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나라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박전대통령의 구속과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였을 것입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여기에 쏠렸었죠.
이 사건의 핵심이 흐려지지 않고 공정하고 명백하게 진실이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 ‘사건의 핵심’이란 말을 씁니다.
핵심이란 영어 단어는 ‘크럭스’인데 라틴어 십자가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핵심이고 인간의 운명의 핵심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 십자가가 나의 삶을 바꿨다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핵심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일들을 이루는 핵심도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그런 체험 가운데 살아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나의 모든 죄를 속죄해주셨고 심판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누구인지, 인간은 왜 속죄가 필요한 죄인인지, 2천년전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내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런 것들이 이해되고 믿어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일 이 구원의 진리가 이해하기 쉽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있겠습니까?
값없이 내세의 천국을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 믿잖아요?
예수님께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많은 사람들에겐 이해가 안되는 아리송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겐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구원을 믿기에 이 구원의 원리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좇기 전에 이 십자가의 원리를 다시한번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속죄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속죄를 위해서 먼저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가 없는데 속죄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사도도 로마서에서 서두 몇 장에 걸쳐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심중에 다 있음에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부패하고 타락한 죄목들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 저녁 뉴스만 봐도 점점 더 세상이 손 댈 수 없이 악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숨쉬기가 힘든 미세먼지처럼 죄가 온 세상에 쫙 깔려 가슴이 답답해지죠.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죄의 결과로 가장 큰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건 인간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어가며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지만 결국 그 죄가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벗어나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의 칼을 겨누고 계십니다.
속죄가 왜 필요하냐하면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다면 속죄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죄를 짓고 살다가 죽어서 끝이면 속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땅에서 법적 처벌을 요리조리 피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살다 죽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권력을 이용해 자행 된 거대한 불법과 불의에 대해 큰 분노를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공의롭게 심판이 될지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동안 법이 공의롭지 않다는 트라우마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뒤안길엔 억울한 죽음이 묻혀있고, 지금도 무고한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심판할 심판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머리털보다 더 많은 우리 평생의 죄를 다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머리카락 한가닥의 착오도 없이 공의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옥이라는 감옥에 갇혀 자기의 모든 죄값을 영원히 치르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성경은 공표합니다.
지옥이 없다는 것은 기독교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으로 죄값을 치르셨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겐 죄가 있고 죄에 대해선 심판이 있고, 심판의 결과는 지옥의 영벌이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과 영벌을 피하기 위해서 속죄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절대로 그냥 덮어주실 수 없습니다.
단 누군가가 그 벌을 대신 받는다면 그것을 인정해주시겠다고 일찍부터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에덴에서 쫒겨 날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죠?
아담이 죄를 짓고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대충 몸을 가렸을 때 죄없는 동물을 잡아 옷을 지어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하나님은 대속을 인정하는 제도를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의 희생제사와 유월절 양이 다 대속제도를 공식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내 대신 지옥의 형벌을 당해주겠어요?
만일 구해오라면 그런 사람 구할 수 있습니까?
부모도 자식도 안되고 아무리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안됩니다.
혹시 있다해도 그들 역시 심판받을 입장이기에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대속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꺼이 처벌을 대신할 만큼 무한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무죄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죄를 속죄해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진실되고 겸손하고 사랑이시고 흠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오셨고 일평생 속죄자로서 흠없이 완전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이해가 필요한 또 하나의 문제가 있죠.
어떻게 예수님이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일일이 속죄해주실 수 있냐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죄가 어떻게 이 땅에 모든 인간들에게 들어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압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범죄한 즉시 본성이 죄로 물듭니다.
그 죄 된 본성이 후손인 모든 인류에 대물림됩니다.
자식이 부모 성격 닮는 이치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죄에 오염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원리가 반대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처럼 대표로 세우신 한사람이 순종하고 대속의 벌을 받음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값이 다 치러질 수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으면 한 사람으로 인해 속죄도 가능한 것이죠.그런 대등한 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예수님을 첫 번째 아담과 대조시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된 다음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이해와 체험은 다릅니다.
이해가 보편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라면 체험은 ‘그것이 바로 나구나’라는 개인적인 깨달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죠.
이해의 차원에서 체험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분명히 그 차이를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가 체험적으로 깨달아지면 문리가 트이는 것처럼 땅과 하늘의 일에 눈이 열립니다.
영이 죽어 자연 세상밖에 모르는 인간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면 하나님과 천국이 인식됩니다.
야곱이 보았던 천사가 오르내리는 사닥다리 환상은 예수님을 통해 이 땅과 천국이 다시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죠.
너희가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십자가가 체험되면 내게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발라져서 유월절처럼 심판과 지옥의 형벌이 넘어갔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집니다.
더 이상 마귀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사망과 저주가 물러갔고, 죄인의 신분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옵니다.
이 이해와 체험의 경계선을 넘어서면 진짜 내 생애의 핵심이 주님이 되고 내가 어디에 기여하며 살아야 할지가 정해집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모든 삶이 조정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 되고 그것이 나의 썩지 않는 자산이고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반면 십자가가 이해의 차원에 머물면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에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과 같이 현실이 덮칠 때 우왕좌왕합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멀찍이 주님의 뒤를 따랐다고 하죠?
