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이든 어르신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카톡 정도는 하십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합니다.
어떤 정보들은 삶에 엄청난 위력을 주죠.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 가상화폐에 눈을 뜬 사람들이 막대한 이익을 이미 챙겨 갔잖습니까?
물건 하나를 싸게 사려고 해도, 저렴한 맛집을 찾으려 해도 인터넷 검색이 필수인 시대입니다.
혹시라도 중요한 정보를 놓칠까봐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세대에 대한 우려가 여러 분야의 연구를 통해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 니콜라스 카에 의하면 빠른 시간에 여러 정보를 훑어보는 생활이 사람들의 두뇌까지 바꾸고 있다고 합니다.
청소년들, 젊은이들은 아마 이런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기 전이나 집중해야 할 과제들을 앞에 두고 자꾸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싶고, 인터넷을 켜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어느새 손이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죠.
이런 일이 단순히 의지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사용이 많아지면서 뇌가 기술위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의 빠른 정보 기술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점점 한 가지에 깊이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뇌의 특성 중 신경가소성이라는게 있습니다.
잘 안 쓰는 경로가 퇴화되고 자주 쓰는 경로만 발달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면 계속 빠르게 수집하는 기능만 남고, 체계화시키고 깊이 사고하는 지식의 영역은 점점 텅 비게 됩니다.
5백년 뒤엔 바보만 남는다는 영화도 있잖아요?
이런 현상은 자연히 신앙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젠 깊이 생각하고 의미를 따지며 설교에 집중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죠.
찬찬히 성경을 묵상하며 읽는 것도 과거 신앙인들에 비해 더 어렵습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는 또 어떻겠습니까?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유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경건의 삶을 따라야만 하는데요.
목회자들의 고민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깊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피상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해하고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값싼 것도 아니고, 참 믿음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갖가지 기적을 눈으로 본 사람들조차 주님을 잘 몰라 우왕좌왕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11장 서두에선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에 대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세례요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어서 그렇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사역초기에 집중해서 전도했던 곳은 고향 갈릴리의 도시들이었습니다.
5장부터 9장까지가 갈릴리전도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바로 앞에 보면 가장 많은 이적을 보이시고 힘써 가르쳤던 고향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도시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통해 이들이 오해했던 주님이 어떤 분이고 어떻게 구원을 주시는 지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복음서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한 핵심 단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구원에 대해 더 분명한 지식을 얻고 신앙생활에 좀 더 힘을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1. 먼저 구원에 있어서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셨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구주로 영접했고 다른 부류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비판하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믿는 데, 왜 다른 이들은 믿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25절에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지금도 구원의 방법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누군가에겐 숨기시고 누군가에겐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구원이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본주의이고 믿음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맘대로 하면 인간은 뭐냐는 것이죠.
하나님이 근본이 아니고 사람이 중심이고 근본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모든 만유의 원인자이신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완전한 세상제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심중에 곰곰이 생가해 보면 내가 신본주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인본주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본주의적인 믿음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성경을 배우며 주님을 따른 중에 신본주의적인 믿음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인간의 지혜로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있다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판단하려 들 때 하나님은 진리를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만하다 심판받은 것이 바로 앞에 나온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고 하신 것을 보면 가버나움 주민들이 오만하고 교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동네에서 설교하실 때 이들이 숙덕거리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겨우 생활가구나 몇 개 만들어 팔며 근근이 먹고 사는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만 알았기에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평가합니다.
예수님을 한번 믿어 보자라고 하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당장 예수님과 교회를 얕잡아 보는 태도를 보이잖아요?
오늘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숨기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감추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알만큼 지혜롭다 생각할 때도 하나님은 감추십니다.
그러면 신앙이 안개 속을 더듬는 것 같이 막막해 집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통달한 것처럼 굽니다.
내가 이젠 뭔가 신앙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감추셨기에 그런 무모하고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너무 안다고 자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더 안전합니다.
그러니 너무 믿음이 부족하고 아는 것이 없다고 위축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항상 믿음이 부족하고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백배 낫습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구원을 나타내주시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지혜로운 사람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라고 한 것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무식하고 순박하다고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전에 청소년부를 맡았던 유목사님이 대치동에 개척을 하셨습니다.
지난 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교회가 아주 번잡한 거리에 있어서 왕래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교회 건물에만도 많은 상가들이 있었는데 교회 바로 옆 방에 고시텔이 있더군요.
유목사님이 거기에 거처하는 어려운 분들을 전도하려는 데 결코 쉽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 팔십 되신 할머니가 한 분 계신데 커피한잔 드시라고 해도 절대로 안 받으신다고 합니다.
배운게 많지 않고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되는 분들도 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세상을 산 만큼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세상사람들은 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자신하는 축에 속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어린아이 같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어린아이라고 하신 게 이런 사람의 본성을 통찰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이야말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윤우가 성경을 배우는 데 어린아이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신뢰감을 주는 사람들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하고 사고의 능력이 생기면 믿은 것들이 정말 믿을만한 것인지 확증해 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배우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수용적이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타할아버지도 믿잖아요?
