 되시려는데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대신 해 죽을테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오히려 간청을 하시는 상황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이미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가 홀대 당하실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53장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요한사도는 그 예수님이 과연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세상의 종지부를 찍으시는 마지막 심판의 환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을 또 기록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모두가 되십시오.

그리고 매일의 생활도 주님을 먹고 마시며 가장 좋은 날들로 누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