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성경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이 마주보이는 감람산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틀 앞 두고 하신 이 감람산 설교는 인간역사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고, 기독교의 전승은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다시 재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올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감람산에서 하신 오늘의 달란트비유는 서로 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충성이 중요한 주제 같이 보이지만 구원과 심판이 핵심 주제입니다.
마지막 결론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오늘 우리의 달란트와 구원에 대한 비유를 잘 깨닫고 모두가 착하고 충성 된 종들이라 인정받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먼저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큰 재산을 가진 한 주인이 타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 중에 큰 몫을 떼어서 맡깁니다.
아마도 주인은 큰 사업가였을 것입니다.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것은 그걸 자본금으로 주인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라는 지시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종들에게 다 똑같이 돈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화폐가치가 지금과 다르지만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한 달란트를 요즘 임금으로 계산하면 수억 정도의 거액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수억의 거액을 받은 것이죠.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처리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열심히 사업을 해 두 배의 이익을 남겨 주인에게 큰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장사를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놓았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주인 앞에서 내쫒기고 받았던 한 달란트마저 뺏깁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살아야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살면 안된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착하고 충성 된 종으로 사는 것이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들에게 나눠준 달란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액의 현금을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주인이 나눠 준 달란트라는 화폐는 현대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달란트에서 나온 ‘탤런트’라는 단어는 재능과 소질을 의미하죠.
그래서 이 비유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로 많이 해석합니다.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단지 그렇게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은사를 받고도 봉사를 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거든요.
착한 일과 봉사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행위구원에 해당합니다.
구원의 유일한 기준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달란트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재능과 봉사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인이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나눠 준 달란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모든 소유 전부를 말합니다.
사람의 전인격과 인생 전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창조해 보내실 때 각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셔서 보내십니다.
사람의 지능과 성격, 의지 뿐 아니라 태어난 환경과 교육, 지식,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누가 자기가 원하는 걸 스스로 다 챙겨 갖고 태어났습니까?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사람마다 갖고 태어난 달란트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적게 받아서 가난하고, 실력이 없고, 키가 작고, 외모가 못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할 것은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나 동일한 판결을 내립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각자의 달란트가 크냐 적으냐는 주인의 계산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받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로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수고하는 인생을 사는 차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달란트대로 평생 충성한다 해도 장차 받아 누릴 천국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주인이 맡긴 달란트는 그야말로 맡긴 것이지 소유권을 넘긴 게 아닙니다.
이걸 받아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이 인생에 대하여 가르쳐주시는 두가지 중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인생은 주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이게 아니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런 설정 자체가 바르지 않으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나를 감독하고 착취하는 엄하고 딱딱한 기업체 사장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소유를 갖고 주인을 위한 사업을 하는 것이지 자기 사업을 하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소유와 믿음과 재능들이 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주인이 그냥 나눠주고 끝낸 게 아니잖아요?
18절에 ‘결산처리’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이 땅의 생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장차 예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인이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종들에게 소유를 맡긴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생애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대에 맞게 이 땅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 땅의 생애는 앞으로의 본격적인 삶을 위한 관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 끝나는 게 아니고, 본격적인 삶은 내세에 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들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압니다.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이 쥐어 준 거액의 자본을 들고 나가 즉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달란트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게 이렇게 힘들고, 이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여기저기 다니며 일하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까지 하냐고 생각한다면 그게 인생에 대한 설정 자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음식을 만들고 있든, 세일즈를 하든, 직장을 다니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 그걸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지가 사업의 목적인 것이죠.
달란트비유는 단지 교회 안에서 내 삶의 일부를 어떻게 충성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 삶 전부가 하나님을 향해 조정되고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인간의 본분이고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하시잖아요.
내가 목표를 정하고 나를 위한 일을 하는 것만 신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한 성공한 사람이 이런 독백을 하는 영화가 있죠.
왜 자기 일에 성공했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까?
오히려 자기를 위한 일만 해서 그렇습니다.
내 일이 하나님의 일 자체가 되면 식상할 틈이 없고 불행할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사람의 본분이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그런 복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의 소유를 맡아서 일하는 종들에게서 억지로 일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즉시 가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밍기적 거리고 마지못해 나섰다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사업이 재미있었을까요, 괴로웠을까요?
당연히 재미있었겠죠.
수억을 벌어들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이런 확장과 번성이 있고 그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단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수고라해도 십억의 가치에 비하겠습니까?
세상에서 나를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을 늘려가고 호화스럽게 사는 것만 즐거운 게 아닙니다.
나를 위해 돈만 계속 쓰고 다녀도 나중엔 공허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인생에 하나님은 진정한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을 주지 않으십니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 할 때의 분위기를 보면 얼마나 흥분과 기쁨이 느껴집니까?
종들은 사업이 잘 된 게 너무 신기하고 놀라고 기뻐합니다.
