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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5장부터 이어진 유명한 산상수훈의 맺음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신 교훈들을 말합니다.
이 산은 신약의 시내산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산상수훈이 단지 설교나 강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법이라는 뜻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렇게 팔복으로 시작 된 산상수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가 자주 들어 본 말씀들은 거의 다 이 산상수훈에 들어 있습니다.
말씀의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는 것이 산상수훈인 것이죠.
그리고 오늘 말씀이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결론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인생 모두를 건축자에 비유하십니다.
집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우는 인생 전체를 말합니다.
살면서 이루는 세상에서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결과물들이죠.
집은 곧 나 자신입니다.
이 집을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각자가 지은 집 위에 태풍이 불고 홍수가 닥쳤다고 하십니다.
살면서 인생의 집이 무너질 것 같은 큰 일이 없으면야 좋겠지만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나 세파는 몰아닥친다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내 집은 흔들리지 않고 버텨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심판 날에 우리가 지은 집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을 집을 세우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두 건축자의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집을 지은 집터입니다.
비유 속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둘 다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큰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과 급류가 마을을 덮칩니다.
바위 위에 세워진 집은 견뎌내지만 약한 지반에 세워진 가옥은 바닥이 쓸려내려 가며 집은 속절없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철근골조가 엿가락같이 휘고 무너져 내린 건물을 보면 더 실감이 나죠.
여기서 비, 바람, 홍수는 삼중적인 강력한 파괴의 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종말적으로 있을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를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거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앞부분에서 불법을 행했다 평가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했던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그랬고, 오늘 비유의 등장인물들도 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는 데서 긴장감이 감돕니다.
성경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예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게 아닙니다.
그 분들이야 성경을 듣지도 않고 읽지도 않을 것이잖아요?
성경은 전도를 받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 또한 진지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얼핏 보면 앞의 산상수훈의 계명들을 지키고 행할 때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론을 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구원을 가르치시는 게 됩니다.
말씀을 이해할 때 항상 성경의 대전제, 기둥이 되는 진리의 기준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진리는 우리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신칭의’에 안 맞게 되는 것이죠.
어떤 신학자들은 이 비유의 말씀이 믿음만 강조하는 값싼 복음의 해독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행함과 책임을 강조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가 들은 말씀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그 앞에는 어마어마한 계명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5장부터 시작 된 산상수훈의 결론부라고 말씀드렸죠.
산상수훈의 말씀을 사실대로 보고 솔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계명을 지금 잘 지키고 있습니까?
원수가 사랑이 되십니까?
옆에 있는 가족들도 사랑하지 못하는데요.
남에 대한 비판을 한마디도 안하고 하루인들 살아지던가요?
나를 범죄 하게 하는 것을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찍어 내 버릴 수가 있을까요?
이것을 지켜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 쪽에 더 가깝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먼저 전제할 것은 홍수에 무너졌냐 안 무너졌냐의 원인이 집터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터가 반석이냐 모래냐로 집이 버티기도 하고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는 것이죠.
사람의 행위가 구원받을 만큼 될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가장 위험한 착각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도들의 행함이 견고한 반석이라는 것보다는 반대로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견고한 반석 위에 있는 성도들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할 수가 있다는 게 더 타당한 해석입니다.
인생의 어떤 풍파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든,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나를 단단히 묶어 둘 유일한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군가 내가 너의 반석이 되어 줄 테니 나를 디디고 서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엔 오히려 나를 밟고 서려는 사람들 투성이죠.
예수님이 모래 땅에 아슬아슬하게 인생 집을 짓던 우리에게 등을 내주시며 내 위에 네 집을 안전하게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자주 떠올립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해 주신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겨우 지시고 비아돌로로사를 걸어 올라 가시는 뒷모습을 자주 생각합니다.
때로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걸 느끼게 해주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무뎌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나를 위해 반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집이 지금 이 반석이신 주님 위에 세워지고 있나요?
이것이 분명한 사람은 마지막 날의 심판대에서 뿐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그런 굳건한 의뢰가 드러납니다.
