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욥만이 유일하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라는 불멸의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와 함께 태어나 시계소리 속에서 쫒기 듯 살다 맞춰 놓은 스톱워치가 멈추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씨를 갖고 있다는 것이죠.
요즘은 죽음에 대해 논의가 되는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처럼 되었지만 요즘은 누구나 죽음에 대해 논의합니다.
유서도 미리 작성해 보고, 입관체험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기에 맞이하는 연습을 하자는 것이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죽음만큼 인간에게 절망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영원한 부활이 없다면 저는 굳이 기독교신앙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과 돈과 재능을 왜 영원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바치겠습니까?
이렇게 화창한 봄날, 꽃구경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만큼 가련한 자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와 함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에서 믿는 십자가의 대속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가 입증되지 못합니다.
구원에 관계 된 이 모든 원리들이 아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죄가 없으신 우리의 대속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냥 한 의로운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 세상에서 잊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이 성공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현대인들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이 명제인 세상에 부활이란 쉽게 믿어질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곰이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는 신화 정도로 인식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부활을 믿을까요?
미국의 한 장로교단 목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열 명 중 여섯, 일곱명이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의 실정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은 부활에 대해 104번이나 언급합니다.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에 대한 지식을 이 성경에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부활이라는 역사를 알 때 부활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해하고 믿는 것만큼 나의 부활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막연히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더라’ 정도로 알아서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더 확신하는 은혜가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과 같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선 부활에 대한 역사적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빈 무덤을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천사가 이렇게 말하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저야 성지순례 중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눈으로 보았다지만 안 가보신 분들은 어떻게 빈 무덤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천년이 지나 제가 본 빈 무덤도 마리아가 본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지만요.
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는 방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전해 준 사람들의 말 속에서 이것이 팩트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정말 비어 있었는지 성경을 꼼꼼히 따져 보셨습니까?
의심이 많은 인간들은 확실치 않은 사실을 믿으려고 할 때 여기저기를 찔러 보고 무수히 탐색합니다.
새 물건을 하나 살 때도 그러니 돈을 투자하거나 새사업을 시작할 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덮어 놓고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부분을 뽑아서 주님의 부활이 이렇게 정해졌고 예고되었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분명히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지었던 시편16편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또 요나가 사흘을 물고기 뱃 속에 갇혔다가 나온 것이 예수님이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다는 것을 암시한 내용임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메시야가 고난당해 죽는 모습을 53장에서 말한 뒤, 다시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말한 내용을 짚어 주셨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물인 주님을 앞에 놓고 부활이 맞는지 틀리는지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주셨으면 그만 아닙니까?
굳이 구약성경에서 찾아서 가르쳐주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앙이 보이는 현상보다 기록된 말씀에 기초할 수 있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성경이 전해 준 것을 따져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 일어났다는 증거는 성경의 부활기사 속에 빛나고 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객관적 증거를 하나 대라고 하면 무엇을 대시겠습니까?
마태는 객관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활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거면 충분하다’ 는 것입니다.
바로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공회원이며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요청해 자기를 위해 파놓은 새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총독 빌라도을 찾아갑니다.
그 무덤을 좀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27:63)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경비병들이 인봉한 예수님의 무덤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무덤 주변에 큰 일이 일어납니다.
지진이 나고 번개 같은 형상의 천사가 내려와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냅니다.
경비병들은 이 광경이 너무 무서워 죽은 것처럼 되었지만 열린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해 대제사장을 찾아가 무덤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사실을 보고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기이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당국자들이 모였지만 방법이 있을리가 없죠.
결국 경비병들에게 큰 돈을 주고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내라하는 선에서 시신이 사라진 사건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엔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몰래 훔쳐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회에서도 기정사실이였다는 것이죠.
대제사장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면 내놓았지 이런 소문을 퍼뜨릴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네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든지 아니면 제자들이 훔쳐갔던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게 더 쉽겠습니까, 제자들이 군인들이 잠든 틈에 무게 1톤이 되는 돌을 굴려내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는 게 쉽겠습니까?
몇 주째 주님의 십자가의 뒤를 좇았던 우리는 제자들의 실상을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런 용기를 낼 수가 없던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밤에 무덤에 잠입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빼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추론도 해보십시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박해받고, 순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했다는 죄목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시신을 훔쳐다 감추고 나서 부활했다며 자기 목숨을 걸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도 열두명 씩이나요.
