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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다섯 번째 말씀을 나눕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세워진 지상의 하나님나라 출범식입니다.
산상수훈 전체를 조망해 보면 천국시민들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된 것은 이름만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무언가가 실제로 우리 영에 들어와 새 본성으로 새겨진 것입니다.
자연적인 본성이 사라지지 않듯이 하나님의 생명인 이 새 마음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아 온 천국시민의 모습이 내게서 점점 선명해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팔복을 시작하셨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여’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충만히 누려도 내 본질적인 죄성을 알기에 심령은 항상 가난해 있는 것이 천국 백성의 마음입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말씀도 그렇습니다.
기도라면 자신 있으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기도에 숨어 있는 덫에 대해서 알려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한 기도, 공로주의적 기도, 인격이신 하나님께가 아니라 막연한 신에게 치성 드리는 기도, 땅의 의식주에만 치중한 기도.
우리 기도에 그런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말씀이죠.
나의 기도가 가난한지가 진실한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 기도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1. 기도는 천국 시민답게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천국의 자녀들에게는 세상과 다르게 특정 된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산다는 것이죠.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은 구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 기도해서 받으며 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선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사는 게 정해진 규정입니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가 있겠죠.
1) 왜 성도들이 기도로 살아야 하는지는 앞에서 예수님이 이미 포석을 깔아 놓으셨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 전체를 읽어보면 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 사이사이에 다른 집단을 계속 언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 ‘외식하는 부류들’, 그리고 본문 바로 앞에서는 ‘개’와 ‘진주를 짓밟는 돼지’에 비유 된 자들입니다.
이 땅 하나님나라엔 성도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그 속에는 우리 안에서 이 외부세력에 은밀히 동조하는 본성이라는 내 안의 적도 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엄중한 실상입니다.
악한 본성의 질긴 뿌리에다, 보이지 않는 적들까지, 어떻게 우리가 이것들과 싸워서 복스러운 하나님나라를 내 안팎에 세워갈 수 있겠어요?이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아군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사실 새 영을 따라 살아야 하는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매일 육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셨다면 그냥 산 거예요.
그게 하루는 표시 안 나고, 일주일은 표시 안 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매일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 천국시민이 사는 방식입니다.
앞에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내용을 보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때로 이런 하나님의 방식에 의문이 생깁니다.
왜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켜서 스스로 해나가게 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기도든, 경건의 능력이든, 신앙적 지식이든, 하나님을 의존해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든 내 안의 죄성에 이용당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갈고 닦은 자랑스러운 종교 실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다 망한 것입니다.
사람이 쌓는 의와 힘은 마귀에겐 한입 거리 밖에 안됩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파멸하는 걸 보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나 싶잖아요?
이 땅의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안팎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고 이 땅의 하루를 천국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은 하루는 저절로 평화가 깨집니다.
베드로전서 4장7절 말씀이 경각심을 고조시켜 주십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오늘 다시 복된 기도의 자리를 되찾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은, 이 땅의 결핍을 기정사실화 한 것입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인생은 쉴 새 없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림의 연속입니다.
지난 한 주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구하고 찾다 오셨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이후의 터전은 모두가 부족하고 결핍되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만족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자들도 부족함 없이 가졌다는 생각이 안 들기에 계속 재산을 불리려하죠.
물질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 육체적 결핍 속에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상처 받고 사랑에 한번 배신당하고 나면 아무도 나를 변치 않고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압니다.
의지했던 가족에게서 그런 걸 느끼면 마음에 찬바람이 지나가죠.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전에 팬텀싱어에 나온 존노형제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얘기를 하며 눈물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학교에서 동양인은 자기 한명이었다는 것예요.
그때는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고 합니다.
어린 고등학생이 내일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아침을 두려움으로 맞았다니 그 외로움과 학교생활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를 말해주죠.
결승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밤새 잠을 못 이룬 자신에게 저 별빛은 또 하루를 재촉한다는 그런 가사가 있더군요.
눈을 뜨기 두려운 아침이 있죠.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힘들어서, 또 똑같은 권태로운 하루에 짓눌려서, 오늘도 쇠약한 몸을 일으켜야 하는 낙망에, 행복보다 불행한 감정이 먼저 찾아올 때.
저는 힘들었던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나님아버지께 제 마음을 향하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성령님께서 하늘의 복된 마음을 충만하게 리필해 주시길 구합니다.
그래야 또 하루를 주심이 감사하고, 부담되는 하루도 가벼워지고, 행복감이 채워집니다.
중간에 묵직한 마음이 들 때도 그걸 수시로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없으셨다면 아마 저는 허무주의자가 되었을거예요.
하나님만이 어떤 종류의 결핍이든 만족하게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 기도 응답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있음을 주님이 강조하십니다.
9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절,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절묘한 비유시잖아요?
악한 인간도 자기 자식은 애지중지 키우는데, 하물며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키우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댈 곳 없는 외로운 고아가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전능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내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이해하기가 힘들죠.
거룩한 천사만도 못한 우리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의 필요에 열정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 기억나시죠?‘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신 것을 내가 알고 있나이다’
아버지께서 항상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보시기에 우리말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의 말은 늘 주의 깊게 듣잖아요?
제가 조심스레 알아가며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예수님과 똑같이 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예요.
혹시, 정말 똑같이 보시나?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듯 그렇게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나 이런 생각이 조금씩 듭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마지못해 용납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 때를 벗기시고, 죄를 제거하시고, 예수님처럼 흠 없이 만드시려고 우리와 씨름하고 우리를 가꿔 주시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기도를 통해 경험적으로 더 깊이 알아집니다.
