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jOVE1vJzPG8&t=2337s
오늘 읽은 본문은 헌금 생활에 대한 설교의 주제로 많이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헌금을 많이 하라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평생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 온 농촌의 가난한 노인은 천국에 겨우 몇 십만원 정도를 입금 시켜 놓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과 구약성경은 편의대로 해석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보면 요즘 교회에서 설교 되는 것들과 뭔가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예수님은 천국에 쌓아 놓으라고 하시는데 대개의 설교는 땅에다 쌓고 누릴 복을 더 강조하잖아요?
오늘 산상수훈 네 번째 가르침을 통해 주님이 경계하시는 말씀을 잘 듣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전지가위에 손질 당할 준비를 하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임을 항상 기억하고 말씀과 다른 내 생각은 언제든지 철회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게 성도가 사는 방법입니다.
성령께서 모두의 귀를 열어 주님의 복된 가르침을 듣게 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은 덩어리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사도가 머리가 좋은 분이십니다.
세리였잖아요?
마태사도는 삼년 동안 정신없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쓸 때는 원숙해진 신앙과 성령님의 감화로 당시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의도를 완벽하게 깨달았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치밀하게 이 복음서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게 이 산상수훈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시내산 언약이 가리켰던 구원의 종착지입니다.
구약의 장구한 역사를 뚫고 마침내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출정식인 것이죠.
예수님이 계시고, 그 속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있고 그들의 마음에는 전에 없던 하나님을 아는 새마음이 심겨졌습니다.
팔복의 마음이죠.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었고, 예수님의 새계명을 순종해 하나님 형상을 이뤄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새사람이 되고 주님의 교회가 된 것이죠.
이 산상수훈을 받는 천국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장의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 신앙생활과 참 믿음의 신앙생활의 극명한 차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일반인들의 종교 활동과 성도의 신앙의 모습은 비슷한 듯 하지만 역시 그 내용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사회에선 기독교를 종교 중 하나에 넣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의 본성상 신의 존재를 찾고,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고, 영원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각종 종교가 발생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실제로 인격이 교통하는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참 신앙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안 된 종교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에 참 하나님이 찾아오셨지만 예수님 시대 유대교인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신앙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본문 앞에서 주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엔 열성적인 유대교인들의 몇 가지 신앙행위들을 거론하시고 성도들의 참 믿음과 선을 그어 주십니다.
사람 많은 곳에 구제품을 놓고 나팔을 불어 자신의 선행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일부러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기도하는 것, 이교도처럼 치성을 들이는 긴 기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종교행위의 동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의 복을 얻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얻고자 했던 목적대로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받았지만 하늘에 쌓은 상은 없다고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2. 그러나 너희는 그들처럼 하지 말고 천국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보물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눠주신 삶의 귀중한 것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다 소중한 보물이죠.
생명과 돈과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직업과 지위와 가정과 자녀와 남편과 아내와 이 아름다운 가을과 집과 자동차 등등 귀중하지 않은 게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보물들을 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 뜻을 이뤄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한 보물들은 하늘에서 영원히 기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나라와 상관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를 위해 땅에 쌓아두는 보물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쌓고 사용하는 것들은 결국 파멸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염두에 두고 늘 관심을 일깨워 하나님나라에 접속되어 있는 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하늘나라가 저 멀리 우주 너머로 사라졌다 주일에 다시 내려오면 안되는 것이죠.
그리고 내게 주신 직장과 사회적 지위나 권력으로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지를 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할 물질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 정도의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월급을 타고 장사를 해서 벌 수 있는 돈이 생활하기에 빠듯합니다.
누가 월급을 그렇게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딱 간신히 먹고 살만하게 주죠.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는 하나님 것이 십분의 일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것은 십분의 구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십분의 일을 더 얹어서 주신 것이죠.
자녀들 용돈 줄 때 이번 달 아빠 생일이 있으면 넌지시 만원 한 장 더 얹어 주는 것 같은 것이죠.
규모 있게 잘 쓰면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려서 하늘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게 하고도 살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성도님들 가정을 보면 수입이 생계에도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시기들을 경험해 보았잖아요?