‘보소서, 주인님. 제가 십억이나 더 벌었나이다’
종들을 대하는 주인의 기쁨도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이 없는 동안에 사업을 훌륭히 해 낸 종들 때문에 주인은 크게 기뻐하고 흥겨워합니다.
이건 좋으신 하나님과 충성된 성도들만이 주고 받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소유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을 보면 점점 더 충성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저러다 재산이 남아나질 않겠다, 언제 자기 시간을 갖고 취미생활도 하고, 자기를 가꾸겠나.’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충성과 봉사는 늘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습니다.
착한 종들이 섬기는 착한 주인은 종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결산한 뒤 남은 돈을 어떻게 합니까?
다섯달란트만 가져가고 이익으로 남은 다섯달란트는 종들에게 다시 돌려줍니까?
아닙니다. 열 달란트 전부를 다시 종에게 돌려줍니다.
28절에 보면 게으르고 악한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뺏어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죠?
종이 열 달란트를 다 돌려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인과 종의 관계가 바로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예수님의 종이 될지언정 과거에 내가 주인되었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혼란과 불안과 공허와 실망과 두려움과 죄악으로 돌아가느니 선하신 왕의 종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인은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창조주시고, 나를 다시 구원하기 위해 친히 목숨을 버리신 구속주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십니다.
그 주인의 큰 기쁨과 행복의 나라에 영원히 참여하는 것만도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리고 그 좋으신 주인이 결국 지금 충성하고 섬긴 모든 것을 더 좋은 것으로 영원히 돌려 주실 것입니다.
앞장 47절 비유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이 종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말을 해댑니다.
5억이나 되는 돈을 은행에도 안 맡기고 땅을 파고 묻어둡니다.
그러면서 셋 중에 말은 제일 많이 합니다.
원래 일 안하는 사람들이 말은 제일 많죠.
장사에 자신도 없고, 자본을 날릴 것도 두렵고, 주인은 무서운 사람이고, 그래서 차라리 원금만이라도 보존하려고 땅에 묻어 놓았다는 것이죠.
주인도 이 종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심판을 내립니다.
‘정말 그랬었다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까지 내놓아야 맞지 않느냐’, 그리고 종을 판결합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아’
영락없는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칭찬받은 종이기 보다 심판받은 이 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게으르고 악한 종과 같이 처신하고 심판을 당할 영혼들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천국 아버지 앞으로 나갈 영생하는 길을 열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알려하지 않고, 이 땅의 생애를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다 뺏기고 고통스런 영벌을 받은 종에게서 받을 교훈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는 주인과의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이 아무 수고도 없이 종들만 부려 착취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종의 생각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었나, 생로병사로 고통 받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지금 신은 뭐하고 있냐.
그들은 인간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선사하시려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이미 창세부터 축복된 나라를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고통은 인간의 죄가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고 흠없는 세상을 만드셨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영원히 쫒겨나게 된 천국을 다시 돌려주시기 위해 지금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괴팍한 신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신뢰하지 못하면 충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속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한 아무 봉사도, 헌신도, 충성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삶의 주인인 줄 알고 평생 오직 자기를 위해 갈고 뿌리고 거둘 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게으르고 악한 종은 주인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자기와 식구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 사업을 했을 것입니다.
이 게으르고 악한 종은 자기의 생애가 주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초대를 땅에 묻어 버리는 죄인들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우리를 진지하게 비춰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생명까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애는 억울한 삶이 아닙니다.
무미하고 건조한 딱딱한 삶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사는 성도들의 기쁨과 받을 복을 우리가 깨닫고 아름다운 충성으로 이 땅을 살길 원하십니다.
물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 종들의 사업에 힘든 일이 없었겠습니까?
힘들게 뻔하니까 악한 종이 달란트를 묻어 놓은 것이잖아요?
우리도 때로 주님을 위해 수모도 당하고, 땀과 눈물도 흘립니다.
세상이 편해 보일 때 보이지 않는 천국을 스스로에게 확신하며 자신을 추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섬기는 우리의 수고는 주님이 인정해 주시고 주님이 정해주시는 영원한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나와 내 자식이 받은 달란트가 작다 해도 하나님을 위해 드리면 절대 시시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목동의 삶을 드렸더니 왕을 만들어 주셨잖아요?
다니엘이 포로의 삶을 드렸더니 바벨론제국의 총리가 되게 하셨잖아요.
요셉이 그랬고, 어부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한 셈법을 아십니까?
있는 사람은 점점 더 가져 풍성하게 되고, 없는 사람은 결국 있던 것조차도 다 뺏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달란트를 묻어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않고 묻어 둔 모든 것은 다시 가져가십니다.
믿음도 힘써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지 않고 묻어 두면 어느 순간 없어집니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많이 보았잖아요?
또 우리가 사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입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음식을 만들어 팔고,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일들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공헌할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
생업은 단지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닌 주님의 사역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017년7월9일 주일설교 남수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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