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7장1절-8절 (변화산)

남수연 2018. 7. 6. 15:09

오늘 본문 같은 복음서의 내용은 많이 들어와서 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신서에 비해 오히려 복음서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신서는 오래전 이야기라 해도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배경입니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사람사이 문제들의 신앙적인 해답을 줍니다.

그렇기에 이해가 쉽고 우리 생활에 적용도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서신서와 다릅니다.

평범한 일상은 같지만 일어나는 일들은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보아도 그렇잖아요?
평범한 산을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오래전 세상을 떠났던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도 빛나는 구름 중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음성으로 말하십니다.

이런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믿음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는 않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과 생애를 기록한 이 복음서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걸음마를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우리가 살아있는 영으로 태어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또 믿은 뒤에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 이 질문과 대답을 평생 반복하며 믿어야 바르게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대답은 물론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실 어마어마합니다.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구약의 중심인물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까지.

한 장소에 히어로를 다 모은 어벤져스 영화 같은 상황이라고 할까요?

역사이래로 구원을 계획하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한 장면에 다 담겨 있고 한편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의 구속사건에 대한 장엄한 예고편인 것입니다.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 한 컷은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오늘 성령께서 2천년전 이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선명한 지식과 믿음을 갖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1. 먼저 외모가 신비하게 변형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3년동안 예수님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아마 열두제자와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중에서 예수님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작정하신 듯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비한 신체로 변화가 되셨습니다.

2절을 보니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하죠.

연예인을 직접 본 사람들이 얼굴에 아우라가 있다얼굴에 빛이 난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주관적으로는 아이들 발표회에 간 부모들 눈에 자기 자식 얼굴만 빛나 보이기도 하죠.

예수님의 얼굴이 오늘 빛나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얼굴에 빛이 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입니다.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독대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백성들이 그 광채 나는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모세가 사람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죠.

모세는 하나님의 빛이 잠시 반영된 것이지만 예수님의 변형은 다릅니다.

본래 주님의 영광스런 본체의 모습으로 잠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 광채는 수건으로 가려졌지만 예수님의 빛은 입고 계신 낡은 옷을 거침없이 뚫고 나옵니다.

본문에서 옷이 희어졌다는 것은 옷감 자체가 변했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은 인간의 육체로 감싸고 있던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빛은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계시록225절은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런 빛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자기계시는 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시고 믿을 테면 어디 믿어봐라’ 이러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할까 생각하신다면 찾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고 분명히 말슴하셨잖아요?

오늘 본문 성경에 앞서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는 성령을 힘입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훌륭한 답변을 하죠.

이것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던 제자들의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 신앙으로는 신성모독이고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또 한분의 아들 하나님은 왠지 미심적인 존재인 것이죠.

예수님도 이 말씀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하신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이미 이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오늘은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는 만큼경험하는 만큼 강해집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후일에 제자들이 이스라엘 군중들 앞에 전했던 핵심 메시지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었거든요.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매 맞으며 전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확신을 갖고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오늘 높은 산으로 오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복음은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원리는 같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을 돌이켜 보면 누군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주님을 목격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을 확신한 사람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그 날 영광스런 예수님을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이 믿음을 우리 안에 불도장처럼 선명하게 찍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스스로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 본성대로우리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갈등하며 사는 것 자체가 우리 십자가입니다.

때로 버려야 할 죄바꿔야 할 성품순종해야 할 명령 하나를 지키는 것이 순교만큼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본성이 하기 싫은 일억지로 순종하려고 해보세요.

십자가 지는 것만큼 하기싫고 잘 안됩니다.

우리의 이런 보통 믿음조차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나마 끝까지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누군지도 모른다면 뭐하러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믿겠어요?

우리의 믿음이 지금은 이렇게 보통 믿음 같지만 시련과 박해가 있을 때면 놀라운 진가를 드러낼 것입니다.

지난 주 어떤 집사님과 대화하다 불교든 천주교든 교회든 다 자기가 마음을 다스리기 나름 아니냐는 말에 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안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누구와 비교하고 누구와 저울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망의 문을 지나서 만나게 될 분은 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시지 그 누구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 더 확실하게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2. 다음은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형되시자 주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일까요?

이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의 모세와 엘리야에 대해서 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시대를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은 모세와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역을 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아 백성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혈중 알콜 농도가 0.2%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법이 없다면 만취하고 차를 몰아도 죄가 안 되는 것이잖아요?

도둑질하지 말라고 율법이 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죄라는 걸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자기의 죄를 깨달으라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죄 용서해주겠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은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이게 하는 매를 든 선생의 역할인 것입니다.

이 율법을 내세워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 모세가 오늘 증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책망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잖아요?