경건하고 신실한 성도들에게 공통적인게 무엇입니까?
성경과 하나님을 어린아이 같이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린아이의 특징은 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분리될 때 불안감을 느낍니다.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나 보호자 없이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잘 믿는 성도들일수록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적입니다.
분명히 남보다 더 능력이 있고, 뛰어나게 잘 하는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더욱 의존합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독립적입니다.
의존한다고 무능해지고 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 본인은 점점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 분께 기대어 사는게 안전하고 만족하다는 것을 경험과 직관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 같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성경을 가르쳐 보면 정말 스폰지 같이 쫙 빨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정말 한 말씀도 심령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같이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친히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어떻게 갖게 되는 것입니까?
27절에서 말씀하시죠?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소원대로 선택하고 계시를 주는 자를 말합니다.
25절에서는 복음을 숨기고 나타내시며 구원을 주도하는 분이 성부하나님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십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의 완벽한 일체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지 않아서입니다.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주신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아버지도 안 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불행이 그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오해한 것을 보면 실은 하나님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철저히 결속되고 본질적으로 일체이시기 때문에 한 분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부하나님을 압니다.
단순한 믿음이란 구원의 원리에 대해 무지한 것과는 다릅니다.
말씀을 받았을 때 어린아이 같이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이런 어리아이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더욱 주님에 기대어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3. 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일이 28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초청하는 자들이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로는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사람들만, 예수님께서 택하셔서 계시해주시는 사람들만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믿게 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막판에 가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까는 택한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을 계시하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모든 이들을 다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택하시고 정한 사람만 믿고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먼저 알 것은 구원에 대한 모든 과정과 원리들은 우리 지혜로 훤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은밀히, 불가사의하게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눈으로 안 보입니다.
본문 말씀이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말씀한대로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고, 믿고 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 사실을 압니다.
내가 스스로 와서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의 진리를 다 모르고 믿음도 없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식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라면 오늘 초청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에서 배운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스스로가 마음을 결단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고, 자기 가 결단하고 회개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 한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님 앞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다 지치도록 수고하고 허리가 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잖아요?
학생들은 늘 공부의 짐이 무겁고, 장년엔 가족부양의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노년에 이르면 질병과 죽음의 짐이 무거워집니다.
젊은이들은 직장에서 시달리며 막연한 미래의 짐을 지고, 주부들은 자식문제와 생활고가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는 늘 지쳐 있습니다.
아무런 인생의 짐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왠지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의 짐을 지고 삽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짐입니다.
왠지 벌 받을 것 같고,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것은 그 짐을 벗기시고 영원한 구원의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 땅에서 우리가 짊어진 모든 무거운 짐들은 그 죄의 결과물들입니다.
죄의 짐이 벗겨지면 당연히 그로 인해 발생한 삶의 무거운 짐들도 벗겨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의 댓가를 다 치르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깨닫고 믿을 때 죄로 인한 심판의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설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기쁨으로 기대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화평과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실제적인 무거운 짐들도 점점 떨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삶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지고 감사가 입에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그 원인은 29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여전히 과거의 죄성 대로 살기에 죄의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얹히고 얹혀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해졌기에 이젠 죄의 습관에서 돌이켜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그냥 듣고 믿기만 하면 저절로 내게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축복과 약속에는 반드시 전제조건들이 달려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에 아멘 했다고 그냥 내게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중에도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 정성껏 헌금을 모아 보낸 빌립보교인들의 믿음과 노고에 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부유한 중에도 가난한 교회를 돕는 연보에 참여하지 않았던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말씀을 주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도 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시잖아요?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죄의 멍에를 내려 놓은 대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멍에가 무엇입니까?
창조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 것, 무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않으면 삶에서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분노와 시기와 미움으로 들끓는 마음에 어떻게 쉼이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서 교만과 열등에 휩쓸리고 대접받고 높임받기만을 원하는 마음에 어떻게 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셨던 멍에를 우리도 메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한 계명을 메고 배우는 것이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아닐 것 같지만 그 짐은 가볍습니다.
교만과 자랑과 분노와 분쟁의 멍에를 메는 것보다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메는 것이 훨씬 인생을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배우고자 하면 성령께서 절반은 도와주시기 때문에 이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시는 분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렸다면 우리 중 누구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에 이른다고 자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끝까지 손을 잡고 천국으로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확고한 것입니다.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영원한 구원의 안식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어린아이같이 기쁘게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세상과 미디어와 인터넷의 그물에 옴짝달싹 못하고 붙잡혀 세월을 보내지 말고 시간을 아껴 경건을 훈련해 가시길 바랍니다.
겸손과 온유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멍에를 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항상 쉼을 얻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2월4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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