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6장25절-34절)

남수연 2022. 1. 6. 15:32

https://www.youtube.com/watch?v=LHD4qY_L5lE 

새해 첫 주일예배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께 올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새해는 맞이했지만 설렘이나 기대 같은 것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혜서는 이미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지루한 인생의 날들을 관조했죠.

우리의 관심은 새 날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해 소망하고 기대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올해는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실까,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어떤 일을 이루실까 하는 것이죠.

반면에 우리는 또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할지 새해 주시는 말씀에 잘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은 올해도 먹고 사는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 없이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이미 염려할 것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죠.

인생의 여러가지 염려를 사람들 틈에 사셨던 주님께서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먼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말하는 긍정주의나 낙관론으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마음으로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만도 좋은 것이지만 그 생각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장이 담긴 말씀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죠.

또 미래에 대한 사려 깊은 예측이나 거기 맞춰 준비하는 신중한 생활을 하지 말라시는 게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무책임한 게으름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잡다단한 삶을 무시하고 누구나 기본 생계만으로 만족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각자에게 개성과 재능을 다르게 주셨듯이 돈을 버는 능력과 가진 정도의 차이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평등하게 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근본 하나님의 뜻이지만 죄로 인해 모든 게 어그러진 현실세상에선 그렇게 단순히 회귀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갖게 된 막강한 죄의 인격성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적용하면 현실과 괴리감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은 물질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마음속에 한 짐씩 지고 있을 돈 걱정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 근심 중에 제일 큰 부분도 물질의 문제일 것입니다.

가난한 군중들이 예수님께 구름떼처럼 몰려 왔는데 당시 폭증한 메시야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메시야 시대가 되면 가난이 청산되리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오늘 새해 물질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해 재정 문제가 녹록치는 않으실 것입니다.

지난 주 기사를 보니 작년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65%라고 나오더군요.

백명 중 서른 다섯명은 직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들이 어디 가서 돈을 벌어 생계를 감당할지 참 안타깝죠.

빨리 취업해서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할텐데요.

사람한테 돈 문제만 해결되어도 인생의 큰 짐은 벗는 것이잖아요?

오늘 본문 말씀은 개별 설교가 아니라 앞에서부터 이어진 설교입니다.

제가 좀 전체를 아울러 말씀을 드릴 거예요.

우선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을 다룬 앞 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1) 돈에 대한 염려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느냐 재물을 섬기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돈이 어떻게 취사선택의 문제냐 생각되죠.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못하면 구원이든 염려의 문제든 사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주인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지를 우선 내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속의 갈등은 하나님도 포기할 수 없고 돈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겠죠.

그러나 성도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하나님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지만 돈이 어떻게 우리 인생과 내세를 책임지겠습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돈이 많은 부자도 항상 돈에 대한 생각과 염려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또 인생의 문제가 돈에만 국한되지 않잖아요?

돈 많고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큰 고민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2) 이 세상의 재물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관할하십니다.

학개2장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50편10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절,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사무엘상 2장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 말씀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세상의 물질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잖아요?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돈을 좇아가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시겠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은 우리의 돈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걸로 우리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만큼 애착을 갖는 걸로 믿음과 죄의 문제를 풀어 가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생계에 대한 책임이 창조주이신 자신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 굶어 죽는 피조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불명예입니다.

그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예요.

만일 하나님이 생계에 실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나를 믿고, 생계문제는 너희 힘으로 열심히 해결해라’

그렇지 않으셨겠습니까?

우리한테도 그게 차라리 더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고 자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생명과 몸이라는 기적을 주셨는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들을 당연히 주시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생계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사실인즉 생명과 신체를 주신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몇 가지 주변에 있는 조연들을 끌어 들이십니다.

마침 날아가는 새를 가리키시고, 근처 풀숲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가리키십니다.

공중의 새들이 굶어 죽지 않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만일 새들을 하나님이 먹이지 않으신다면 아침마다 일어나면 죽은 새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것입니다.

새들은 씨를 뿌리고 농사짓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밭의 일부를 새의 식물로 주셨습니다.

