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8장21절-35절 (만 달란트 빚진 자)

남수연 2019. 9. 24. 03:02

https://www.youtube.com/watch?v=x5wx740UiAM

<2019년9월22일 설교영상>

지난 주에 있었던 가장 큰 화제는 화성연쇄살인 용의자를 찾았다는 뉴스였을 것입니다.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도 이 사건을 다룬 것이지만 전에 시그널이란 드라마도 이 연쇄살인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아주 음산하고 긴장되고 무서웠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그 살인범이 DNA분석기술의 발달로 밝혀졌습니다.

처제를 죽이고 청주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라고 하죠.

살인범이 밝혀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사건을 맡았던 은퇴 경찰들이 한참을 울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표창원의원은 아홉 번째 살인이 일어났을 때 화성경찰서 소속 기동대 소대장으로 사건을 맞았다고 하더군요.

경찰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경찰이었던 표의원은 범인을 잡겠다는 사명감에 사건에 매달렸지만 진범을 잡지 못한 자괴감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었다고 합니다.

악에 대해 정당한 심판을 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 속에 울분이 생깁니다.

온 나라를 두려움과 분노와 무력감에 떨게 했던 이춘재.

이런 살인마를 보고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에 동의가 되십니까?

만일 유가족이 기독교인이라면 그 살인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에 근간이 되는 핵심 사상이라면 당연히 용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평생 용서하지 못할 사람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죄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밝게 비춰주셔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털어버리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1.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받는 사회에서 살기에 용서가 필요합니다.

지난 주도 크던 작던 나를 불편하게 한 사람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저도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인터넷뱅킹 암호기가 고장 나 시간을 내서 은행을 방문했습니다.

대기인들이 너무 많았는데 수습직원이 다니며 무슨 업무냐고 물어 보더군요.

제가 OTP가 고장나서 교체하려 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휴대용 단말기로 제 업무를 봐 주었습니다.

일이 어찌나 느리던지 결국 제 번호표 차례와 비슷하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해보니까 안되는거예요.

교회 것을 바꿔야 하는 데 엉뚱하게 제 개인 OTP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전화를 하는데, ARS 짜증날 만큼 연결되기 힘든 거 아시잖아요?

겨우 연결되니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데 1시간 통화 끝에 결국 다음날 다시 은행에 가야했습니다.

불량 OTP와 신입사원 때문에 두 번이나 수고해야했고, 무료통화시간 다 써버리고, 시간도 너무 많이 버린 것이죠.

게다가 그 직원이 제대로 자기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고 어물거리며 넘어가더라구요.

대놓고 뭐라 하진 않았지만 흔쾌히 용서하는 마음이 잘 안 생기더군요.

우리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지만 매일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대개 이렇게 주고받는 자잘한 일들입니다.

오늘 용서에 대한 비유 설교는 베드로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21절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는지를 묻습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선은 일곱 번입니다.

일곱 번이나 내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삼세번이라고 하죠.

내가 세 번이나 널 용서했어 그러면 상대도 할 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왜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있듯이 베드로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요?이미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용서하기 힘든 형제 때문에 괴로웠을지 모르죠.

그게 누구일까요?베드로는 이미 삼년 정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물이기보다는 아마도 최근 갈등을 빚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 뒤 말씀에서 그 당시 제자들의 분위기를 좀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오늘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 간에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다음 20장에 보면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님의 나라가 세워졌을 때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최고의 직위에 앉혀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곧이곧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줄 았았던 것이죠.

이 사실을 알고 제자들이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고 당시 미묘한 분위기를 마태는 기록합니다.

평범한 어부 출신 베드로와 달리 요한은 수산업을 크게 하는 부유한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은 대제사장 집도 마음대로 드나듭니다.

게다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이모였고 주님의 사역에 재정적인 지원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지위를 이용해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은 직책까지 독식하려했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미웠겠습니까?

요즘 정치인들 사생활에서 속속히 드러나는 부모 스팩에 낙담하는 청년들이 많잖아요?

남들이 아빠찬스, 엄마찬스 쓸 때 대단한 부모를 두지 못한 청년들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베드로와 요한의 갈등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은 대개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매일 봐야 하는 직장 동료들, 학교 친구들,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이 실수하게 되고 더 많은 상처를 줍니다.

특히 가족 간에는 본성이 날 것으로 나오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 전혀 모르는 타인들도 내게 상처를 주고, 가장 따뜻해야 할 가까운 사람들도 상처를 줍니다.

어떻게 이 모두에게 원한을 지고 살겠습니까?

