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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해보려고 원수 같은 사람이 생길 때마다 괴로웠던 기억들이 다 있으실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랑은커녕 용서도 안되는구나’를 깨닫고 번번이 좌절했던 말씀이죠.
오늘 또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으시죠?
정말 성도들에겐 난공불락 같은 계명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이 계명을 명령하시는 분위기는 사뭇 엄중하십니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계명을 이렇게 중요한 현장에서 말씀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또 이 계명 속에는 천국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진리의 보물들이 담겨 있어서 캐고 캐도 끝이 없죠.
오늘 이 계명을 풍성하게 이해하고 잘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성령께서 제게는 학자의 혀를 주셔서 잘 전하게 하시고 성도님들께는 학자의 귀를 주셔서 잘 이해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나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5장에서 주시는 산상수훈의 새계명들은 시내산의 율법과 연계됩니다.
시내산의 언약에서도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과 생활법을 주셨습니다.
오늘 산상수훈에서도 천국 시민이 된 성도들에게 그에 따른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 법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연계 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의 율법과 주님의 새계명을 대조해 보는데 사실 별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사도가 이 복음서를 쓸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율법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나라를 이어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구원을 위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살펴 본 대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확정 된 것이 아니었잖아요?
하나님 백성다운 율법 준수가 조건이었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하거든요.
애시 당초 시내산의 언약은 산상수훈의 새언약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가져다 주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여전히 모세와 율법을 신봉하고 주님을 배척하고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이죠.
예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바르게 풀어 주시자 이단 취급을 했잖아요?
안식일에 병 고쳐주셨다고 그런 걸로 제일 시비를 걸었죠.
이런 유대인들을 보시는 예수님 마음엔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아픔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현세의 가나안땅이 아닌 영생하는 천국으로 데려가려 하셨지만 그게 안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마음에도 그게 있었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아직도 모세의 얼굴에 있는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잖아요?
이 산상수훈은 드디어 약속하신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진 천국을 선언하고 그 영광스러움을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이고요.
팔복이 그런 것이잖아요?
이 세상 어떤 인종 속에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그 고결하고 특이한 심령을 가진 종족이 그리스도인인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 낼지를 소금과 빛의 역할로 알려 주셨잖아요?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하시며 그걸 통해 천국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거기 아무도 천국을 본 사람들이 없었잖아요?
우리도 예수님의 새계명에서 천국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천국을 지금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말로 설명해 주시는 것이 산상수훈의 새계명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7절에서 말씀하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 새 계명들이 17절 이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게 구약율법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더 쉽고 가벼운 법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이건 좀 지켜볼만하다는 내용이 한 개도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살인에 대해서만 심판했지만 새 천국법은 형제를 무시하는 욕만 해도 지옥불에 던져 넣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들이 다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이렇게 못 지키는 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선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천국의 법들은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중점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미 주님을 믿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이 지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마음을 받았고, 소금과 빛으로 보냄을 받은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잖아요?
이 말씀 속에 천국이 어떤 곳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법에 의해서는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해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시죠.
이건 달리 말하자면 천국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미움이 존재할 수는 없잖아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천국에는 원수가 없다는 걸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 눈이 범죄 하면 빼버리고, 네 손이 범죄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시죠.
천국엔 범죄 하는 눈도, 범죄 하는 손발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갖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지금이나 별 차이 없이, 그저 조금 더 잘 사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여전히 우리의 상상 이상, 기대 이상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죄인으로 죄 속에서 뒹굴며 살던 죄인들이 어떻게 이 천국을 들어가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구원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 말씀대로 열심히 따라야 구원을 받는 것이면 어떡합니까?
우리의 죄의 본성으론 열 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순수하고 영광으로 빛나는 천국에 맞는 조건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헬스장에서 레깅스 입은 여성을 한번 훑어 볼 때 한쪽 눈을 빼버리고, 주일 성수를 안하고 골프장 갔다 오면 오른손 잘라 내 버리고, 그러겠습니까?
천국의 자격을 스스로 갖출 수가 없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뭘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놓지만 예수님이 즉각 심판하셨잖아요?
너희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사람의 힘으로 천국의 자격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걸 보여준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시켰어도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그 육신이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빼 버렸어야 할 내 눈 대신 폭행으로 눈을 못 뜨실 만큼 상하셨습니다.
잘려 나갔어야 할 내 손과 발 대신 손발에 못이 박혀 그 몸을 으스러뜨려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도말시켜 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법을 지켜 구원 얻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이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아주 잘 해설을 해 주죠.
로마서 8장3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은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고 천국시민이 된 것입니다.
새계명은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천국시민이 되었기에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중히 받들고 거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 안에 팔복의 새마음이 심겨지면 자꾸 죄를 털어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죄가 자꾸 추하게 느껴지고 내 몸에 붙는 게 싫어서 자꾸 멀리하게 되는 것이죠.
2. 그렇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법을 지켜야 하고 믿음에 따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좀 더 이 계명에 나 자신을 잘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 5장에 나와 있는 다섯가지 정도의 대표적인 계명은 한 가지만 잘 이해하면 그 뜻은 다 통합니다.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옛계명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에겐 원수가 아닌 이웃 사랑도 어렵다는 걸 보여주십니다.
저절로 혈육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뭐 하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겠어요?
우리의 본성은 그것도 제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만 사랑합니다.
자식도 나를 괴롭게 하면 미워하잖아요?
돈을 마구 쓸 데 내가 행복한 사람은 과소비를 하게 되는 것이고, 돈을 모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자린고비가 되는 것이죠.
내가 남을 위해 무언가 나눠줄 때 행복감을 느끼면 계속 기부를 합니다.