새는 자기들이 수고하지 않은 곡식을 당당히 물어 갑니다.

그래서 어린 새끼도 먹이고 어미 새도 먹고 아름답게 창공을 날아다니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것처럼 이미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도 그렇게 먹여 살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에 부치게 일하고 애 쓰는 것으로만 돈을 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손에 일감을 주시고 돈을 쥐어주셔서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염려함으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찌 조금은 그럴 수 있다해도 반대로 새어나가는 돈은 어쩌겠습니까?신기하게도 수입은 항상 먹고 살만큼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적정선에서 정해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더 벌려고도 염려할 필요도 없고, 내일은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노후대비를 전혀 못했는데 어떡하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 몫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믿고 매일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자꾸 집착하는 것은 사람의 허영심이 한 몫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좀 멋있게 살려면 돈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이 들죠.

왜 적은 수입, 적은 돈으로 멋있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요?

돈 있는 사람만 멋있게 살 수 있게 만들지는 않으셨을텐데요.

저는 신자들의 관점은 달라야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 내 능력을 증명하고 세속적으로 멋지게 사는 내 모습을 보여주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세속적인 생각들을 점점 신앙의 기준으로 바꿔가는 작업이 많이 필요합니다.

피조물이 가장 빛나고 영광스러운 때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안에 있을 때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들에 피어 있는 꽃을 들여다보면 그 작은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치장한다 해도 그냥 비싼 옷을 두른 죄인일 뿐입니다.

꽃이 아무리 봐도 완벽한 것은 창조주의 완벽함 때문이고 꽃은 죄가 없기 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좋은 옷을 입어봤자 미소 짓는 그 얼굴 뒤에 꿍꿍이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적은 수입,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 중에도 멋있게 살 수 있는 답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들에 핀 꽃처럼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면 우리는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허영심으로 온갖 비싼 것을 휘감고 산다고 해서 존귀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보여지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임을 알고 내 삶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시고 영의 아버지되심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할 때 우리는 빈부여하에 상관없이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주시면 감사하게 이웃과 나누고, 아직 빠듯한 재정으로 살라하시면 슬퍼하지 말고 소박한 중에도 정갈하고 거룩하게 살면 얼마든지 멋지게 기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2.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이 3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새해 이런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1) 이 것은 지나치게 의식주 문제에 치우치지 않도록, 내가 영원히 살 나라에 꾸준히 삶의 목적을 맞추어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내 믿음을 위한 일들을 우선으로 하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사소한 일을 하느라 이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잠깐 이것만 보고하려다가 또 중요한 걸 못하고 하루가 낭비됩니다.

세상의 재미는 그다지 나쁜 일들은 아니지만 사소한 일들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사소한 일에 성도들이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종이 인형을 오리고 있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런 아인슈타인을 보고 ‘당신은 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죠.

그러나 돌아서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할 것입니다.

‘세계 6대 천재가 종이 인형이나 오리고 있다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역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물론 믿음이 어린아이 같을 땐 성경인물에 색칠도 하고 스티커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장성해서도 성경에 스티커나 붙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죠.

오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경건하게 살 힘이 있지만 사소한 세상재미의 그물에 걸려서 한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사소한 일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2) 구체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본문 앞에서 예수님의 자세한 설교를 전개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하라는 의는 여기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로 거듭난 성도들이 삶에서 드러내는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 의인이다, 악인이다’ 식별할 수 있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앞에서 세 가지로 정리해 주시는데,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구제는 이웃을 생각하고 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웃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가치 있는 구제는 물론 복음을 전해서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얻게 도와주는 것이죠.

이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기회가 되는대로 실천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구제는 형제사랑을 구체화 시킨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냐고 하면 추상적이라 계량하기가 어렵잖아요?구제를 했냐 안했냐로 따지면 계측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 앞에 나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면되냐고 묻던 부자관리 생각나십니까?

스스로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한 가지가 부족하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죠.

눈으로 보여 지는 형제사랑이 구제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죠.

소소하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이웃에 베푸는 그런 습관은 우리 마음도 늘 따뜻하고 부드럽게 유지하게 합니다.