돌아서서 안 믿을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믿고 헌신할 수도 없는 갈등하는 이 경계인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깨닫는 과정에는 십자가의 진리가 이렇게 선포되야 하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와 듣는 사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누군가의 마음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를 들은 모든 성도님들께 깊이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깨닫게 설득하시도록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더 바짝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런 선이해를 갖고,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죄로 인해 당하는 모든 인간의 고통이 얹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삼천만원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었죠.
제자들은 당사자인 예수님 앞에서 이런 낭비가 어디있냐며 분개했습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가족과 자식들이 이런 야속한 말을 해서 마음에 못을 박을 때가 있죠.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당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은 이미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에서 특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육체와 감정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삼년 동안 가르치고 사랑했던 가룟유다의 배신에 뼈저리는 아픔을 느끼셨기에 배신당한 사람의 상처를 아십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그대로 알아만 줘도 참 위로가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시잖아요, 나도 당해봐서 네 마음 안다.
또 본문에 보면 진실이 왜곡되고 억울한 판결을 받으시죠.
우리가 억울한 오해를 받고 속이 상할 때 주님이 그 심정을 이해하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뺨을 때립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할 수도 있는 모든 멸시와 천대를 주님은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시간 동안 육체의 가장 큰 고통중에 사망을 경험하셨습니다.
더 큰 고통은 완전하게 사랑하고 연합되었던 성부하나님의 진노와 미움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향해 이를 갈고 미워한다면 그게 지옥의 고통이죠.
하나님이 인간사의 모든 고통을 몸소 당하셨기에 시험당하는 우리를 도우시고 그 고통을 진지하게 공감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전지전능하시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쓰라린 심정을 똑같이 느끼실 수 있는 주님의 도우심은 그래서 다릅니다.
히브리서가 이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니 죄악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체휼하신 주님 앞에 무슨 문제인들 기도하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이 모든 고통을 얹으신 것은 똑같이 고난받는 자녀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오늘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핵심적인 진리를 증언하고 계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시고 피의자 심문을 받습니다.
물론 이미 사형은 정해져 있고 심문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요즘처럼 그렇게 많은 재판광경을 이전엔 본 적도 없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다 배심원이 된 느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판은 철저히 불법재판이었습니다.
앞서 주님은 유월절 저녁식사를 마친 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신 뒤 유다가 끌고 온 군병들에 의해 체포되셨습니다.
제가 저번에 가보니 겟세마네동산과 예루살렘에 있는 가야바의 집은 걸어 다닐 정도로 지척에 있습니다.
그 한밤중에 이미 가야바의 집엔 예수님에 대한 긴급 재판을 위해 산헤드린 이라는 의회의 공회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은 새벽 무렵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 재판 후에 예수님은 다시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즉시 형집행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때가 아침9시경입니다.
체포되고 재판받고 형집행까지 걸린 시간이 12시간이 채 안됩니다.
마약사범을 즉결처형하는 두테르테대통령도 아니고 이런 재판은 말이 안되는 것이죠.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증인들을 불러 세웠지만 마땅히 사형선고 할 죄목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변론할 생각을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묵비권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형언도를 받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교활한 가야바는 증인채택이 실패하자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죄목을 유도하는 질문으로 일격을 가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유죄를 끌어낼 바로 그 질문,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번엔 오히려 입을 열고 말씀합니다.
‘네 말이 맞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불의한 악인들의 속셈을 알고도 분명히 진실을 밝히셨습니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는다는 말씀은 다윗의 시편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을 영광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죠.
‘너희들 눈으로 장차 내가 영광의 보좌에 앉은 것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그 예언대로 심판자로 오는 나를 보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과 장차 모든 악인과 선인들이 주님의 영광과 심판을 보게 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죄목은 정해집니다.
대제사장이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쫙 찢으며 소리칩니다.
‘신성모독이다’
‘사형시키는 게 마땅하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심으로 결국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그리스도라고 말하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받은 십자가형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한 종교적 망상자의 죽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장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고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죽으심은 성경이 말해온 대로 속죄의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종교망상가의 죽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의 죽음으로 볼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이 되셨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 십자가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사랑, 인간이 되셔서 그 고난을 당하시고 피 한방울도 남김없이 흘리시며 죽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그렇게 우리 죄가 지긋지긋하고 처절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이 바로 내가 당할 심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분명한 진리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거절하고 현실의 권력과 명예와 부를 선택한 이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산헤드린은 국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종교지도자가 되고, 장로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권력을 휘두릅니다.
자기들이 차지한 권력에 위기감을 느끼자 진실되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려고 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영원토록 이 권세와 영화를 누리다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주려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불명예스러운 자들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죽인 사악한 자들일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로부터 사십년이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나라가 사라집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영원히 누리려했던 예루살렘의 영화로운 삶은 성전과 함께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들은 가장 먼저 끌려나와 처참하게 살해를 당합니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망했습니다.
시편 37장 10절에서 말씀한대로입니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셨으니, 주님의 진실한 증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해의 차원을 넘어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고, 기도하며 우리 삶의 핵심을 예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은사와 선물을 우리 영육에 풍성히 내려주실 것입니다.
2017년4월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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