나의 봉사로 남이 행복해 하는 걸 보는 게 내 행복이면 계속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주장하는 신념에서 자부심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분신도 하고, 순교도 하고, 타인을 위해 생명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본성적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도 자연인에겐 불가능한 계명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시는 계명은 이웃 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우리 안에 본성에서 나온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팔복의 심령 안에 존재하는 사랑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은사로서의 사랑입니다.
옛날 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인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사랑과 경건은 모두 이 새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더 자주는 매 순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 앞에 오늘도 가난하고 죄로 인해 애통한지, 내 안에 온유와 청결함과 화평함이 있는지를 시험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거기서 이웃에 대한 소금과 빛의 사명과 사랑의 섬김이 나와야 하는 것이죠.
본성적 열심으로 율법을 열심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이 왜 독사의 자식이란 소릴 예수님께 들었습니까?나를 높이려는 본성은 설령 선한 의도조차로 시작했다 해도 나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게 타락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라고 갈라디아서5장16절에서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꿔 주신 새마음으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그 사랑이 오늘 주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진짜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원수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본성적인 이기심이 있기에 이 두 법이 마음 속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미워서 괴로울 뿐 아니라 내가 미워한다는 것 때문에 또 괴롭잖아요?
팔복 심령이 없는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할 갈등을 느낄 이유가 없죠.
오히려 미워하고 헐뜯는데서 행복감을 느끼죠.
어제까지 원수 같던 사람들이 오늘 찰싹 붙어서 다닌다면 왜겠어요?
대개는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천국 시민인 성도들은 두 마음의 법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를 부단히 선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렇기에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본성적인 사랑으로는 상을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새사람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마음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에 그 노력만으로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3. 이렇게 원수를 사랑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자녀 된 증거는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면 하나님께 있는 그런 열매가 달려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과 선인에게 공평한 생존의 혜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기에 악인도 삶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우리도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뿐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공평한 혜택으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는 것처럼 우리가 베푸는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얻습니다.
사람은 물질로만 사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삽니다.
왜 돈을 법니까?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잖아요행복하게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쓰기 위해서죠.
사랑이라는 목적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병에 걸립니다.
사랑이라는 목적이 사라지면 돈이 목적이 되어서 돈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명백한 것은 이 세상은 사랑의 행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천국의 성도들이 하나님이 지금도 은총의 햇살을 뿌려주시듯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정말 나를 힘들게 한 용서할 수 없는 원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나를 불행에 빠뜨린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신다면 차라리 교회를 안 나오겠다고 반발할지도 모릅니다.
멀리서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하고 싶은데 사랑이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크던 작던 내게 아픔을 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원수를 사랑하고 하신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께 원수로 행하던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주님의 것을 나눠주신 게 아니라 목숨을 통째로 주셨잖아요?
골로새서 1장21절에서 말씀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화목케 하시고, 이제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셨느니라
심지어 주님을 믿고 난 뒤에도 하나님께 원수인 옛 죄를 선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잖아요?그러니 너희도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음 속에 원수 같은 사람 한 둘은 다 키우고 있으시죠?
그러나 오늘 나를 괴롭게 하는 원수는 김정은이나 조두순이 아니라 나랑 같이 밥을 먹고 얼굴을 마주 대는 가족이나 이웃입니다.
철전지 원수든, 매일 나를 화나게 하고 공격하는 내 집의 원수든 이들을 사랑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도 구원받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는 의미이지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수가 있으면 우리 안의 천국에 지옥의 불이 끓어오릅니다.
그렇기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의 은사 중에서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하셨죠.
내게 사랑 없음을 묵과하지 말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냉담하고, 교만한, 본성을 이길 사랑주시길 기도하며 열심히 행하려고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전쟁을 치러가면서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입니다.
‘어, 언제부터 이렇게 내 마음이 편해졌지? 내 삶이 천국 같네’
언제 부터인지 마음이 편하고, 사람들 모두와 화목해 지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남을 보고 부글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죠.
물론 완벽하게 주님의 계명대로 지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실패도 하고 누군가에게 생긴 미움을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순간,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를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하다는 걸 고백하며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과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원수를 둔 마음이 내 천국의 마음을 휘젓고 다니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가 하나님보다 더 대단해서 나를 실패의 나락으로 끌고 다니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원수를 끌고 와 우리 천국 안에 데려다 놓고 기도로 도와주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 미워한다고 그 사람 바뀌지 않고 내 마음에만 지옥불이 끓어오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도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한 늘 삶이 지옥 같다고 내뱉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금과 빛의 사명과는 너무나 멀게 살아가겠죠.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바꾸시던 벌주시든 알아서 하십니다.
천국은 자꾸 원수를 맺어가는 게 아니라 풀어가는 곳입니다.
너무 작은 일로 자꾸 원수를 맺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서 지옥이 느껴지기에 점점 멀리 합니다.
언제 저 사람 마음이 돌변해 내 실수를 꾸짖고 나를 미워할까 불안한 것이죠.
티끌하나 없이 청결하셨던 예수님 주변에 왜 그렇게 죄인들이 득실거렸습니까?왜 매일 돌아가며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과 시간을 보냈습니까?죄인을 용납하고 품어주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잖아요?
‘ 희도 이같이 하라’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주 이재0 지사가 친형을 강제 입원 시킨 것이 직권남용인지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저는 정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분이 이렇게 소회를 밝혔더군요.
세상을 떠난 그 형님 살아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것이 평생 마음에 남을 것 같다며 못난 동생을 용서해 달라고 하더군요.
기억은 멀어지고 형님께 미안한 마음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은 물론 가족들 모두가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혈육조차도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원수를 맺지 말고, 내게 원수 같은 사람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이 답입니다.
그렇게 애쓴 댓가로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상을 내리시는 데,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에 천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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