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장18절-25절(예수그리스도의 나심-두 개의 족보)

남수연 2022. 12. 27. 14:26

https://www.youtube.com/watch?v=AOX7eYdwD2Y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선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가장 기뻐하실 감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우리가 잘 배우고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복된 믿음이 잘 다져지는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성탄을 족보라는 역사를 통해서 열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나심과 앞에 있는 족보는 세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지 않는다면 처녀 몸에서 성령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신화처럼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당시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들이 대중에 편만하였을 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탄생을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낭만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족보를 통해 역사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장의 족보는 이스라엘 기원과 왕조의 족보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왕조의 족보와 같은 것이죠.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금도 유대인들이라면 다 알만한 조상들이고 왕들입니다.

이 족보를 보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참 치밀하게도 준비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부터 예수님까지만 따져도 이천년 정도가 됩니다.

창세기부터 치면 더 오랜 세월이죠.

이 긴 역사에 걸친 족보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수천년에 걸쳐서 이루시는 치밀함과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세상을 경영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언약하고, 성취하십니다.

시편40편에서는 우리를 위한 생각도 많아 셀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수천년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를 향한 계획도 이루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계획을 정해진 시간에 이루십니다.

나를 위해 계획하신 좋은 일들은 그냥 기다리기만 잘 해도 이뤄집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게 우리의 가장 큰 단점이죠.

오늘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라고 시작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실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렀던 것은 그 메시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장의 족보에는 우리가 많이 들어봤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줄줄이 나오고 다윗을 거쳐 마지막으로 요셉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예수님에 와서는 아버지로부터 대를 이어오던 룰을 깨고 모친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파격으로 족보가 끝납니다.

아무도 예상 못한 동정녀 탄생의 신비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요셉에게서 태어난 친자라야 다윗의 자손이 되는 거잖아요?

이런 문제는 기독교의 진정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공격 포인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의문을 갖고 성경에서 답을 얻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로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양자 제도입니다.

양자로 입적한 사람은 법적으로 자식의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것이죠.

지금도 입양해서 호적에 올리면 친자와 똑같은 법적 권리를 인정받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도 어찌 보면 입양과 같은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입양하셔서 자녀의 지위를 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요셉의 양자로서 법적인 아들이 된 것이기에 요셉처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경우를 따져봐도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부모 중 한 사람만 다윗의 후손이면 됩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친부가 아니래도 마리아가 다윗 가문이면 되잖아요?

마리아가 다윗 가문일까요, 아닐까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예수님의 족보가 누가복음 3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두 개라면 당연히 하나는 아버지의 것이고 하나는 어머니의 것이겠죠.

두 족보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일치합니다.

마태복음은 다윗 다음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정통 다윗 왕가의 족보로서 요셉까지 이어집니다.

만일 예수님 태어나실 당시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였다면 요셉은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로마에 넘어갔고 이스라엘은 헤롯왕처럼 로마가 임명한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죠.

그런데 누가복음 족보는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아니라 나단이라는 아들로 이어집니다.

역대상3장5절을 보면 나단도 밧세바가 낳은 아들입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 중에서도 별로 이름나지 않은 나단이라는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를 보면 다윗 이후엔 죄다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누가가 이것을 예수님의 족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족보는 누구의 족보겠습니까?

마리아의 아버지의 족보이고 마리아의 족보인 것입니다.

누가가 마태와 달리 마리아의 족보를 넣은 것을 보면 요셉이 양부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되냐는 논쟁이 이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꼼꼼히 보시는 분들은 여기에서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려면 다윗처럼 유다지파여야 합니다.

마리아가 유다지파일까요?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마리아와 친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친족이라는 원어는 여자들쪽 친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벳이 레위지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친족인 마리아도 레위지파가 아니냐, 그러니 유다지파인 다윗의 후손일 리가 없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성경 지식이 이 정도인데 막상 신자들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하는 분들이 많은 게 걱정스럽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었는데, 어느날 지혜를 주시더군요.

부모들이 친 자매간이라도 자식세대인 이종사촌들은 성이 다릅니다.

저희 자매들의 자식들도 성이 박이요, 백이요, 김이거든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어머니가 어느 지파 사람과 결혼했냐에 따라 자식들이 레위지파도 되고 유다지파도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대로 마리아는 유다지파이고 다윗의 자손인 것이죠.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법적으로도 다윗의 자손이고, 혈통으로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잘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이해가 되고 믿어져야 하나님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은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인간 역사가 주님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계획되어 돌아가고 있던 것을 이 긴 족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모친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세상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정녀 탄생이 허위이거나, 아니면 예수님 자체를 아예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실 여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시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 처럼 부부관계를 통해서 태어나셨다면 저는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 믿을 것입니다.

그래 놓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신비는 피조물인 우리의 머리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에는 이해해야 하는 게 있고 믿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자격을 위해 필수입니다.

예수님이 아담을 통해 이어지는 죄인의 족보에서 태어나셨다면 대속자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육체는 완전한 인간의 형질로 태어나시되, 원론적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언약의 문제에서 아담을 통해 온 죄의 본성은 없으신 것입니다.

인격의 본성상으로는 본래 가지고 계시던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보유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평생 죄가 없는 흠 없는 대속자가 되셨던 것은, 죄를 참고 안 지으셔서가 아니라 죄를 못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해도 죄는 옛사람이 짓는 것이지 거듭난 새사람은 죄와 무관합니다.

성육신 탄생은 본래 가지셨던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존재 방식이 완전히 바뀌신 것입니다.

단 한 번 사람이 되신 게 아닙니다.