그런 중에도 십일조를 내고 감사헌금과 주일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 솔직한 심정은 헌금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당분간은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걸 보고 믿음이 없다,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더 채워주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필요하신 분 같으면 하나님이 물론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저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중에도 일찍이 그런 훈련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아직 하나님 인도를 받는 믿음도 없는데, 무조건 드리면 더 많이 주신다는 속설을 주장하면 안되는 것이죠.
후하게 되돌려 받을 것을 계산하고 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보물은 천국에 쌓아두라고 하시는데요.
그렇기에 아무도 남의 헌금을 판단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동전 두 개를 넣는 여인을 보시고 가장 많이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돈으로 헌금하려고 하면 우리 중 아무도 물질을 하늘에 쌓는 사람이 없을지 모릅니다.
돈은 있는 대로 다 써지더라구요.
원칙적으로는 가르쳐 주신대로 헌금을 하고 남은 돈 중에서 좀 절약해서 사는 게 맞습니다.
남들처럼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살지 못한다 해도 주님의 원칙을 지키며 수수하지만 맘 편하게 사는 삶도 살아보니 괜찮더군요.
시간도 다 일하느라 쓰고, 취미와 오락을 위해 다 쓴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봉사와 믿음의 성장을 위해 사용한 시간들은 신앙과 인격에도 그것이 남잖아요?
일주일 시간 중에 예배를 위한 시간을 당연히 구별해서 드려야 합니다.
기도시간을 정해서 지키고, 성경을 읽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영생을 취득했다면 그 나라에서 살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헌신 된 삶에는 그에 따른 하나님나라에서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시죠.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유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상급을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주님께서 결코 별 것 아니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피곤한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찍 준비해 나오시고, 또 먼 길을 달려오시는 예배를 하나님이 당연지사로 여기실 것 같습니까?
하다못해 명절에 찾아주는 자식들을 부모 마음이 고마워하는데요.
하나님은 반드시 상벌로 우리 인생을 판결하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아래 층 미용실에 갔는데 원장이 인천 라면형제 이야기를 하더군요.
엄마가 나간 사이 라면을 끓여 먹다가 불이 나 큰 화상을 입었죠.
형제가 다 중환자실에 있다 그 전날 안타깝게 동생이 세상을 떠났었습니다.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왜 착하고 불쌍한 사람을 저렇게 만드시냐, 너무 불공평하신 것 아니냐.
그리고 한참 머리 손질을 하다가 또 흥분해서 그러는거예요.
미용실 문을 항상 열어 놓으니 신천지도 들어오고, 도를 아시나요도 들어오고 교회에서도 아무 때나 들어와서 성가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냐는 거예요.
안 믿는다고 지옥 가는 게 말이 되냐고 언성이 막 높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원장님, 라면 끓여 먹다 세상을 떠난 불쌍한 아이하고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평생 호화스럽게 산 전아무개씨하고 죽어서 둘 다 끝이면 그게 공평한 건가요?
하나님이 안 믿어서 지옥에 보내시는 게 아니라 죄 지은 자를 공평하게 벌주시겠다는 거예요.’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안 믿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지은 죄 때문에 가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죄값을 치러주신 것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것만 심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잘 한 것도 상을 주셔야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모든 헌신에 대해 ‘너희를 위해’ 아주 잘 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뼈있는 말씀을 하시죠.
21절,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이 있으면 내 소중한 것들이 그리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반대로 하면 내 보물이 옮겨 간 곳에 내 마음도 갑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나님나라에 기여하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게 되는 것이죠.
3. 문제는 예수님이 당부하시듯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늘에 쌓지 않고 세상에서 상을 다 받아 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잖아요?타고난 본성과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사모하는 제2의 본성이 생겼죠.
제1의 본성은 땅에 속해 태어났기에 죄와 세상과 땅의 일에 끌립니다.
이 본성은 항상 이 땅에서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게 문제입니다.
제2의 본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원한 삶을 지향하죠.
오늘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우리 안에 제2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둘은 늘 갈등을 일으키는 데, 그 둘 사이엔 공통분모가 없어서 타협이나 절충이 없습니다.
항상 한 쪽이 이겨야 끝납니다.
