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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코로나19 상황 중에도 풍요롭고 평안하게 명절을 보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까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인도하시는 과정은 우리들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의 역사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정교하게 손질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성 설교를 듣는 것처럼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오늘 나눌 ‘팔복’에 대해서는 많이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도 요즘 출애굽기에서 배운 내용과 맞춰보면 말씀의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말씀은 최대한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에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본문 산상설교는 시내산 언약에 비춰볼 때 의미가 더 잘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마태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분인 마태사도가 기록한 성경이죠.
그리고 또 한 분의 공동 저자가 있는데, 그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할 나위 없이 지혜롭게 이 성경을 기록해 놓으셨겠죠.
마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리는 이 복음서를 쓸 때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가 구원에 대한 것이잖아요?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메시야로서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물을 신앙의 원리에 맞춰 상징화 시켜 놓은 것이 많습니다.
시내산, 시온산 같이 ‘산’은 하나님이 현현하시고 임재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셨다고 하죠.
반면 바다는 사탄과 불신앙의 세상을 상징합니다.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왔다는 표현 같은 것도 이런 상징성을 알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도 이런 상징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특히 이것은 구약성경에 있는 특별한 에피소드를 소환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 산에 계셨던 시내산 사건이죠.
시내산의 언약 장면과 관련해서 보면 이 산상수훈이 단지 설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이것은 새언약을 맺고 다시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이고, 하나님 백성을 세우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내산 언약과 팔복 선언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기엔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국민이 있고, 영토가 있고, 법이 있고, 구원과 축복이 있는 것이죠.
1) 먼저 시내산과 팔복산에서 약속하신 복의 관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신명기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에게 주실 복을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죠.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
너무 좋잖아요?
왜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오늘과 달리 이런 땅의 복을 약속하셨겠어요?물론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땅에서 기름진 버터와 꿀을 먹이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도 영생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의 구원을 주변 나라들에 보여주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속죄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내려 오셔서 사람들의 죽은 영을 아직 살리실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가 올라가야 성령이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구약시대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춘 일상의 율법을 주셔서 죄 짓지 않고 법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보상으로 세상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믿음을 지켜가게 하신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약속하신 이 복과 오늘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많이 다르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할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구약과 신약의 복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쪽을 고르시겠습니까?
성도들 중에도 속으로는 구약시대 복을 고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으로는 하늘에 속한 복보다 땅에 속한 복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니 사람들이 좋아하질 않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로마의 학정과 착취에 허리가 휘어지는 데 거기다가 애통하고 박해받는 복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걸 누가 복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당시 모세오경의 복이 아닌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고 제사장들이고 세리이고 죄인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 메시야가 가져올 복은 무조건 구약에 약속했던 그 복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얘기를 안 하시니 사람들이 다 떠났잖아요?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에게 그러셨잖아요?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 한국교회는 분명히 신약의 교회인데 산상설교의 복이 아니라 시내산의 복을 전파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구약시대의 복을 선포해 주고 그런 축복의 말을 하지 않으면 골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사들이 그 얼굴에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아니라 모세가 전했던 구약시대의 복을 자꾸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좋은 복이 팔복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좋아지게 하고, 하나님나라가 세워지게 한 것은 팔복의 마음을 받은 성도들이 이뤄가는 것이잖아요?
개신교가 세상을 바꿨고 하나님나라를 세웠지 유대교가 세우지 않았습니다.돈으로 권력으로 세상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개인의 진정한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수천억이 있다 해도 이 인생너머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그 마음의 답답함이 어떻겠습니까?
이번 추석 특집에서 가수 나훈아씨가 인생이 왜 이러냐고 소크라테스에게 외치던데요.
누가 전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물론 살기 위한 물질과 여러 가지 복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내일부터 그걸 위해 열심히 뛰겠죠.
인간의 물질적인 복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영생과 구원에 대한 믿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이 팔복의 말씀이 자꾸자꾸 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셨듯이 팔복의 복이 우리를 구원하는 복입니다.
