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국가적으로 큰일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남북문제가 잘 진전되어 한반도에 평화가 오도록, 또 국가의 새 일군들이 바른 양심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 무슨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나라를 위해 기도는 매일 해야 합니다.
나와 내 자식들 우리 가족의 평안을 누가 가져다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구해서 얻고 누려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세 납부 문제를 놓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세금문제는 어느 시대건 예민하죠.
특히 동전을 입에 물고 낚시에 걸린 물고기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고 유쾌한 기적입니다.
세리였던 마태는 이 성전세 문제에 다른 제자보다 더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관심을 갖다보면 깨달음이 오죠.
그래서 오늘 성령님을 통해 깨달은 성전세의 비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 말씀이 짧은 일화이지만 우리에게도 그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오늘 일어난 일이 사람 사는 일, 일상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면에서 말씀 묵상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씀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공감할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지방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본동네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돌아 온 것을 본 성전세 징수원이 베드로를 붙잡고 말하죠.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성전세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일년에 한번씩 성전유지와 보수를 위해 반 세겔씩 내는 세금입니다.
당시 반 세겔이면 노동자의 사흘정도 품삯이니 요즘 돈으로 하면 한 삼십맘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도 이 세금을 아직 내지 않았던 것이죠.
‘너의 선생은 왜 세금을 내지 않냐’는 말은 단순한 독촉이 아니라 좀 비꼬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성전세 징수원은 예수님에 대해 나쁜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종교귀족들 사이에서 예수님은 유대교 전통을 깨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잖아요?
예수님이 성전세를 안 내시냐는 말엔 선생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기본도 안 지키냐는 조소가 섞여 있는 것이죠.
또 한편으론 그런 예수님을 선생으로 믿고 따라다니는 베드로도 한심하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 다니더니 수중에 돈 반 세겔이 없어서 당연히 내야 할 세금도 못내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성격하잖습니까?
아마도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고기잡이로 돈을 벌고 쓰던 때가 생각났겠죠.
세금 독촉에 돈을 못 낸 베드로가 더 퉁명스럽게 말했을 것입니다.
‘누가 안낸다고 그랬냐, 내신다’
이렇게 말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베드로의 심정이 좀 착찹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 넓은 갈릴리 바다를 주름잡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부르셨잖아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 따랐지만 이렇게 수중에 세금 낼 돈 한 푼도 없는 처지가 된 것에 갑자기 울컥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전처럼 잘 살고 있는데 예수님 따르다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교회 올 준비를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잖아요?
사람이 잘 버티다 신세한탄에 빠지는 건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일에서입니다.
큰 빚에는 이를 악물고 견디다가 당장 필요한 돈 몇 푼이 없을 때 사람이 확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라 생각한 게 곧 입으로 나오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기분이 잔뜩 상해 안으로 들어온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요즘 조세 원칙은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입니다.
대통령 아들이라고 세금 면제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왕권주의사회에서는 왕자들에게 세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만 해도 왕자들과 공신들은 세금을 면제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좀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히 타인에게 받죠, 뭘 그런 걸 다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베드로가 이 말씀에 정신이 버쩍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런 의미잖아요?
‘그렇지? 성전세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아들들은 안 드려도 된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해결해야 할 빚이 아들들은 다 청산되었다’
지금 잔뜩 속상해서 들어온 베드로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뭘 그런 일로 믿음도 없이 풀이 죽었냐고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언제고 세상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우리가 가진 구원이 얼마나 소중하고 더 현실적인지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틀림없이 이 말씀에 힘을 얻고 믿음을 다시 소환했을 것입니다.
짧은 몇 절의 말씀이지만 이렇게 곱씹어 보면 예수님이 약한 우리 마음을 읽으시고 가장 현명한 처방을 내리시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생업에 지치고, 집에는 여전히 근심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때로 베드로처럼 한방에 넘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베드로가 세상적으로 볼 때 그렇듯이 성도들도 세상에선 어느 정도 고난 중에서 삽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 변하지 않는 확고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영광스런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사실을 다 알면 우리가 먼저 놀라 자빠질만한 많은 죄들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완벽하게 면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잠시 초라한 처지가 된다 해도, 현실이 맘에 들지 않고 불평스럽다 해도 우리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장차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되새기며 이 믿음으로 늘 스스로를 힘있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를 통해 전해주는 핵심은 예수님께서 성전세 문제를 구원의 문제로 연결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도 대부분 하늘의 일보다 땅의 일, 생활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교회에 옵니다.
그 해답을 하나님께 듣고 싶어 합니다.
성경은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항상 우선적으로 챙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장차 누릴 영원한 생명과 복된 내세입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그 문제가 바르게 되어야 생활의 문제들도 그 뒤를 따라갑니다.
왜 오늘 성경은 이천년 전의 성전세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까요?
사실은 바로 이런 것들, 지금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되는 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우리에게 재미있게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물고기까지 동원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세는 국가에 내는 의무세가 아니라 성전 보수와 유지를 위해 내는 헌금 같은 성격의 세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을 설명하고 상징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성전, 성막, 유월절 양, 대제사장, 안식일, 만나,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들, 이외 수많은 것들이 다 예수님을 암시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약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시는 것이죠.
그런 예표물 중에 ‘속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늘 성전세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속전의 유래는 출애굽기30장11절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뒤 자신이 거하실 성막을 세우게 하시고 명령을 주십니다.
이스라엘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호구조사가 된 사람은 반드시 속전을 내라는 것입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이 속전은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죠?