일반적인 덕으로 봐서도 용서하며 사는 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규정은 반드시 용서하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 뭘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하는 게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번만 잘못하지 않잖아요?또 용서가 단 칼에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힘들게 용서했지만 돌아서면 다시 미워잖아요?그럴 것이기에 계속 용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더 큰 이유에 대해 오늘 비유를 들어서 가르쳐 주십니다.

23절에 이렇게 시작하시죠.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갑자기 천국 이야기가 나오죠?이 용서가 단지 현실문제만이 아니라 곧 천국의 문제, 구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용서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오늘 비유에서 한 임금이 그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왕의 재산을 맡은 관리나 영토를 맡아 관리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종이 임금에게 불려 나왔는데 갚아야 할 빚이 무려 만 달란트였습니다.

만 달란트면 요즘 화폐 가치로 수 조원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큰 빚을 진 종에게 주인은 모든 것을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부채를 다 갚기는 불가능하죠.

빚진 종은 왕 앞에 엎드려 용서해 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왕은 뜻밖에 거액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줍니다.

얼마 후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천만 원 가령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 조원 탕감 받은 종은 천만 원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빚진 동료가 빌지만 종은 돈을 받기 위해 동료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이 상황에 민망했던 다른 동료들이 왕께 이 소식을 보고하자 왕은 거액을 탕감해 주었던 종을 다시 부릅니다.

그리고 엄하게 책망하고 이 종을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네가 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은 네가 먼저 막대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계속 우리가 천문학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께 빚진 자라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펴도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화성살인범 이춘재가 감옥에서 자기 입으로 처제를 죽였다고 하면서도 자기는 무죄라고 떠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방에 있던 사람이 들어도 그런 논리가 이상했다고 합니다.

잘못은 해도 그게 죄라고 인정하기 싫은 사람 심리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고민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놓고 그게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교인들이 죄인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죄라는 말보다 상처, 연약함 이런 말로 대신하는 형편입니다.

번영신학의 대가인 조엘오스틴 설교는 몇 십 편을 들어도 죄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죄라는 말에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이유는 주로 도덕적인 죄를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뭐가 그렇게 많다는지 동의가 안되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를 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죄는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는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다른 무엇이 들어와 사랑의 순서가 바뀌면 그건 양심적으로 죄라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죠.

그 사이에 다른 무언가 더 중요한 게 들어오면 관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웃음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 와서 웃었습니다.

다음 중 올바른 생일선물을 고르시오.

애인에게 문자가 온 것입니다.

오빠 생일선물 골라봐

일번, 오빠가 전에 말한 백만 원 짜리 패딩.

이번, 노트북.

삼번, 내 사랑

잘 고르셔야 합니다.

요즘 여친들이 이렇게 영리한데 우리 아들들이 너무 순진해서 걱정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과 순서를 바꿔 세상의 것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 전체가 죄가 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싶으셔도 죄가 없다는 데 어떻게 강제로 용서해 주시겠어요.

저는 주님의 마음이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가슴이 철렁하는 때가 있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나쁜 짓을 꾸며 낼 때입니다.

그나마 야단칠 때 그게 나쁜 짓인 줄 알면 다행인데, 야단을 맞으면서도 제 잘못을 모를 때 조바심이 납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대고, 몰래 나쁜 짓을 하면서 잘못을 모를 때 왜 두렵습니까?

아이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끝까지 잘못을 모르는 나쁜 사람이 될까봐입니다.

자기 잘못과 단점을 완전하게 인정한 다음엔 뭐하러 그걸 들먹입니까?

오히려 주눅이 들까봐 그걸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제 잘못을 알기만 하고, 뉘우치는 사람만 되도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갚을 능력이 없는 우리를 위해 대속을 준비하신 것입니다.그러나 죄를 모르면 대속을 향해 간절한 구조의 손을 내밀지를 않습니다.

혹시 믿으면서도 믿어주고’, 봉사하면서도 봉사해주고가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성경을 펴면 어디서든 집요하게 이 죄와 죄를 인정하라는 경고음을 계속 들려주십니다.

지난 주도 많은 죄를 짓고 무감각한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에게 오늘 경고음을 다시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수조원의 의미는 평생 갚을 수 없는 불가능을 상징하는 액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 빚을 갚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주신 목숨의 값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히 내가 진 죄의 빚만큼을 예수님께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죄의 값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한편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그만큼 희생할 만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 것인지를 깨닫는 유일한 경로입니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용서를 깨달은 신자들은 진심으로 그 은혜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개 숙인 마음속엔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존귀한 자라는 자존감이 꽉 차 있습니다.

