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분들은 입학원서나 이력서를 제출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당락을 확인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조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뜁니까?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에 따라 어떻든 인생이 달라지잖아요.
기대가 무너지고 불합격을 확인했을 때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한 번의 낙방으로 다시는 기회도 없고,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장소에 갇힐 수 밖에 없다면 그 결정의 순간이 얼마나 두려울까요?
오늘 예수님은 미래의 어느 날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장면을 아주 생생한 비유를 통해, 누구나 알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엔 마치 목자가 뒤섞어 기르던 양과 염소를 분리해서 각각의 우리에 집어넣듯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해 영생과 영벌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리고 왼쪽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오늘 이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신 종말에 대한 비유설교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구원과 멸망의 단 두 운명으로 나뉜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김세0 박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큼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동시에 구원만큼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것도 없고 구원만큼 사람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주제도 없다.’
구원에 대해 얼만큼 이해하고 계십니까?
구원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어떤 문제보다도 이시간 우리의 내세, 그 영원한 삶을 어떻게 살게 될지에 진지하게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이 비유 말씀의 주제는 세상에 끝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말씀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날에 우리는 심판주이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예수님에 대해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판을 사실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31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는 독특한 호칭으로 부르십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시는 걸 자주 보게 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인자’라는 호칭을 사십 번 정도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왜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하시는 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인간 교주들은 오히려 자기를 신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는데 정작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인자’라는 호칭은 다니엘서에 예언 된 종말의 환상 속에 나옵니다.
다니엘서7장13절에 보면 다니엘이 먼 미래에 세상을 심판하고 모든 민족을 영원히 통치하실 종말적 그리스도의 환상을 봅니다.
빨리 찾으실 수 있으면 찾아 보십시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최종적인 광경을 환상으로 본 것이죠?
그런데 그 천국의 통치권을 옛적부터 알고 있던 여호와하나님이 다른 이에게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분의 모양이 마치 사람의 아들, 인자 같은 이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게 되는지 다니엘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이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속죄하시고 부활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심판의 권한을 받으시는 모습을 다니엘이 오백년 전에 본 것입니다.
다니엘에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인자가 되신 하나님은 온 우주의 가장 큰 신비이고, 그렇게 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성육신하신 자신을 즐거이 인자라고 호칭하셨습니다.
또 다니엘의 환상을 통해 보여주셨던 세상을 다스릴 그 심판자, ‘인자 같으 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기에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실 때는 앞에다 ‘그’를 붙이셨습니다.
영어로 하면 그냥 sun of man이 아니라 the Sun of Man입니다.
바로 성경에 예언 된 ‘그’ ‘사람의 아들’ 이시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자’라는 말엔 인간의 몸으로 오신 구원자 하나님과 심판자 하나님의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 하신 그 사람의 아들만이 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람을 위해 죽으셔서 심판을 피할 길을 열어 주셨으니까요.
이 세상나라에 종말은 이렇게 수많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증언되었습니다.
또 신약시대 사도들도 수도 없이 세상 끝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같이 예수님 자신이 종말과 구원과 심판을 증언하셨습니다.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를 보며 저런 인간의 문명과 유산들이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종말 이전에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민족간의 큰 전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보존해야 할 환경을 파괴하고 평화를 원치 않는 폭력성에 이끌려 온 세상을 전쟁의 도가니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이 그 고통을 겪어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그 날을 감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있으리라.
그렇게 거대한 돌무더기가 된 문명의 잔재들과 더 이상 쓸 수없이 파괴 된 끔찍한 자연세계를 그 날에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던 태초의 무로 되돌리실 것입니다.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이면엔 무너지는 인간성과 커져가는 잔혹성이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미쳐가잖아요?
이번에 뉴스에 보니 자식의 목에 개 줄을 묶어 질식해 죽게 하는 세상입니다.
열일곱 소녀가 초등학생을 죽이고 시신에 까지 손을 대는 끔찍한 사건 소식이 우리를 경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파괴하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끊고 악을 행한 자들에겐 영원한 형벌로 다스리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악인의 끊임없이 솟구치는 악한 본성을 철저히 억제하고 끝까지 통제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영원히 죽지도 않는 그 악인을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다니엘이 환상을 통해 미리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또 요한사도가 보고 계시록에 기록해 놓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장면은 반드시 이 땅을 떠난 모든 인간들이 현실로 마주하게 될 미래라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복받은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는 가장 기쁘고 복된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그런데 오늘 임금이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심판하는 원칙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본문을 제대로 읽으셨다면 이런 의문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왜 구원의 기준이 믿음이 아니라 선한 행실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심판하시는 주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영생과 영벌을 선고하는 기준이 지극히 작은 성도에게 착한 일을 했냐 안했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른 편에 선 의인들에게 지극히 작은 성도에게 한 착한 일이 곧 내게 한 것이기에 너희는 천국을 상속 받으라고 하시잖아요?
너희가 나를 잘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면 자신이 있겠는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일에 기준대로라면 우리의 구원도 좀 불안한 것 아닙니까?
이 비유는 얼핏 보면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쪽에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다른 쪽에선 착한 일로 구원받는다고 모순 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 증거로 오늘 말씀한 착한 행실들이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믿음의 추상성과 종교성에 대해 계속 심각하게 경고해 오셨습니다.
그날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다들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겠죠.
본문을 보면 오른쪽의 의인들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왼쪽의 악인들도 예수님을 똑같이 ‘주여’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악인들이 너희가 나를 공경하고 돌아보지 않았다는 말씀에 대해 거세게 항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았냐고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우리가 손발을 걷어 부치고 나섰을 텐데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냐는 것이죠.