엘리야는 단연코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엘리야는 강력한 이적을 통해 실제 국민들의 마음을 바알신에게서 여호와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다 알다시피 죽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구원자가 오시기 전 이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전처럼 백성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철저히 그리스도와 이어져 있는 것이죠.

물론 엘리야가 다시 땅에 내려와 그 사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 엘리야를 상징하는 세례요한이 그 사역을 대신 한 것이죠.

오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 앞에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렇게 예를 들면 좀 쉬울 것입니다.

선거에서 보면 유명인들이 출마자 누구를 지지한다고 공개할 때가 있죠.

그것은 그들의 노선과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는 모세와 엘리야가 온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가 다 예수님께로 집결된다는 뜻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도 필수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이뤄졌습니다.

신약성경의 몇 가지 말씀들만 만지작거리다 이생을 졸업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더 깊고 풍성하고 복된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요?

같은 변화산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대화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수천년의 세월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시행시켰던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한 인간의 구원입니다.

이제 그 위대한 구원의 성취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세상사람들은 그야말로 자다가 엉겁결에 엄청난 선물을 덥썩 받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졸았다고 합니다.

잠결에 일어났기에 초막을 세 개 짓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류역사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오신 하나님께는 아들의 속죄가 임박한 이 순간이 한편으론 가장 큰 고통이요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수능을 앞 둔 자식 얼굴만 봐도 부모 마음이 젖어들잖아요?

군입대를 앞두고 있다면 이친구 저친구가 만나서 밥 사주는 건 힘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숙원사업구원의 역사를 이제 막 성취하시려는데 천국이 조용했겠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셔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 얘기하며 경의를 표하고 주님께 힘을 실어드리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인자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어요?

아무도 십자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잖아요?

가장 가까이 두셨던 세 제자는 오늘도 졸다 깼고겟세마네에서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고독하고 뼈가 깍이는 십자가의 길을 혼자 준비하신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아버지의 위로가 한편 오늘 변화산 사건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오두막 세 개를 짓자고 할 때 갑자기 빛난 구름이 모두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서도 빛난 구름은 빛이신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것이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성부하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그 음성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아들을 보증하시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법적으로 양자된 자녀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빛을 발하는 예수님을 보고도 여전히 랍비여선생이여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비슷하게 여겨 초막을 셋을 짓는다고 한 것이잖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내 아들이라고 하니 더 이상의 논란도 의혹도 필요 없는 것이죠.

신성모독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듣도록 그 음성으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

물론 들으라는 말은 들은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종교인 천지신명을 믿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 때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에게서 완전 벗어났잖아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각색해서 믿습니다.

하나님이 당장 간섭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뭐하러 힘들고 까다롭게 믿겠어요?

쉬운 방법내 욕심도 좀 채울 수 있는 방법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 가장 쉬운 예가 고르반 전통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생계를 위해 드려야 할 돈을 하나님께 헌금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도 지킨 것이 된다고 자기들이 정한 것입니다.

두 배로 써야 할 돈을 반만 써서 두 가지 율법을 지킨 걸로 치는 것입니다.

고스톱 전문용어로 한다면 일타쌍피 같은 것이죠.

이게 얍삭한 인간이 머리를 굴려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혹독하게 책망하셨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렇게 다 자기 욕심이 끌리는 대로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안 들으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내용인즉 대부분 우상에 복을 비는 우상숭배와 같이 됩니다.

지난주 사울왕이 순종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하셨잖아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단지 이 땅에서 잘되고 잘살려는 욕망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의 관심이 이 땅에 치우치고먹고 사는 문제가 치열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그것만을 위해서 지치도록 살아간다면 그 다음은요?
내 영혼의 복됨을 누가 채워줍니까?

나의 다음 생애를 누가 보장해 줍니까?

매일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진짜 내 영혼을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의 말씀을 자꾸 듣고 하루하루 그 말씀대로 지키는 것 만큼 더 복된 삶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영광 중에 하시는 말씀에 두려워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졌습니다.

아직 그들의 죄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지 않았기에 본성상 그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마치 법관 앞에서 오금을 못 펴듯 우리 앞에서 떨고 있다면 그걸 보고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주님이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중한 존재지만 죄로 인해 차마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주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가여웠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이가 들어가니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다 가엽다고 하더군요.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그 중에 나 자신이 제일 가엽지 않나요?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구원받기 전까지는 다 가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여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일으키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복되게 섬기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 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제사장이 예수님의 오심을 확신하며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가서 구할 수 있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늘 말씀으로 다시 심정을 새롭게 하고 염려로혹은 자만으로 가득 찼던 세속적인 마음을 성령의 은혜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모든 삶을 이 신앙 위에 다시 세우며 가장 값지고 행복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7월1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