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제가 새가족초청예배 홍보를 겸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감자탕 식당 앞을 지나 도로 쪽으로 올라가는 데 건너편에 한 여자 분이 물건이 든 봉지를 옆에 놓고 길 가에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건너가서 초청장과 티슈를 건네며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교회에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을 물어오더군요.
친정어머니가 마천동 사시는 데 혹시 차량운행을 하냐, 예배 시간은 몇 시냐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이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병 고쳐주는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시던데요’
왜 아니겠어요, 나이 드시고 여기저기 아프시면 기왕 다닐 것 병이 낫는 교회 다니고 싶으시겠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병 고쳐도 어차피 또 병나잖아요. 그때마다 고쳐지겠습니까? 근본적인 믿음이 생겨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가는 게 더 필요하죠’
그 분이 그럴 것도 같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번 교회에 오시겠다고 말은 하시더군요.
오늘 하나님께 나온 우리들이나, 그분 어머니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중직을 맡겨 달라는 세베대의 아들들이나 일맥상통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신앙의 초점이 오직 나 자신과 현재 삶에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나라를 현세적으로 이해하고 높은 자리를 간청하는 제자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나라에서 영광을 얻길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중요한 진리로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주님은 남보다 더 낫길 바라고, 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우리 본성을 억누르고 최소한의 미약한 삶을 살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갖는 기대가 무엇입니까?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태에 도달해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에 학교에 있을 때 엄마들이 성적상담하러 오면 꼭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머리는 좋은 데 노력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 능력을 다 써서 살려고 하지 않은 것만큼 속상한 게 없습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살아서 남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걸 왜 하나님이 막으시겠어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해야 이 땅과 내세에서 동시에 가장 지혜롭고 복되게 사는 것인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1. 제자들이 이해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20절을 보면 세배대의 아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아들 둘을 데리고 예수께 나와서 간청을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이 사도 요한과 야고보와 그의 어머니라고 명시합니다.
성경 몇 군데를 종합하면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이고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와는 자매지간이라고 추정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시잖아요?
살로메와 마리아가 자매간이기에 뜬금없는 무리한 부탁이 아니셨던 것이죠.
사도요한의 집안은 큰 어장을 가진 부자였고 제사장들과도 가깝게 지낼 만큼 유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쓴 비용을 이모 살로메도 많이 지원했을 것입니다.
이미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수제자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로와 자격을 볼 때 예수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게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요청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나라가 침략자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유대 땅에 세울 이스라엘정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나라를 이해한다는 게 이만큼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하나님나라도 사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게 분명합니다.
진짜 천국을 대하는 순간 예상했던 게 맞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이미 삼년이나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고 먹고 자면서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제자들과 예수님은 완전 동상이몽인 것이죠.
이들이 최고의 요직을 예수님께 청탁했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고 하죠.
왜 분히 여겼겠습니까?
자기들 속마음이 야고보와 요한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전부 다 예수님의 나라를 그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나라로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보아오던 제자들과 많이 다르죠.
아직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이 오시는 구속의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구속의 사건을 통과했는지를 기준으로 누구든 이렇게 신앙의 구분이 분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과 세 사람의 대화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오해의 부분들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 가르치십니다.
먼저 제자들이 원했던 명예와 권세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죠.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영광을 하나님나라에서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제자들 모두가 갈망했던 최고의 영광과 축복의 삶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분명히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단 그 영광의 정도는 성부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에 나오며 받길 원하는 모든 축복, 그 이상의 것들을 하나님은 준비해 놓으셨고 영원히 누리게 하실 것은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광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이루셔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이 이 잔을 마시지 않고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을 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실 일을 알리십니다.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로마당국에 넘겨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고 사흘 뒤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만 주님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 잔을 마셔야만 예수님 또한 구세주로서의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화 내용을 보면 제자들은 아직 대속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죠.
‘우리도 예수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하잖아요?
교회 밖의 사람들 뿐 아니라 처음 교회 나와 믿기 시작할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설교에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니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지 그게 영적으로 현실적으로 체험되기까지 개인마다 다르지만 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구속의 사건을 통과하며 변화되어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복된 자들이 될 미래를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요한은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교회를 양육하고 죽기 전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죠.
그들이 지금 과연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았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주님 앞에서 한 점 후회도 없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지금 뭔지 모르는 힘에 이끌려 교회를 나오고 있지만 성령으로 거듭나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날을 보고 계십니다.
지금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이 세상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점점 더 하나님나라를 보고 힘차게 나갈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원하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을 준비해 놓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렇다면 이 하나님나라를 받을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을 체험하는 신앙으로 변하게 되면 장차 살아갈 천국생활에 대해 믿음이 생깁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생기고 나서야 뭔가 나의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세적인 믿음에서 내세적인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이전에는 다 이 땅의 복을 구하는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는 내가 하나님께 하는 만큼 복을 기대합니다.
신앙생활에 성실하지 않고 봉사가 부족하면 화를 당할까 두려움을 느낍니다.
뭔가 성의를 보였는데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반대로 섭섭한 마음이 들죠.