저희 아파트가 오래 되었는데 요즘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옥상으로 다섯 층을 걸어 올라가서 옆 라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다니느라 좀 번거롭습니다.

지난 주에 바로 우리 집 현관 앞에서 작업을 하는 바람에 굉장한 소음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날씨도 추운데 종일 온기 하나 없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했습니다.

얼른 뜨거운 커피를 내려서 빵하고 같이 갖다 드렸더니 그렇게 고마워하더군요.

형제사랑은 내 불편과 부족함만이 아니라 상대의 고충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연자권사님 식당에 가보면 항상 일없이 누군가가 와서 앉아 있습니다.

권사님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늘 커피 한 잔 해라, 들어와서 좀 쉬었다 가라 그래서 그런 것이죠.

조금만 마음써서 함께 행복을 나누는 구제를 올해도 계속 해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다 계산하고 계시다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나라를 위하고 내가 그 국민답게 살아가는 데 필수입니다.

그 중요성은 뭐라 더 강조할 수가 없습니다.

구제가 형제사랑이라면 기도는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가장 행복한 나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것에서도 기도는 염려를 극복하고 염려를 풀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기도는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오는 것을 정말 즐거워하시고 행복해 하십니다.

스바냐서에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올해도 이 소중한 기도가 적어지지 않도록 하루 생활에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시간을 확보해야겠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만 죄의 세포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이 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 죄가 아니지만 항상 과도한 탐욕으로 향하죠.

때때로 그런 세상적인 욕구와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 왕성해 지는 것을 미리 미리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저도 가끔씩 세상에서 단순히 즐기는 것들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 미디어도 금식이 필요하고 소비에도 금식이 필요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를 말씀하시되 이것을 자기의 의나 체면을 위해 밖으로 드러내 자랑하려는 본성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의도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새해에 믿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생활을 위해 이 세 가지를 잘 기억하고 실천해 나가길 축복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의 염려의 문제를 미래에 까지 확장시켜 보장하십니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듯이 내일도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안에는 오늘 감당해야 할 짐이 있고 불평스러운 상황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견디고 헤쳐 나갈 지혜와 은혜를 주십니다.

내일도 마찬가지죠.

내일 발생할 염려와 근심거리에는 거기에 따른 공급과 힘도 따라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내일 주시는 힘으로 사는 것이지 오늘 믿음과 오늘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내일의 문제를 미리 댕겨서 염려하는 것은 오늘 감당할 괴로움의 짐만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일이 되어야 염려할 문제도 주시고 염려를 이길 힘도 주십니다.

예레미야애가3장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한꺼번에 모든 일을 생각하면 이러다 죽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한번 도와주고 마는 게 아니라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자와 긍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그러실 수밖에 없는 큰 성실하심 때문인 것이죠.

하나님이 내일은 그 마음을 바꾸셔서 변덕을 부리시고 ‘이제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는 내일의 걱정이 없어야 오늘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일 걱정거리가 없다고 해서 내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일 걱정거리가 분명히 없는데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염려되는 건 마찬가지더군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내일 일을 염려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측되는 내일의 문제와 오늘 감당할 문제들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살아가는 올해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루하루 생활을 성실히 감당하고, 하나님이 돌보실 부분을 믿고, 네가 돌볼 부분만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백 억 명을 구원하신다 해도, 그 중에 나 하나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시고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대로 염려하는 습관을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습관으로 바꾸어 가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또 이 땅의 문제에 집착하면 염려도 더 많아집니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추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십니다.

그것은 구제, 기도, 금식이라고 간단히 외우시고 매일 실천하면 잘 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얻게 되는 값진 은혜들은 마트에 가서 장보듯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돈 조금내면 되고 TV만 틀어도 얻을 수 있지만 은혜는 그렇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알곡을 얻기 위해 농부들이 땀 흘리며 꾸준히 땅과 식물을 돌보듯이 끊임없이 진심을 담아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위해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염려일랑 하나님께 맡기고 세상적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고귀하고 값진 하나님자녀라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히 살아가는 한해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