성육신 이후로는 인간의 몸과 결합 된 예수님으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육체를 그대로 지니고 승천하셨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한 육체로 주님을 만나고 영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자격으로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셨다는 것에도 복된 의미가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에는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두 주역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을 전하는 내용이 자세히 나옵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임신해서 낳아야 하는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경건한 마리아는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순종한 뒤 마리아가 부른 찬송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데 마리아가 얼마나 메시야를 기다렸던 경건한 성도인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다윗왕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겠죠.

그 메시야가 처녀인 자기를 통해서 오신다니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나도 되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천사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직 십대 였을 어린 마리아의 이런 결단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성령으로 아기를 가진 것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지난 주 제 조카가 지휘봉을 잡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뮤지컬을 보러 갔었습니다.

유관순열사는 열여덟 살에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하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어린 소녀 한 명이 일본에 항거한다고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나라를 위한 헌신을 계속 기도했던 유관순열사는 때가 되자 기도한 대로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야가 오시길 기도했고 그랬기에 자신을 통해 오시는 걸 순종한 것과 같은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길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를 통해 이루실 어떤 일에든 순종하고 헌신해야 맞는 것입니다.

또 지금 누리는 자유 대한이 누군가의 피와 죽음의 댓가이고 지금 누리는 복된 신앙이 누군가의 피와 순종의 댓가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의 정혼은 법적으로 혼인을 결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직 합치지만 않은 것이지 정혼은 이미 부부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천사가 ‘네 아내 마리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듣고 나서 요셉은 이 결혼 관계를 조용히 끝내려고 합니다.

19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왜 조용히 파혼을 결심했을까요?

사실 조용히 끊는 것은 아내인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배려도 아닙니다.

파혼당하고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지 뻔하잖아요?

요셉은 마리아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요셉이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내 마리아를 요셉이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불륜의 임신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도 파혼하려고 한 것은 이 엄청난 일에서 빠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천사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죠.

마리아의 말을 믿었기에 이 두려운 일에 끼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왠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삶이 힘들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은혜를 덜 받았다면 편히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을 했을 것입니다.

교직에 있을 때도 믿음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지금과는 강도가 다르죠.

헌신의 강도도 그렇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차원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다시 십삼 년 전으로 돌아가서 선택하라고 해도 저는 고민하다 다시 이 길을 택할 것 같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그냥 평범하게 나사렛 시골마을의 젊은이로 사는 것이 더 편안한 인생이었겠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경건한 성도가 평범한 행복을 포기하고 비범한 사명을 선택함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느 처녀도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못 오시는 것이죠.

지금 내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이라해도 이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두려운 일에서 빠지고 싶었지만 천사의 명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님의 법적 보호자로서, 이들을 돌볼 가장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살때 까지는 요셉이 살아 있었는데, 그 이후로 언제 죽었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작은 사명을 주신다면 마리아와 요셉처럼 순종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영원한 보람과 기쁨을 얻으시길 축복드립니다.

 

4.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아시겠지만 21절에서 가브리엘천사가 이렇게 말해주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모든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죠.

누가 예수님의 백성입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한 사람들이 있었죠.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하늘의 천사들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님께 가서 왕으로 경배합니다.

동방에서 별을 관측하던 박사들이 왕의 탄생을 알리는 기묘한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했습니다.

이 성탄절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우리와 같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또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들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예수님이 구원하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교회에 올 때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교회에 찾아 오신 분이 있으십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죄인식은 믿음이 생겨야 생깁니다.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고 나면 그때에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역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내가 나날이 더 죄인이라는 것이 느껴지면 예수님의 백성이 맞는 것입니다.

물론 나날이 더 죄를 안 짓는데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과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3절에서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했던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우리 말로는 처녀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의 단어는 그냥 여자를 말합니다.

처녀가 잉태한다고 예언했다면 이사야선지자가 미친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알고 나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이 처녀가 잉태할 것이었다고 해석이 된 것이죠.

그래서 모든 번역 성경들이 다 처녀로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과 계시들은 점진적으로 의미가 밝혀지고 예수님이 오신 뒤에야 다 꿰어 맞춰집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가서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그렇습니다.

유튜브 광고 중에 볼 때마다 마음이 좀 아픈 그런 광고가 있습니다.

어릴 때 보육원에서 자라 성년이 되어서 독립하게 된 사람들을 자립준비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순하게 생긴 청년이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회에 나와 보니 나쁜 사람들이 자기 같은 사람들을 더 노린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들에겐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청년이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 번 당해 본 것 같더군요.

청년의 자신감이 없는 눈빛에서 참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성도님들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를 울타리로 두르고 지켜주지 않으신다면 재물도 건강도 언제 강탈당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편에서 주님과 함께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모든 일을 기도로 의논하고,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어려운 설교도 들으며 우리 마음을 하나님 곁에 두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하시는 경험을 못하는 실망감 때문입니다.

기도를 했지만 응답을 못 받고 일이 어렵게 되면, 차라리 기대하지나 말 것을 하는 실망감이 듭니다.

기대했다 실망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낙담시킵니까?

이런 신앙의 우울증에 걸린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차라리 내 힘 닿는 대로 살자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아야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기도했지만 원하는대로 되지 않은 일은 지나고 나서 보면 그게 더 유익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죠.

하나님의 판단이 옳으신데 우리는 내 생각을 우기면서 실망하기 때문에 신앙의 우울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다시 힘써 예수님께 함께 하도록 새 믿음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인도하심을 믿고 살아있는 믿음의 심장이 다시 펄떡거리며 뛰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다윗가문의 족보가 남아있다면 거기엔 예수님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자신을 드린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듯이 하나님께는 내가 아니면 안될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 마음의 소원을 주실 때마다 하나씩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올 한해도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 주셔서 큰 위기에 빠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이 없으니 우리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새로 시작되는 일들과 앞날들에서 우리 마음을 지켜주시고 삶을 평강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