지나친 헌신이나 희생을 강요하면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내세적인 믿음이 되면 내 잘잘못이나 충성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헌신도 자발적이 되고 오히려 나를 위한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간혹 난 이정도 수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천국만 가면 됐지 공로나 상급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받고 어물어물 살다가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갖는 애착보다 더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천국에 재물을 쌓아두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때를 위해 준비하고 충성되게 살았던 성도들에게 내리실 보상과 칭찬도 분명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사는 문제에 매달리고, 얻은 것을 더 누리고 더 즐기고 보자는 태도를 엄중히 경계하고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공로에 따라 구원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생겼다면 당연히 삶의 중심이 하나님과 주님의 나라에 맞춰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맞춰진 성도들의 삶은 정확히 남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으뜸이 되고자 하는 본성을 인정하신다는 걸 알 수 있죠?
단 그러려면 그 방식은 종이 되어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되고 싶은 욕구를 이 땅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가치있고 영원한 것에 맞추라고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대부분 현재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얽매여 시간과 힘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많이 벌어서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본능적인 욕구들을 단지 나만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재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려면 그래도 무엇이든 나은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상급자의 밑에 있으며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을 보고 섬긴다고 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지만 못한 사람을 위해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 진짜 섬김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섬기신 것이잖아요?
우리가 남보다 못한 처지라 어쩔 수 없이 일해 주는 걸 보고 감동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기에 성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좀 더 좋은 지위를 얻고 돈을 벌어 남을 섬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입니다.
물론 돈이나 학벌이나 지위만 이렇게 남을 섬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면 사람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든 우리는 주변을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은 돈이 아주 많으신데 직접 전도하는 것은 좀 어렵다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 성경책을 선물하십니다.
그렇다고 부자만 물질로 남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부자는 아니더라도 우리 집에 보면 몇 개씩 남아도는 게 다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나누며 남을 섬기는 축복 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이 교회에서 서로를 섬기는 모습은 분명히 하나님께 칭찬 받을만 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단순한 봉사나 구제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은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구절의 앞에 우리 한글 성경에는 생략 된 말이 있습니다.
‘마치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내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고 목숨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섬기라’고 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는 우리의 섬김에 가장 핵심되는 것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시며 우리를 섬기셨을까요?
그 십자가의 참혹한 과정과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한 요한사도는 깊은 감격과 경외심으로 이렇게 요한일서에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섬길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더 섬기실까요?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섬기는 것 보다 더욱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성부하나님과 함께 인도하고 계시잖아요?
성령께서는 또 얼마나 우리를 도우십니까?
지난 인도네시아 강진 때 팔루공항이 지진에 함몰되기 딱 30초전에 이륙해 구사일생으로 승객들이 살아남은 비행기가 있습니다.
인구의 88%가 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에서 이 비행기의 기장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장은 그날 예정 된 시간보다 빨리 이륙해야한다는 강력한 성령님의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 감동에 정신없이 이끌려 정해진 시간보다 3분 먼저 이륙할 수 있게 관제탑의 허가를 받아 냅니다.
탑승을 완료한 후 기장은 최대한 속력을 올려 이륙했습니다.
이륙직후 관제탑과 교신을 시도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30초 뒤 지진이 팔루공항을 강타했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때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성령께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리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계신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섬기는 게 아니고 부모들이 자식을 섬기잖아요?
자식이 어릴 때만 그런게 아니라 늙어서 힘도 없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끝까지 자식을 섬기는 게 부모입니다.
다큐공감이란 프로에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주름진 할머니가 높다란 산밭에다 감자 모종을 심으며 전부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거라고 말합니다.
노인 혼자 무슨 그렇게 많은 감자를 드시겠어요?
그리고 불쑥 내뱉은 말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자식이 뭐인고, 그렇게 정이 있을고’
사람의 이 모진 자식사랑이 대체 뭐입니까?
하나님의 결코 마르지 않는 기이한 사랑을 한 줌 부모 마음에 넣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내가 그렇게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사랑이 없잖아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려 한다면 매번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 그 힘으로 섬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권고와 명령은 우리 본성으로 하라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믿음으로,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족과 형제를 섬기는 것조차도 항상 저절로 되지 않잖아요?
때로 미운 마음도 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려 할 때 정말 힘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못된 마음이 많은 지를 더욱 느끼게 되죠.
우리 주변에 사랑으로 섬기기 힘든 분들이 있다면 그런 우리의 죄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데려다 놓으신 줄 믿습니다.
매번 실패하는 나를 볼 때 내가 여전히 죄인인 것을 알게 되잖아요?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점점 바뀌는 게 아닙니다.
되는가 싶다가 어느 순간 울컥 올라오는 걸 보면 내 속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걸 보고 놀라죠.
매번 안 되는 나를 보고 다시 성령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격의 열매가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다만 성령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정이 쌓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 간구하여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도록 섬기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 이렇게 되 뇌이지 않으셨을까요?
‘사람이 뭐 인고, 이렇게 내 안에 뜨거운 사랑이 있는고’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함이라고 믿는다는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막연히 느껴졌던 예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며 우리도 주님처럼 가족과 이웃을 섬기는 성도들이 점점 더 되게 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8년10월7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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