또 매일 성도답게, 사람답게, 존귀하게 사는 복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다음은 시내산 언약에 있었던 중보의 제물과 팔복 선언을 대비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을 시내산에 한번 얹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 때 그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다시 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하실 교회를 상징하는 제자들이 그 앞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새 언약을 세우고 그때처럼 천국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내산에 있었던 제물의 피가 없습니다.
제물의 피가 없는 천국약속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내산 언약에서 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 지기 위해선 반드시 제물의 피가 필요하다고 배웠잖아요?
구약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었겠습니까?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그 방법으로 우리 죄를 가리게 하실 생각이셨겠어요?오늘 팔복선언에 제물의 피가 없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속죄의 피를 담보로 천국에 데려갈 것을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이 스스로 중보의 제물도 되시는 나라를 다시 세우신 것이죠. 그러니 어떻게 그 나라가 영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구원이 흔들리겠습니까?
또 시내산 언약에 율법이 있듯이 오늘 주신 산상수훈도 하나님나라의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받아서 결국 실패했던 율법과 똑같은 율법을 주실리는 없는 것이죠.
오늘 제시 된 여덟 가지 복은 얼핏 보면 시내산의 율법 같이 지켜야 복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신약의 성도들도 모두가 실패합니다.
오히려 이 여덟 가지 내용이 십계명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오늘 팔복은 하나님나라의 법이면서 그 자체가 복이라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처럼 사람의 노력으로 지켜서 얻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를 통해 다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4장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 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계십니까?
그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많은 진리들이 팔복에 담겨있는 것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과 성령 강림을 통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에 밖으로부터 전혀 다른 본성이 들어온 것이죠.
팔복의 내용을 보면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얼핏 보면 저렇게 살라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승려 한 분이 산상수훈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산상수훈을 주제로 토론하며 종교와 구원에 대한 정의를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승려이면서 왜 기독교 영화를 만들었냐’ 그러자 이 분이 대답하길 ‘산상수훈에서 보여주듯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똑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산상수훈을 잘못 안 것입니다.
그 영화는 기독교 영화도 아니고, 산상수훈은 세상종교와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없는 영적인 내용들을 세상에 있는 단어로 쓰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오해가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팔복의 마음 상태는 하나님의 영이 죄인에게 들어가서 심겨진 인간에게 없던 전혀 새로운 특성입니다.
그게 영화 제작자인 승려의 생각처럼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뭐 하러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습니까?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게 팔복의 상태입니다.
첫 번째 복을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되죠.
이 가난한 마음은 고상하게 겸손해진 마음이 아니라 거지가 애걸하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내 안에 구원받을 수 있는 건덕지가 아무 것도 없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는 전적 무능과 절박함을 아는 게 가난한 마음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받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부요하다면 더 이상 천국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고 죄의 본성이 조종하는 데로 끌려가는 자신을 보면 정말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이런 것이 자연인의 속에서 저절로 깨달아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수양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 신이 될 수 있다는 영적 허세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내 영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비춰주실 때 이런 가난한 마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온유함과 긍휼도 세상의 생각과 다릅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젠틀하고 친절한 것, 남을 잘 동정하고 잘 우는 것과 다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넣어주시면 그때서야 비로서 내가 그런 줄 알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온유와 긍휼인 줄 알았던 것이 위선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죠.
옛사람은 다 위선자예요.
약간의 겸손함과 친절한 성품으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청결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직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내 생각과 행위 중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 걸 말합니다.
이전엔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청결한 것인지 구별을 못했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그리고 세상에 이뤄지길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본래 우리는 탐욕을 채울 불의와 부정을 원하는 마음만 있었죠.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이 회복되고 나 자신과도 화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평화가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겐 원래 싸우는 본성만 있었습니다.
