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8장1절-13절 (산 아래 하나님의 나라1-백부장의 믿음)

남수연 2020. 11. 24. 22:19

www.youtube.com/watch?v=_PpCsNUqZ5M&feature=youtu.be

지난 주까지 산위에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시죠.

산상수훈이 선포 된 하나님나라라고 한다면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나라가 땅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산상수훈이 이론이라면 본문은 실물인 것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누가복음11장20절에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도 이미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나라를 잘 배워야겠습니다.

성경에서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나라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우선 예수님의 병 고침과 이적들의 의미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쫒아 내주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죠.

오늘 본문에도 두 명의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 본문에서 ‘병 낫기를 기도하자’, 혹은 ‘주님께 문제 해결을 구하자’는 교훈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사도가 산상수훈을 마친 뒤 산 아래에서 일어난 병고침의 사례들을 기록한 것은 산상수훈이 이뤄지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사실 본문 말씀을 병들었을 때의 기도에 적용하면 보편적 상황과 맞지 않죠.

기도한다고 나병이 낫고 중풍병이 낫지 않잖아요?

또 주님은 메시야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적을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본다고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닌 걸 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까워 오자 기적을 보고 열광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잖아요?

그렇기에 주님은 병을 고쳐주신 다음에 가서 알리라 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을 명령하시죠.

오늘 나병환자에게도 입 다물고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판정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적은 죄인의 구원자 메시야로 오셨기에 당연히 동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셨다면 죄의 결과인 사망이 제거 되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사람이 죄의 결과로 받은 심판은 사망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인 영적인 사망, 영원한 심판의 상태가 된 것이죠.

그리고 육체에도 죽음이 선고되었고 질병은 이 모든 사망의 전조증상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질병입니다.

그렇기에 나병은 완치되기 까지 공동체 밖으로 추방해야 할 유일한 질병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쫒겨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오셔서 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은 쫒겨난 하나님 나라로의 복귀와 같은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죄의 결과인 영적 사망에서 다시 영생의 상태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속한 지금 성령의 내주를 통해 이미 영생의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 사망의 전조증상인 질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그 뿌리가 되는 사망이 사라졌다는 걸 보여주시는 것이죠.

누가복음에서는 본문의 병고침 사건 바로 뒤에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이적을 붙여 놓았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마태사도는 주님의 병 고침과 귀신 쫒는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17절에서 정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메시야가 죄인들에게 내려진 징벌을 해결해 주신다는 예언입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그것을 대신 담당하고 짊어진다는 것이죠.

짊어지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대신 당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그 몸으로 담당해 주셨잖아요?

제가 요즘 충치가 생겨서 치과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병원 가는 게 싫지만 치과는 특히나 더 가기 싫잖아요?

마취 주사를 맞고 기다리는 데 마침 창밖으로 하늘이 넓게 보이더군요.

곧 드릴로 갈고 긁고 할 생각을 하니 손에 땀이 나고 의사가 실수 없이 치료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치료가 목적이고, 안 아프게 하려고 이렇게 마취까지 하고도 겁이 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생으로 못이 박히셨다 생각하니 기가 막힌 거예요.

너무너무 끔찍한 고통이잖아요?

‘주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런 말이 속에서 계속 나오는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 마치 주님께서 괜찮다 이러시는 것 같은 거예요.

이것은 신비로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게 아니라 제가 평소에 성경과 삶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데서 오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내가 고쳐주고 싶다,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알 수 있잖아요?

잘한 게 없어도 예수님의 고난이 나를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서임을 진심으로 믿기만 해도 주님은 기쁘게 여기시고 만족하십니다.

속도 상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눈물을 좀 훔쳤습니다.

뒤에 있던 간호사가 좀 당황하는 것 같더군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이 구원을 죄인들이 얻게 되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그걸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집니다.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 옷자락을 만져 나았을 때, 주님이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말씀하잖아요?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죄의 결과 죽음을 통과하게 된 몸과 질병의 문제는 본문처럼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원리들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이런 눈에 보이는 기적이 필요했지만 성경에서 설명이 끝났으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의 기적을 그대로 현실 믿음의 안내자로 삼으면 큰일 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신앙은 점점 정로를 벗어나 신비주의라는 미혹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약초를 주셨고,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만들게 하시고 백신을 만들어낼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선 건강하게 내 몸을 관리하고 병이 나면 이런 의술의 힘으로 치료하면 됩니다.

다만 그렇다고 치료가 보장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도하는 것이죠.

약이 치료하지 못하고, 의술이 치료하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면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녀가 되었잖아요?

육체의 죽음조차도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이제는 영화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바르게 따라가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 내 잘못과 죄로 인한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이전처럼 죄를 예사로 짓지 못하잖아요?

그렇기에 이전처럼 늘 머리를 싸매고, 분노가 치밀고, 사람관계에 휘말리고, 예기치 않은 재정악화로 타격을 받고, 그런 일이 점점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저절로 점점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점점 삶이 간결하고 단순하게까지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천국의 백성임을 항상 인식하고 이론으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법을 산 아래 이 땅에서 즐거이 지키며 살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2.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경우는 자기의 병이 아니라 종의 중풍병을 주님께 치료 받습니다.

이 치료의 의미도 나병환자의 치유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에게서는 믿음의 구체적인 증거들이 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훈을 삼아주셨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크게 놀라시죠.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이기에 우리 믿음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잘 믿고 싶지 대충 믿고 싶은 분은 없으시잖아요?