누구나 똑같이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더 내도 안됩니다.
이 반 세겔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용도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다시 한번 속전이 생명을 대속한다고 하시죠?
처음엔 인구조사 시에만 드렸던 속전이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매년 드리는 성전세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속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데 돈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죄 지었으니 속죄 받고 구원받으려면 돈을 내라는 것이죠.
그런데 구원받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라고 하십니까?
한 삼십만원 된다는 것입니다.
단돈 삼십만원 내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은 죄가 많으니 한 1억쯤 내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구원에 대한 속전이 턱없이 작은 금액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이 작은 돈이 구원받기 위한 실제 금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많이 내지도 말라는 것은 구원은 아무리 큰 돈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구원의 값이라고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액수 반세겔을 속전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반 세겔이 실제 구원요금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울사도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 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반 세겔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고,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이유는 속전이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속전을 한번도 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미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속전을 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속전으로 챙긴 사람만 하나님 앞에서 사면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성경들은 실핏줄처럼 서로 얽혀 그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진리가 힘차게 맥박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영혼의 살이 차오르고 점점 더 아름답고 견고하고 풍성한 믿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의 진리는 그렇게 얄팍하지 않습니다.
그 넓이와 깊이가 한이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들을 더 열심히 배우고 더 풍성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더 삶이 지혜로워지고 더 여유있고 능력있는 생활인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세금을 내자
여기서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비해 사람은 얼마나 경박하고 무지하고 악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주제도 모르고 주님을 오해하고 비난할 때조차 그 사람을 멸시한 적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믿음 있는 성도들이 믿음 없는 사람들을 속으로 무시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과 무관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저 세금징수원도 실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면 속전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알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갖는다면 어떻게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겠습니까?
사람이 마음에 빗장을 지르면 누가 강제로 그걸 열겠습니까?
은혜를 받는 것도 가만히 보면 먼저 마음이 열린 다음 귀가 열립니다.
왠지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부드럽고 좋은 마음이 되면 곧 귀도 열립니다.
성전세징수원이 아직 진리를 모르니 오해하지 않게 차라리 세금을 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믿음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때론 전도도 안 될 것을 갖고 신앙의 고집을 피울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너그러우심을 보십시오.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순교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설령 그것이 신앙이라는 명분이 있다 해도 내가 죽는 것만이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주장할 때는 정말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친한 사람,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들에 대해 너무 팩트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이기에 남이 모르는 약점과 단점을 우리가 다 알잖아요?
대화하다 보면 그 단점들이 다 나오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대화에서 시비를 따지고 태클을 걸기가 쉽습니다.
꼭 사실만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동조해 주고 긍정적인 반응만 보여도 아마 가정이 훨씬 더 화목해 질 것입니다.
안 믿는 가족이라면 교회로 나올 시간이 더 앞당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해서 성전세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27절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가버나움은 갈릴리바다 지척에 있습니다.
갈릴리바다는 베드로의 일터였죠.
제가 가버나움에 갔을 때 점심으로 노릇하게 구운 베드로고기구이를 먹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잡았다던 동전을 입에 문 그 고기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일 많이 잡히는 물고기가 이 베드로고기입니다.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만찬에도 이 베드로고기 요리가 나온 것 모르시죠?
문대통령의 어린 시절 고향 부산에서 많이 먹었다는 이 생선은 우리나라 이름으로 ‘달고기’라고 합니다.
아래턱이 윗턱보다 크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작은 물고기들을 쭉 훑어서 먹는다고 합니다.
이 베드로고기가 어떻게 해서 동전을 물게 되었는지 그림이 나오죠?
바닥에 가라앉은 동전을 같이 집어 삼켰는데 목에 걸렸다고 해야 하나요?
여기까지는 자연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낚시대를 던지는 순간 그 고기가 낚여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바닷속 일을 아시고 그 물고기가 베드로 낚시에 걸리게 하셨을까요?
다른 이적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기적이 예수님이 행한 기적 중에 특별히 대단한 기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큰 위로와 믿음을 주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을 뿐 아니라 땅의 삶에 있어서도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직 어부였지만 예수님을 따른 이후엔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가서 자기 힘으로 먹고 살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성전세 내게 가서 하루 일해서 돈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 열두명을 데리고 삼년 반을 먹이고 생활을 책임지셨다는 것은 대부분이 가난하던 그 당시에 기적입니다.
그들이 호의호식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다 돌보셨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에게 전도의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 여러 마을로 흩어서 보내셨습니다.
그들 손에 여행 경비를 줘서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물으시죠?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제자들이 모두 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셨고, 설령 함께 있지 않을 때조차도 주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하고 세금도 내고 카드대금도 내고 의식주를 위한 경비들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처럼 내 힘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고기 잡는 일은 이전에도 베드로가 하던 일이고 잘 하는 일입니다.
낚시를 던지는 일은 노련한 베드로가 했지만 무엇이 낚일지는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시고 꼭 필요한 것을 잡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이렇게 기적적으로 인도해 오셨고 앞으로도 이렇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일자리는 감소하고, 사업장은 문을 닫고, 실업률은 늘어나는 불황의 그늘 속에서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무엇보다 우리의 속전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잘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영원한 내세의 복을 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 현재도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생활의 염려와 앞날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 물고기 입에 동전을 물려 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약한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하신 주님을 본받고 우리의 언행에 사랑과 너그러움이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통해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항상 믿음으로 기도하며 확신을 갖고 굳건한 걸음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8년6월17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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