그런데 보통 누가 더 강하냐면 타고난 본성이 더 강합니다.
내가 성화되어서 새사람이 더 강해졌다고 번번이 속죠.
예배 은혜 받고 몇 걸음, 운전대 잡고 몇 분 안에 내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서 건제한 걸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습니까?바울사도가 결국 본성이 끌고 간다고 탄식했으니 우리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늘 싸우는 게 불완전한 이 땅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더 천국에 쌓기를 감동하시는데 계속 망설이고,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 하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이기는 게 성도들의 승리하는 삶이잖아요?
새사람이 강해지게 하는 게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바에 의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성령께서 새마음을 강하고 충만하게 만들어 주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케 해주심을 그래서 매일, 아니 매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좀 전에 서 있었는데, 곧 바로 넘어지신 적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본성이 교묘히 이용하나 주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좀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거듭난 눈을 가진 성도들은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변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어지는 눈을 갖게 되죠.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됩니다.
이 눈은 말씀과 기도로 항상 영육의 세계를 선명하게 보도록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 눈으로 남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믿음이 변질되지 않는지를 냉철하게 살피라시는 것입니다.
등불과 같은 새 마음이 있어야 어두움 속에 웅크리고 있는 본성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선한 의도로 율법을 지켰지만 자신의 본성의 악을 분별하는 팔복의 마음을 갖지 못해서 본성의 탐욕에 집어 먹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경고하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그 심각한 형국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해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라는 문제는 좀 더 심각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천국에 적금 안 들어도 좋다, 내가 벌어서 지금 좀 더 쓰고 살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실상을 들어 보라 시는 것입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돈에 집약해 가십니다.
그리고 돈이 결국 하나님과 주인의 자리를 다툰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돈을 쓰는 일에 인색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더 참담한 것은 돈을 좋아했더니 나중엔 돈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돈에게 쩔쩔매며 받들어 섬기는 지경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돈을 인격체처럼 하나님과 대비 시키십니다.
본문에서 재물로 번역한 원어는 맘몬이라는 단어입니다.
현대적으로도 맘몬은 ‘부의 신’이라는 의미죠.
성경에서는 돈을 사용해서 사람을 지배하는 마귀를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돈을 사랑한다는 걸 마귀가 이용하는 것이죠.
마귀는 창조는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 돈을 갖다가 저 사람에게 주며 돈으로 사람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돈의 노예가 된다는 걸 마귀는 간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서 있는 돈을 뺏어 가면 어떨까요?
없어진 돈과 함께 인격과 삶이 파멸됩니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이 요양원에서 일하시는데, 거기 계신 노인 한 분이 신도시가 들어설 때 옆에 있는 땅을 일찍 파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까지 버티다 땅을 판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받은 거예요.
그걸 보고 너무 속이 상해서 결국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그 이후로 누워서 지내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 때문에 그렇게 되는 노인 분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라는 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맘몬의 신이 된 마귀가 사람의 운명과 인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도 나타나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며 제 것인 양 행세했잖아요?
단지 돈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상황은 더 심각해서 결국 돈을 깔고 앉은 마귀를 섬기는 형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시민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땅에 속한 본성이 있기에 어느새 돈이 주인의 자리를 넘봅니다.
세상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없으면 자존심도 못 지키잖아요?
문제는 우리에게 쓸 돈이 항상 부족하게 느껴지고 실제로 빠듯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의 해답으로 하나님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믿어보라고 하십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32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그동안 주지 않으셨다면 어디서 우리가 구했겠어요?
이미 우리를 먹여 키우시는 데 수억을 쓰시고 더 모아 주셨는데 이제 와서 내 힘으로 돈 몇 푼 더 모으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게 안쓰러우시다는 것입니다.
돈은 내 손으로 벌어온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동안 쥐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쌓은 것들을 내 눈으로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없고 기억도 못하는 것들은 있을지 모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고, 나를 기쁘게 영접하시는 주님을 볼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놓은 것들을 볼 때 인생에 대한 아쉬움에 탄식할지 모릅니다.
내가 남들이 하는 것만큼 많이 하지 못한 것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를 위해 보물을 쌓아두는 지혜롭고 선한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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