백부장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5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버나움은 주님의 동네인 나사렛에서 약 30킬로 떨어진 곳으로 로마수비대가 주둔해 있던 행정 중심지이고 세관이 있던 큰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거기에 주둔하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오지 못하고 유대인 장로들을 대신 보내서 요청한 것으로 나옵니다.

마태는 긴 설명을 생략하고 사건의 핵심만 기록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리인을 빼고 직접 예수님과 백부장이 대화한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을 참고로 하시면 좋겠습니다.

백부장은 중풍병으로 죽어가는 종을 살려내기 위해 예수님께 고쳐주시길 간청합니다.

백부장도 역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건강하게 회복된다는 것은 의술이 발달한 요즘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미 여러 신경부위에 손상이 와서 완치가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어진다는 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흔쾌히 가서 그 종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돌아온 백부장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놀라셨다는 기록은 여기 외에는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놀라실 일이 뭐가 있겠어요?

사람을 다 아시는데.

우리만 해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에 대해 별로 놀랄 일이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했다 해도 ‘죄인이 다 그렇지’ 별로 안 놀랍니다.

우리 동완이나 단우가 혼자 지하철 타고 교회 왔을 때 조금 놀라죠.

예수님이 너무 놀라셔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혹 예수님께서 ‘오’ 하고 놀라실 때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신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백부장 정도면 적어도 당시 예수님보다 나이가 더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백부장의 지위면 지배국의 로마인 장교이고 예수님은 식민지의 유대인 청년이셨습니다.

이걸 생각해보면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건 굉장히 이변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어느 정도 난 상태이지만 제자들조차도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크게 놀라신 거예요.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8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흔쾌히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할 때 방문을 극구 사양합니다.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자기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접견할 자격조차 없는 자라는 송구함이 철철 넘치잖아요?

가버나움에서 백부장보다 더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것은 백부장이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 사람인지를 말해 줍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백부장이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을 사랑했고 회당까지 지었다고 전합니다.

회당에서 성경을 듣고 배워 하나님을 경외해 왔던 것이죠.

진짜 좋아하고 흠모하는 귀한 사람이 온다면 내 집이 누추하게 느껴지죠.

어릴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 오신다면 참 난감했습니다.

백부장에게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특징이 아주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제일 마음이 상합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벌을 받을 것 같다는 그런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이신지 알기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이지만 한편 좋아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무슨 프로인지는 모르지만 얼핏 조용필씨가 후배 가수들과 방송국 대기실에서 만나는 장면을 TV에서 봤는데요.

쟁쟁한 가수들이 조용필씨가 눈앞에 있다는 게 현실이냐며 진짜 감격해 눈을 떼지 못하더군요.

다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서서 가황을 눈으로 보는 것만도 황송해 하는 걸 보았습니다.

한 유명 가수는 말을 더듬으면서 자기 아버지께 드리게 사인 한 장 해달라고 황공하게 부탁을 하더군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크고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저절로 삼가지만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시골의 허름한 교회 예배당에 들어갈 때도 옷매무새를 다듬고 허리를 낮춘다면 그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탈리아 장교 고넬료에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며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10장35절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무수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배우라고 하시죠.

신명기14장23절,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나 자신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가르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백부장은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심을 믿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이 말씀만 하면 저 너머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병든 종이 벌떡 일어날 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 만물이 다 예수님의 수하에 있는 피조물이고 종이니 당연히 순종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말에 크게 놀라셨습니다.

대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메시야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을 백부장이 깬 것이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는 하나님과 동등한 창조주의 주권을 가진 분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백부장이 질병이나 다른 피조물만 예수님께 순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도 당연히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복종해야 할 종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백부장은 이미 팔복의 가난한 영을 가진 사람이 분명하죠.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지 자기가 무엇을 계획하지 못합니다.

너무 계획을 세우고 목표 잡는데 강박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루터는 사람이 무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으신다는 통찰력 있는 말을 했습니다.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간 자에게만 주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을 믿지만 주님의 주인 되심에 대해서는 은근히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게 분명한가요?

오늘 백부장과 그가 사랑한 죽어가는 종과의 관계에서 묘하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중첩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혹시 누군가를 도와줄 때 자기의 가용 범위 안에서 돕습니다.

제3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까지 남을 도와줄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여겨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내 문제를 아버지께 중재해 주시잖아요?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내 편이신 중보자이십니다.

종 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충성입니다.

요즘 사회를 저충성사회라고 하죠.

어디서도 고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풍조가 신앙 안에도 들어와 주님에 대한 충성도 역시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정말 충성스런 종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께선 우리가 충성한 그 이상으로 평생 보상해 주시며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산상수훈에 선언 된 하나님나라는 오늘 산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오늘 나병환자나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그냥 통째로 믿으면 되요.

백부장에게서 보여진 믿음이 내게도 있는지를 오늘 잘 점검하시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도록 나 자신을 가르치는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섬기길 원합니다.

주님은 백부장이 이런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쑥 들어오는 것을 보시며 예고하시죠.

11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우리가 동 서로부터 주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은 천국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은 먼저 믿은 성도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동서로 흩어져 복음을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중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서10장14절,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은 이 복된 소식을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 전하고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이런 사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험악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을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죠.

이 사명을 주님 앞에 가기까지 감당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가까이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들을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멀리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죽음의 땅으로 선교사를 보내고 지원하며 이 사명을 감당할 때 교회와 성도들이 복됩니다.

우리교회가 작지만 창립 초기부터 꾸준히 이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코로나상황에서 다들 힘드실 텐 데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정성껏 추수감사헌금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운영위원회에서 상의해서 이 코로나 상황에서 추수할 것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선교지를 위해 나눠서 쓰기로 했습니다.

정성을 모아주신 우리 성도님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