이들도 분명히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드렸겠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다 주관적입니다.
자기 믿음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받을 믿음인지 아닌지 몰라서 자신도 속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어땠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고, 모든 종교의식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자기들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은 따르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하시던 말씀은 그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것입니다.
나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나쁜 열매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게 아니라 열매로 입증된다는 것이죠.
추상명사로 생각했던 믿음이 사실은 동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생관의 변화로 시작해서, 행동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천국을 상속받은 것은 단지 착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착한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참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날에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믿는다고 우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각자의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들 생전의 행위로 진짜 믿음을 판단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섬기듯이 성도들도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에게 명령하신 계명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느냐 정말로 나를 믿는다면 고난당하는 내 형제를 돌보았을 것이다.
오늘 오른쪽의 의인들이 돌보았던 성도들은 게으르고, 운이 없어 고난당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기에 모든 것을 뺏겼습니다.
그래서 배고프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성도들입니다.
이들을 향해 마음이 동하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은 공동체성 안에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옵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영적생명과 도덕적 실천과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라도 떨어져 나갔다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성령을 받고 새생명이 된 순간 성도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교회에 접합이 되어 영적 가족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의 법을 준행하며 살게 됩니다.
아무리 바쁘건, 사정이 여의치 않던, 예수님의 성도가 되면 이 증거들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생활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집에서 살림만 하는 일도 여유롭지 않습니다.
똑같이 힘들지만 거듭난 성도들은 말씀과 기도생활 속에서 생명이 계속 성장합니다.
삶이 계속 조금씩 바뀝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헌신이 뒤 따라 옵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가 믿음과 생명을 가졌다면 반드시 공동체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기 때문에 그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아무리 먼데 있는 성도의 일이라 해도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형제가 되면 무관심하고 냉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혈육인 부모와 형제와 자식 일에 마음이 동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얼마 전 이란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 아민 아프샤 나데리의 사정이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댓가로 그는 모든 것을 뺏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민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신앙에 대한 모독을 견디다 못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보고 이란이 종교탄합을 멈추기를 바란다고 이란 정부에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한번도 본적 없는 성도들이 박해를 당할 때, 왜 지구촌 반대편에서 석방운동을 벌이고 신변을 걱정하고 후원금을 보냅니까?
북한에 억류 된 임현0목사님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이 18만4천명을 넘었습니다.
한 성령께서 그가 우리의 한 지체라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죠.
아픈 성도가 있으면 병원에 찾아가고 어떤 성도에게 부족한 것이 보이면 어떻게 도울지 생각하게 됩니다.
억울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문제로 같은 아픔을 느끼며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도 서로 이렇게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무얼 그렇게 매주 싸들고 와서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시는지 모릅니다.
그게 왜 그렇겠습니까?
그냥 집에 가면 그 성도의 필요가 생각나서 주섬주섬 챙기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들이, ‘저 성도에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해야되겠다’ 그래서 합니까?
그냥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초대교회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을 때 기억나시죠?
자기의 집과 땅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눠주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게 아닙니다.
본문에서 착한 일을 한 성도들도 그걸 별로 인식하지 않고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 그랬나요?’ 이런 식이죠.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된 성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서로를 돌아보며 헌신하며 믿음 안에서 서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고난을 받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는 오는 박해가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지 모릅니다.
인생고 뿐 아니라 마귀의 훼방이 있고 믿음의 연단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을 굳게 지켜 함께 천국을 상속받기 위해서 서로에게 지원군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 미국 플로리다에서 조류에 휩쓸려 죽기 직전에 있던 일가족을 80명의 피서객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를 연결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닿아 구출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중간에 잡았던 손이 끊어지면 누구든 급류에 휩쓸려 죽을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순식간에 모여든 사람들은 인간띠를 만들어 아홉명을 구조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서로를 붙들어 주고 힘이 되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과 미숙한 성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도 통하지 않고 혐오스러운 성격까지 갖고 있는 직장 동료나 이웃이라면 말도 섞고 싶지가 않죠.
그러나 상대가 성령 안에서 한 형제가 아니라 해도 우리의 행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세상사람들과 뭐가 다르냐고 하셨습니다.
죄인들도 끼리끼리는 다 사랑하지 않냐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빼도 박도 못하게, 부인할 수 없게, 성도들에게 형제사랑과 세상에 대한 관대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긍휼과 선행이 없다면 그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관적인 믿음과 얼마나 다릅니까?
내가 원하는 식으로, 내 소견대로 믿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을 보장받을 믿음은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 중심, 형제를 위한 이타적인 삶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듣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확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냐는 것으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천국의 교훈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천국이 되는 것이죠.
아름다운 환경에 물자가 넘쳐나고, 절대 늙지 않고, 쇠약하지 않는 건강이 있고, 영원히 산다 해도 거기 미움이 있고, 분노가 있고, 원망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욕심이 있다면 거기가 천국이겠습니까?
내가 모두를 사랑할 수 있고,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주며 사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기에 천국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국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 할 때 우리에겐 즉시 천국의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려면 노력보다는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사랑은 우리 본성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미운 사람 억지로 사랑하려고 이를 악물어 보면 그게 절대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사랑하고.
안되면 또 기도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이곳에서 성도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천국의 상속자라는 증거라는 예수님 말씀을 잘 순종하여 항상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7월16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11장25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0) | 2018.02.07 |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새가족초청예배설교:마태복음7장13절-14절) (0) | 2017.10.24 |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마태복음25장14절-30절 ) (0) | 2017.07.14 |
마태복음22장41절-46절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4) | 2017.06.27 |
다시 살아나시다 (마태복음28장1절-10절) (0) | 2017.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