이 법은 손해와 고난을 당한대도 죽음을 불사하고 지켜내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처럼 내다 버리는 일이 절대로 없는 것이죠.
요즘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증거라고 볼 수 있죠.
팔복의 성품은 과거 우리 안에 전혀 없던 것들입니다.
이 복된 제2의 심성이 내 안에 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새마음으로 우리를 계속 감동하심에 따라 내 인격과 협력하여 옛 죄의 본성은 죽이고 새사람은 강하게 키워가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성화입니다.
팔복은 율법처럼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2. 그렇기에 팔복의 조항은 우리가 지금 믿음 안에 있는지, 구원을 받았는지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덟 가지 복된 심령은 묶음으로가 아니라 각각 천국을 보장 하고 있죠.
그 중 하나만으로도 구원의 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의 복된 상태는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 속에서 상통하는 것이죠.
그 중 한가지만 체크해 봐도 믿음의 상태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가난한 영인지 아닌지를 체크해 보면 내 영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해야 합격입니다.
만일 지금 예수님을 더 잘 따르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할수록 내 영은 어떻게 될까요?
더 가난함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신 상태와 내 본성의 상태에 오히려 더 큰 갭을 느끼기 때문에 내 영의 가난함은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죠.
그 변하지 않는 본성이 나오는 나를 볼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도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이구요.
누구하고든 화평이 깨지면 주님이 심어주신 새 마음보다 옛 본성이 주도권을 잡은 것입니다.
화평은 나 자신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로 묶여 있기에 그 중 하나가 깨지면 모든 관계에서 다 화평이 깨집니다.
가족과 화평하지 않으면서 나 혼자 화평할 수 있던가요?
하나님 앞에서 화평하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과는 물론 나 자신을 상대로도 화평을 깨뜨리면 안됩니다.
자주 내 자신이 못마땅하잖아요?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후회가 맴돌죠.
화평이 깨지는 이유는 옛 본성인 교만이 더 크게 내 마음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더 높이지 못했고, 더 잘해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나 자신과의 화평도 깨지는 것이죠.
오늘 팔복 체크리스트를 잘 활용해 구원받은 마음의 상태를 잘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는 즉시 성령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하며 늘 복된 상태를 유지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가난한 시절을 살아 봤기에 사는 데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압니다.
그 땐 정말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것보다는 팔복의 마음을 더 크게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을 더 잘 따르는 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구한 평생에 주님은 점점 더 좋은 것들을 주셔서 부족함을 모르고 살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잘되는 복도 주셨구요.
주님의 교회를 이렇게 섬기게 된 것만큼 큰 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좀 아쉬우신가요?정녕 구약의 복은 없는 것일까요?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성도들이 단체로 부자가 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죽을 때까지 병도 없고, 인기와 명예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 그런 복을 받으라고 말한다면 그건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걸 열심히 가르쳐 온 한국교회가 화려하고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지만 팔복을 가르치지 않아서 지금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다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어떤 가정에서 어떤 능력을 갖고 어떤 지위로 살든지 거기에 충실하며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 따라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구하라고도 하셨죠.
그때 그때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하고 꼭 필요한 것들을 기도하면 인도해 주신다는 약속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와 대화하실까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이 모세와 진지하게 대화하고 하나님의 의견도 말씀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셨나요?
그 하나님아버지께서, 그 예수님께서 지금은 왜 우리와 대화를 안 하시겠어요?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여덟가지 복된 마음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해서 그걸 유지하고 키워가려고 한 주간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심어주신 팔복의 성품은 분명히 있지만 처음엔 작은 씨앗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만큼 키우라고 하셨잖아요?
여덟가지 중 무엇이 그래도 하실만 한가요?
주의 말씀은 신비로운 게 한 가지만 신실하게 지키려 해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계명들도 지켜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보시며 한 가지씩 결정하시고 한 주간 성령님께 은혜를 구하며 이 복된 마음을 더 풍성히 지켜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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