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사는 게 고난이었는데, 또 고난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없으시죠?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승리이고 한없는 영광임을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인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마태는 그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여러 가지 기적들이 있었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기적현상들은 눈에 보이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 뿐 아니라 십자가의 더 깊은 내막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기적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정오부터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을 덮었던 어둠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정오부터 온 땅에 어둠이 덮혀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상현상은 마태만 성경으로 전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역사가 플레곤이나 탈루스 같은 사람들도 그해 유월절 정오에 기이한 어두움이 덮였다고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대낮의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아모스8장9절 같은 경우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것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즉, 오늘 대낮의 어둠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죄를 지은 인간 당사자가 아니라 세상 죄가 얹혀진 어린 양 예수님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은 이 어둠을 기이하게 여기지만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인식하진 못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십자가 위의 주님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하나님이 그 영광의 얼굴을 돌리실 때 인간이 당할 그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당할 심판은 하나님의 그 영광에서 영원히 격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밝은 빛이 오늘도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에 하루의 날빛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심지어 어두운 밤의 짙고 은은한 빛조차도 아름답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인과 연인들이 아름다운 밤을 노래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영광으로 어둠도 아름답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아름다운 얼굴 빛과 그의 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바라보고 인자를 베푸시고 미소지으시기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인들조차도 각자의 인생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피조물에 끊임없이 부어지기에 만물이 생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한가닥 소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어집니다.
그래서 불신자들 가운데도 의롭게 살고 남을 돕고 양심과 도덕이 올바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은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졌던 좋은 성품과 선의가 사라지고 원초적인 본성만 남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숨기지 못하고 드러난 본성적 악을 지닌 채 죄의 값을 치르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후서 1장9절에서 이렇게 종말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간 처절한 고통과 절망감을 예수님이 당하고 계시기에 의지했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영원히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 버려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태어나신 독생자십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었던 예수님은 이 땅의 구속사역 중에 늘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죄인들의 속죄자로 매달리셨을 때,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버려지셨습니다.
주님 위에 얹혀 진 온 인류의 죄가 더럽고 역겨워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없기에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사랑에서 끊어지신 성자하나님의 고통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좀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아무도 주님이 당하신 고통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그 공의의 엄중한 심판을 당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영혼이 파리해지고 절망에 부르짖던 그 최후의 심판의 고통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고통은 단지 주님이 당하신 신체적인 극도의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주님 곁에서 함께 처형당했던 두 강도와 같은 자연적 고통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영화를 보고 슬퍼했다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 로사를 걸으실 때 그 참혹함에 오열하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눈으로 보여지는 이 이상의 심판의 고통을 위해 회개하며 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원히 버려지는 고통은 단지 피부가 갈갈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 피투성이가 된 육체의 공포스러움 수준이 아닙니다.
결코 우리가 당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그 저주와 심판의 두려움으로 인해 부르짖는 주님의 외침 앞에 감상의 눈물이 아닌 진정한 회개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또 구약성경의 수많은 예언들이 다 성취되는 기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주님의 이 버려지는 고통도 이미 다윗의 시편을 통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22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48절에 십자가상에서 신포도주를 받으시는 것도 시편69편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34절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먼저 이들이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 했다고 합니다.
쓸개와 초를 마시게 했다는 시편의 예언과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합니까?
35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군인들이 주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22편18절이 예언하고 있죠.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윗의 생애 중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손과 발에 못박히신 것도 22편16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내 손과 발을 뚫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언제 손과 발이 찔리고 뚫린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천년 후에 일어날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숨이 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대속에서 예고 된 이 모든 일들이 그대로 성취되는 진기한 광경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 예언 되어 있던 그 말씀들이 성경 여기저기서 튀어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스스로 성취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계획되어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 앞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실을 믿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안 믿기가 더 힘든 거 아닌가요?
다음 기적은 예수님이 죽으신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두 조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섬기는 제사장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무서운 저주요 불길한 징조로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휘장은 지성소 안에 임재 한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죄인이 즉사하지 않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입니다.
휘장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죄인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 이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죄인을 가로막았던 단절이 제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10장20절은 사건을 잘 해석해 줍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동안 하나님 앞으로 나가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야 했던 죄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지성소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야 살지만 죄로 인해 나갈 수 없는 이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 휘장입니다.
휘장이 지성소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빛을 가려줌으로 제사장들은 그 앞에서 백성들을 대표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이죠.
이 휘장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속을 완성하고 죽으신 순간 주님은 휘장 되었던 자신의 몸을 완전히 찢어서 아예 길을 만드셨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에 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완전히 단절 되었던 아버지께 가는 길, 본향으로 가는 길을 주님의 죽으심으로 확 열어 놓으셨고, 그 길을 통해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다른 길은 없습니다.
또 주님이 돌아가신 순간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소생한 일입니다.
무덤에 장사된 시신들이 다시 회생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을 때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죽은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부활을 생각해보시면 이들의 부활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완전히 성취하신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무덤 문이 터지고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종말의 부활에 대한 확증으로 보여주신 상징적인 기적입니다.
주님의 속죄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고, 성도들은 이렇게 사망에서 구원을 받고 부활의 생명을 영원히 누린다는 것이죠.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본보기로 그날 무덤에서 잠을 자던 성도들을 깨워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이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현실이 좀 어려워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여유가 있고 문제를 낙관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사도가 말씀했죠.
만일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우리는 없는 것 같지만 있는 자이고, 약한 것 같지만 이 부활생명이 있기에 죽음도 이기는 강한 자들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결론입니다.
몇 주에 걸쳐 예수님의 십자가를 좇아 우리는 오늘 주님이 못박히신 십자가 아래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 사실을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체험하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 고난주간에 한번 생각하며 슬픔과 비탄에 잠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큰 고통을 받고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고 합시다.
부모님이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그 모습이겠습니까?
그것보다는 그런 고통을 감수할 만큼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 마음이나 예수님이 심판의 그 육중한 무게를 지고 죽으신 마음을 그렇게 이해해 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런 고생을 했는데, 넌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느냐’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한 자기의 희생을 희생으로 생각하고 공치사하겠습니까?
자기의 희생을 계산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지시던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처럼 변하는 성품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그 위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 바로 이 순간에도 이천년 전과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반드시 우리를 과거와 다른 삶으로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에도 들어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주님이 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겠어요?
내가 한 고생을 너희도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다음 그 결과에 만족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결과로 주어진 기쁨과 보람을 생각하면 너희도 십자가는 꼭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단지 세상에서 당하는 인생고가 아닙니다.
세상의 인생고는 우리 죄의 결과로 따라온 고충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나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기 위한 신앙적인 노력과 희생들, 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충성된 행위, 이런 것들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 옛사람, 자아를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의 죄의 옛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얹혀 같이 심판을 당했잖아요?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자아, 자기 욕심, 죄성, 세속을 좇는 본성 같은 것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무던 애를 썼습니다.
오늘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설교는 들어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라고 부추기는 설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는 성취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 된 자아가 원하는 대로 성취된 결과가 바로 최근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그 사람들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바울사도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리는 나의 본성을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삶,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에 결코 죄와 한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도 이기게 하고, 힘든 삶도 그 사랑의 힘으로 이기게 하고, 짧고 소중한 이 땅의 삶을 가장 보람찬 십자가를 지고 당당히 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실과 사랑을 믿으시고, 주님의 몸을 찢어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 영원하고 복된 나라에 다 이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4월9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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