어떤 측면에서 보건 예수님의 부활은 진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인과적, 정황적 증거들이 있지만 오늘 다 나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먼저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증거들을 알고 그 확실성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 물어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객관적인 근거를 우리는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남들은 설득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부활이 나 자신에겐 이해가 되어야 하고 나 자신은 설득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빈 무덤의 역사적 현장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고 천사의 말과 예수님의 생전의 말씀대로 부활을 인식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뿐 아닙니다.
경비병도 이 사실을 인식했지만 그들은 돈을 받고 이 큰 일을 덮고, 무심하게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제사장들이요?
누구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가능성을 직감한 사람들입니다.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시신을 찾아서 부활이 아님을 밝히려 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들은 자신에게 지금 어떤 소중한 기회가 지나쳐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 문제를 덮어두기로 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 밝혀진다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자신의 주인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십니다.
부활하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섬겨야 할 왕이시라는 것을.
그때 그 감동을 덮어두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나중에.’
‘지금은 그냥 좀 멀리서 주님을 따르고, 나중에.’
로마서는 우리가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의 방법이 명료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우리의 창조주 주인이시고, 다시 우리의 주인이 되시려고 더러움을 씻어 주신 것이잖아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드디어 섬길만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본인은 부인하려고 해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마귀가 주인노릇 하는 것이라고 성경만이 진실을 말씀해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흠모할 인격자시고 죄악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하시려 십자가에 오르신 분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처음에 신과 함께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주님은 여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부활하시기 전에 여인들은 선하고 인자하신 랍비, 하나님나라의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 선생님인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들이 그 사실을 깨닫고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하잖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왠지 두렵고, 왠지 가까이 하기엔 엄청난 분이시란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찾으신 예수님은 전혀 과거와 다른 분이 아니셨습니다.
다들 평안하냐
며칠 전과 똑같이 안부를 물으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못난 제자들은 여전히 형제였습니다.
‘가자, 갈릴리로. 거기서 우리 다시 만나자.’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은 ‘자 이제 됐으니 예루살렘을 접수하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시골마을, 거기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던 하나님나라, 약자들과 함께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에 하나님은 별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신실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하나님으로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 뭐가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이런 예수님의 인격의 향취를 조금씩 맡아가며 우리는 점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두려움 없이 친밀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도들, 내게 오는 자들을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다시 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믿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기에 그곳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게 미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만 나하고는 경험적으로 통하는 게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유학을 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니, 미국이란 나라가 내게 실제적으로 관련이 있는 나라가 되더군요.
천국은 자연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주님이 거기 계시기에 실재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분명하게 깨닫게 된 영적 사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이미 천국에 계시다는 것이 한 줌 재가 되어 묻혀있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한줌 재가 더 현실인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신기하게도 천국에 계신 어머니, 어머니가 계신 천국이 더 현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먼저 부활의 주님을 따라간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생의 삶도 무한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백스터라는 분은 이렇게 우리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잠시 후면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 죽었어.’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직면해 있다는 것입니다.
늘 내세를 준비해야 합니다.
젊은이도 언제 스톱워치가 멈춰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겐 죽음의 씨만 있던 영혼에 부활생명의 씨가 심겨지고 이미 영생의 생명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이 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고 두렵지도 않은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이해되고 주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구원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지금 내게 해야 할 일이 많고, 지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부활의 주님을 좇는 것을 주저하고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 부활신앙이 해결할 수있습니다.
부활신앙은 내세만 위한 것이 아니라 현세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가진 제자들은 숨어있던 다락방을 나와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자, 주님을 위해서 나를 불태우자.’
그리고 이 부활신앙을 우리에게 전수하고 당당하게 주님 앞으로 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그렇게 두렵던 죽음조차도 이긴 것이죠.
죽음도 이기는 부활신앙이 아무리 어렵다 한들 삶을 이겨내지 못하겠습니까?
오늘 인생이 평안하고 잘되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았지만 여전히 무덤 같은 어둠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더 깊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도록 어려움 중의 우리에게 힘을 북돋워주시고 강하게 단련하시는 줄 믿습니다.
곧 사라질 이 땅에 지나치게 애착하지 말고 장차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될 내가 잘 되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관심을 영원으로 점점 옮겨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7년4월16일 부활주일설교 남수연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마태복음25장14절-30절 ) (0) | 2017.07.14 |
---|---|
마태복음22장41절-46절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4) | 2017.06.27 |
고난주간 설교 (마태복음27장45절-56절) (0) | 2017.04.11 |
마태복음26장57절-68절 (가야바의 법정에서) (0) | 2017.04.05 |
마태복음26장1절-16절 (유월절 어린양과 십자가) (0) | 2017.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