나 자신과 내 행위를 토대로 인생의 집을 세워간다면 작은 비바람에도 터가 흔들리는 불안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얼마나 우리가 약해집니까?
내 계획이 좀 틀어지면 평정심도 깨져 버리죠.
예수님을 내 인격과 인생 집의 견고한 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과 내 집을 굳게 받치고 계시다면 이 세상의 크고 작은 태풍에서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뒤돌아 보면 어떻게 그 비바람과 거세게 덮치던 물살을 견뎠는지 아찔한 시절이 있습니다.
어떻게 거길 통과했는지 지금이라면 해 낼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이 내 인생집을 굳게 붙잡아 주셨듯이 앞으로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 붙드심이 마지막 심판날에도 우리의 일생의 모든 허물과 죄의 심판으로부터 견고히 받쳐 주심을 믿고 우리 일생에 주님 안에서 집을 짓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렇다면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엇이 달랐을까요?
기초가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둘은 똑같이 집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이 지은 인생 집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1) 먼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집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목적이 정해지고 행동이 정해지는 생활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력과 사회적 지위와 재산과 명예 같은 것으로 인생의 집을 세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는 인생평가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행했는지만 평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상수훈을 과연 지킬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계명을 하나만 골라서 지켜보려고 하면 이것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희망고문처럼 느껴집니다.
일단 산상수훈의 높은 가치 중에 사람이 본성적으로 가진 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인간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면 인간의 마음이 오히려 산상수훈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토저목사는 산상수훈의 팔복과 정반대인 부패된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대조해서 표현합니다.
가난한 심령 대신 지독한 자부심이,
애통하는 자 대신 쾌락을 추구하는 자가,
온유 대신 교만이,
의에 주린 자 대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말하는 자’가, 긍휼 대신 잔인함이,
청결한 마음 대신 부패한 상상의 산물이,
화평케 하는 자 대신 다투고 분개하는 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기뻐하는 자 대신 온갖 무기를 동원해 맞싸우는 자가.
이게 우리 안에 있는 본능적인 성향이 맞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의 계명들은 이런 본능의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계명과 우리의 본성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반석으로 믿는 우리에게는 이 두 평행선이 근본적으로 하나로 합의가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전에 없던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심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6백여년 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36장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 새 영, 새 마음을 주셨잖아요?이 새 마음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순복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하등 상관이 없고 지켜야 할 이유도 없죠.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모든 계명은 당연히 지켜야 하고 순종해야 할 절대적 권위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면 왜 내가 그 못된 인간에게 그래야 해?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원수라도 미워하고 나면 내가 괴롭습니다.
남을 험담하고 돌아서면 후회가 되고,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지 않은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가 절로 나옵니다.
‘죄송해요, 주님’이란 말이 하루 중 제일 많이 하는 말 같습니다.
성령께서 이 산상수훈을 십계명처럼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새 인격은 끊임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 없이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반면 옛 인격은 그냥 두어도 왕성하게 끓어 오르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우리의 삶이 매일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마음먹고 한 시간 뒤에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다시 또 결심하고 또 한 시간이라도 말씀대로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이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용서 못할 사람을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게 용서한 시간이 쌓여 갑니다.
다시 분노가 치밀 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버티고 지킨 그 시간 시간을 기록하십니다.
한 주의 피로감을 집에서 쉬며 풀고 싶지만 예배의 자리로 나온 오늘 하루를 기억하십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았던 그 순간이 내 집을 짓는 건축재가 되는 것이죠.
어떤 약점이나 기질적인 큰 단점은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더 힘듭니다.
말씀의 칼이 겨누지만 지키지 못해 늘 괴롭기만 한 것이죠.
그러나 극복하기 힘든 그런 문제들은 그런 자신을 보며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는 게 참 오묘한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가시와 같은 것이죠.
전 바울의 가시가 질병처럼 남들이 다 이해할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가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바울 인격 속에 취약점, 주님의 사역을 괴롭게 하는 어떤 결점 같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 약함 속에서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인 걸 알고, 그 약함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하기에 반대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에게는 밧세바의 범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가 결점이었습니다.
다윗에겐 성경에 기록된 아내만 8명이고 아들만 열아홉명 정도입니다.