기도하지 않는 상태로 인격이신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귐으로 아는 것은 다르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아버지는 구하기 전에도 너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다 아신다’
이 말씀만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매일 하나님께 나가고 결핍 된 것들을 구하시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알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기도해도 응답을 못 받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응답을 안 하신다면 오늘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죠.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응답하셨지만 우리는 내가 원했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하면 구한 것대로 주신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했고, 그동안 좋은 것으로 응답받으며 산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기도는 이변이 속출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이 복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하고 찾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렇다면 기도의 실제적인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문제는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기도를 바르게 잘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합니다.
때로 독백 같은 기도를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기도가 제 입에서 나와 제 귀로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또 기도시간을 다 채우는 동안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도 말들이 자동적으로 계속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기도에 슬그머니 섞이는 죄가 얼마나 웃기는지 아십니까?
어느 날은 기도가 잘 되잖아요?
그 순간 내 기도의 멋짐에 내가 감탄하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그 순간을 딱 보실 때 나도 순간 뜨끔하죠.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냐보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하고 있냐를 보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 맞는 거룩함을 키워가는 데는 손쉬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죄지으며 내 맘대로 사는 게 제일 쉬운 것 같아요.
‘죄 짓는 게 제일 쉬웠어요’ 인 것이죠.
설령 그 결과로 상당한 고통을 맛본다 해도 사람들은 손쉽게 그걸 택합니다.
그로 인한 결과에 팔자 탓을 하고 원망 불평하며 삼손처럼 무거운 연자 맷돌을 평생 돌리는 고통의 삶을 미련하게 살아도 차라리 그걸 택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화평과 기쁨과 사랑이 지속되는 분위기를 더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본성대로 뒹굴며 사는 게 제일 편한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모든 거룩한 결과물은 다 거저 얻어지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것도 꾸준히 하려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기도 역시 훈련과 노동이 동원 되야 하는 면이 아주 많습니다.
이 노동을 기쁘게 감당하고 열심히 훈련하고 지속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안하는 것보다 기도하면 더 좋은 열매와 결과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쁘게 되잖아요?
잘 모르실지 모르지만 지금 삶의 혼돈과 불행이 대부분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기도는 숨 쉬듯이 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방해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본문 뒤에 신의 한수를 덧붙여 주십니다.
11장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기도의 핵심적인 역할을 성령님께서 해 주십니다.
신앙경력이 오래 되고, 기도생활을 꾸준히 하는 성도님들께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감이 오질 않아서 막막하고 힘듭니다.
마치 상대방이 끊어버린 전화에 대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상대가 말없이 듣고 있는 것과 상황이 다르죠.
우리의 기도는 대화와 교제의 측면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인격의 실재감이 가려지면 기도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백팔 배, 삼천 배, 기도문을 하염없이 외우는 묵주기도,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항상 성령님이 새마음을 충만케 하셔서 하나님과 잘 접속되어 있게 해주시길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보좌 앞으로 데려가시면 그때는 무엇이든 진실하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에베소서 6장18절에서 이 내용을 가르쳐 주시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신앙 연륜이 적은 분들은 더 기도가 힘들죠.
기도해서 받는다는 게 좀 억지 같다는 생각이 들고, 기도하고 기다리느니 내가 해 버리고 말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기도가 단지 필요한 걸 구하는 게 전부가 아니죠.
기도는 사실 스킬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아서 기도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신자도 기도해야 믿음이 바르게 잘 성장합니다.
새신자들은 성경말씀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될 때까지 잘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똑바로 판단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도 성령님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확신이 없는 성도님들도 역시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오시길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인격에 오신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공장에서 만든 모조 꽃과 생화 같은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계속 기도하시면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4.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앞에 기도에 대한 말씀과 잘 이어지지 않는 말씀 같죠.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땅의 천국은 서로 대접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대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잖아요?
자신의 아들을 주셨고,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령을 주시고 결핍 된 삶을 기도할 때 신실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 대접을 받은 성도들은 서로가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서로가 대접하는 곳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내가 대접 받으려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서로가 대접하기 때문에 결국은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 대접 받게 됩니다.
천국에 불행한 사람이 없듯이 이곳 하나님나라에서도 모두가 행복하길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시죠.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 대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으니까 두 개가 같다는 말씀입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신자들의 처세술을 가르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말을 더 실용적인 대접하라는 말로 바꾸신 것이죠.
사랑이 대접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선언 된 이 천국에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천국이겠습니까?
교회도 가정도 일터도 이렇게 서로 대접하면 천국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독특한 사냥방식이 책에 소개 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젊은이들이 나가서 사냥을 하는데요.
사냥한 고기는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부족원들에게도 똑같은 양으로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왜 집에 있었던 노인들의 고기양이 목숨을 걸고 사냥한 당신들 고기하고 똑같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길 저 노인들이 과거에 사냥해서 우리에게 똑같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몫을 주냐고 했더니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 아이들이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똑같이 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접받은 대로 우리가 서로를 대접한다면 이런 삶일까요?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제까지 살펴 본 산상수훈의 천국시민답게 살지 못합니다.
팔복의 마음은 본성 아래로 가라앉아 힘을 잃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고 세상에 밟히는 처지가 됩니다.
세상은 위험하고, 이것저것 결핍되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기도로 구하면 천국의 자녀답게 살 수 있고,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공동체의 모든 분들을 잘 대접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도 잘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매주 마다 뭘 그렇게들 가져와서 나눠주시는지 정말 너무 은혜롭습니다.
대접하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짜 잘 지키고 계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절로 되는 것만 진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써서 행하는 것도 진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우리는 이 땅의 천국인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중받고 위로 받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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