내 현실이 어떠해도, 누가 날 무시해도, 신자들 안에는 모든 걸 능가할 자신감과 담대함이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2)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다음은 서로 빚진 것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24절은 모든 사람의 생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맡겨진 돈은 당연히 주인에게 결산하고 보고해야 하는 것이죠.

요즘 우리은행에서 판매한 펀드가 만기가 되어 뚜껑을 열어보니 1억이 2천만원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돈을 맡겼으면 당연히 결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행에서 당장 상품 판매에만 열을 올렸지 고객들의 돈을 결산할 때를 망각했다는 것이죠.

빚진 종은 왕과의 결산을 생각하지 않고 허랑 방탕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삶을 결산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탕감되었지만 그 증거를 하나님은 우리의 용서에서 찾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안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니라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것이죠.

1)우리가 용서하고 풀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용서한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부싸움 해보면 과거에 배우자가 잘못한 것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재생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사람들은 근본적인 용서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용서했다면 진짜 잊어버렸어야 맞는 것이죠.

싸울 때마다 생각나면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매일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한번 용서를 하고 뒤돌아서 또 미워진다면 두 번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용서가 안되면 다시 세 번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 용서를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용서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사백구십번째 용서를 하면서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용서한 것입니다.

용서는 내게 죄를 짓고 상처를 준 사람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 왕이 거액의 빚을 탕감해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왕이 갚을 길이 없어 모든 것을 다 팔고 자신은 영원한 옥살이를 해야 하는 종의 처지가 불쌍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죄를 탕감하고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매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저는 한 때 불쌍한 처지에 있던 저를 위해 주님이 얼마나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셨는지 잊지 못합니다.

그러니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저는 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왜 백데나리온 빚진 종을 용서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주인에게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는지, 왕이 자기를 위해 왜 수조 원을 포기했는지 공감하지 못하는 불감증환자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그게 감사한지 모르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게 거듭나지 않은 본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구원받았다고 자만하며 용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을 빗대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타고난 죄성으로 이기적으로 살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부터 살고 봅니다.

저 사람이 하는 한심한 행동과 나쁜 짓들은 낯선 것들이 아닙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삽니다.

그들 속에서 나 자신을 볼 때 그나마 불쌍한 마음이 들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죄 속에서 나를 보고, 죄로 인해 피차 고달픈 삶을 생각하며 그렇게 서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또 내가 원치 않는 대로 묶여 있는 나의 환경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힘들 때마다 먼저 남과 비교되는 나의 출생에 대해 화가 납니다.

왜 나는 남들처럼 머리가 좋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남들처럼 키가 좀 크고 얼굴이 좀 더 잘 생기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결국 태생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왜 내게 이런 답답한 인생을 주셨을까, 내가 무슨 죄를 더 지었다고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실까나를 이렇게 나쁘게 대접하신 하나님에 대해 상처를 갖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라는 것은 말이 안되지만 설령 지금 생각에 하나님이 내게 잘못하신 것 같아도 그것이 오해임을 알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어릴 때 부모 처사에 상처를 받고 오해하지만 커서 애 낳고 살다보면 부모 마음 압니다.

그래서 부모는 원망도 들어주고 다 내 책임인 듯 받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상황, 좋은 자료들로만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우리를 더 온전한 사람, 더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될 것을 믿으시고 오해할 상황에서도 늘 하나님과 화해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그리고 때때로 너무 맘에 들지 않는 내 자신도 용서해야 할 대상입니다.

많은 시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입니다.

왜 나는 이것 밖에 안될까, 왜 오늘 그 자리에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창피한 행동을 했을까.

그런 창피함과 잘못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것 밖에 안되는 내 자신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자신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게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처음엔 내 죄가 아니라 남이 준 상처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내 죄로 이어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잖아요.

그곳이 지옥이기에 용서하지 못한 마음엔 반드시 마귀가 서식합니다.

용서하리라 순종을 선택하는 순간 마귀는 씁쓸히 떠날 것입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의 교훈을 선택하면 마귀가 우리 삶에 발붙일 틈이 생기질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오늘 다시한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또 미워하시고 다시 용서하면 됩니다.

루이스 스미디스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용서하고 내일 미워하다가 다음 날 다시 용서하게 될지라도 당신은 용서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용서의 전문가가 아니다

또 한 주간 만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잘못 쯤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훌훌 털어버리면 편합니다.

어떤 것이든 마음에 묶어 두지 말고 늘 풀면서 자유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