사울왕에게는 오히려 한 아내만 있었고 그런 장황한 가족사가 없죠.
그 시대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중 다윗의 일생에 가장 수치고 아픔이었던 밧세바 사건을 통해 다윗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다 걸 깨닫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며 시편 51편을 지었죠.
다윗 노년에 몸이 차가운 다윗왕을 위해 젊고 아리따운 아비삭이란 여인에게 잠자리를 수종들게 해 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성경이 무심히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열왕기상1장4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왕이 결국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결점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이불 속에서 그 싸움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하나님은 성도들의 이런 처절한 싸움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우리 인생집이 대단하고 남들 보기에 칭송 받을 만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려고 애쓰며 한 시간씩 안타깝게 쌓아 간 것들만 보시고 그것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마일리지로 쌓아 올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집입니다.
그렇기에 며칠씩 기도를 하지 못했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도 그것으로 어색해서 멀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주님 앞으로 나가서 다시 그날부터 또 1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힘든 환경이 오랠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의 어떤 한 말씀이라도 붙들고 지킨다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감사하라’는 한 말씀만 계속 붙들고 지켜도 놀라운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이 땅에서 다 이뤄지기 보다 결국은 우리가 천국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평생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 지켜 견고한 인생의 집을 조금씩 지어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그렇다면 모래 위에 집을 건축한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것 또한 면밀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 사람도 집을 지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지었습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인생을 세운 것이죠.
왜 이들이 어리석습니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주님의 날이 온다는 사실에 대비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또 반석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복종할 뿐 아니라 이것이 나를 위한 계명이라는 것도 압니다.
말씀대로 사는 게 내가 행복하고 평탄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갈구하는 것은 끝이 없이 구하게 하지만 그 안에 평안과 만족은 없잖아요?
세상에 푹 빠져서 하루를 살고 나면 저녁에 남는 것은 밀려오는 공허감 아닙니까?
힘들여 죄를 물리치고 주님 말씀을 따랐을 때의 기쁨과 행복감이 더 크다는 걸 경험하면서 조금씩 더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래 위 건축자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말씀의 통제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걸 자유로 생각합니다.
설령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신앙적인 행위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거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도 또한 신앙생활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요소인데 그것이 바로 건축자의 비유 앞에 나온 말씀입니다.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구원과 심판의 날, 많은 사람이 심판의 판결을 받을 때 아우성을 치며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큰 권능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결은 단호하십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초면이라는 뜻입니다.
매일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열심히 주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지만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은 네가 언제 나와 관계 된 적이 있었냐고 하십니다.
그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듣고 말씀대로 순종한 게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도용한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모릅니다.
불법자들의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의와 자기 자신이 표준이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우리가 늘 죄인이라고 하는 게 세상의 도덕과 윤리면에 남보다 더 많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기준에 미달이고,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 죄의 바닥을 보기 때문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잖아요?하나님을 보아야 자신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인 사람은 무엇이 죄인지, 뭐가 부족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더 어이가 없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죠.
산상수훈에서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해도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빙상의 일각은 사소한 욕이지만 수면 밑에는 거대한 죄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죠.
그 뿌리를 볼 수 있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성도이고 삐져나온 빙상의 일각조차도 합리화하는 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비가 오면 쓸려 갈 모래 터에 집을 짓는 사람의 마지막을 욥기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욥기8장14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절,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인생집이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지고 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이미 성도인 우리에겐 이제 힘써 들은 것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1월 한 달 예수님의 말씀에서 듣고 지키자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첫 주에 염려하지 말자고 했는데 잘 지키고 계십니까?
코넬대학 심리학 연구팀에서 고령자 1500명을 대상으로 해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사람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염려하면서 살았던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네가지 밭의 비유, 광풍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처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죠.
오늘 말씀은 이것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주일설교에서 깨달은 한 가지를 한 주간 지켜나가는 게 좋습니다.
매일성경에서 묵상하며 깨달은 것을 하루 지키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지키는 것도 좋습니다.
닥치는 대로 지키면 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각자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한주간 잘 지켜 멋진 집을 또 세워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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