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트럼프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바람에 온 세계가 다 뒷통수를 맞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미국사회는 지금보다 더 돈이 최고인 천민자본주의로 대변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선거 결과를 보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즈에, ‘우리가 우리나라를 너무 몰랐다 ’라는 글을 기고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나라를 너무 몰랐다고 지금 자책하고 있잖아요?
여성대통령이 권력형 비리는 좀 덜 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너무 몰랐더군요.
요즘 격변하고 격동하는 주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마치 폭풍 속에 표류하는 본문 속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때이지만 이럴수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신앙의 기본을 잘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삶에 바르게 적용함으로 복있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으시는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베푸신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은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흔한 시대가 아니지만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기적을 베푸십니다.
다만 성경시대엔 초자연적인 형태였던 것이 지금은 대개 자연적인 형태에 담겨있다는 것이 다른 것이죠.
지난 한 주도 우리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별 탈 없는 시간을 보낸 것 같지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수없이 역사하셨습니다.
특히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잘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큰 축복을 주셨고 지금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아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 나와 무관하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본문이 속한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이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며 오늘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의미와 이 기적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관련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본 사건은 세례요한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참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도시를 떠나 빈들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마음이셨는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주최 측 추산 남자만 오천명,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이만명에 육박하는 큰 군중을 이루었습니다.
14절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아픈 다리를 절둑거리며, 누군가는 가족의 등에 업혀서, 다들 가난과 절망에 찌든 얼굴로 한 줄기 희망을 기대하고 각 처에서 예수님께 몰려온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가 분명하게 나타나죠?
가지가지 인생고에 시달리는 인간들이 불쌍해서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돈 없고 의료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엔 병고치는 기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병원도 못가고 고통 받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고, 성도들 역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밖에 없었거든요.
이 두 가지 상황이 달라진 지금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적인 치유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만 의술과 의약을 통해 자연적인 치료과정을 거쳐 낫게 하십니다.
발목을 삐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료를 기도하는 것 보다 정형외과 가서 치료받으며 잘 낫기를 기도하는 게 더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이치를 역행하는 기적에는 신중하고 인색하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지구환경과 우리 몸에 가장 완벽하게 맞는 자연의 법칙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기적은 자연의 법칙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간섭하신 기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김광해권사님 딸 은혜자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급경사 커브를 돌다 차가 균형을 잃고 뒤집어져 두 바퀴나 굴러서 차를 완전히 폐차 시켰습니다.
그런데 은혜자매는 그날 직장에 일하러 나갔습니다.
외적으로 상처 한군데가 없고 약간의 근육통 외에는 아픈 곳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보험금도 새 차를 살만큼 나온다고 하니 참 다행입니다.
누가봐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날 빈들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고통당하는 병인들에 대한 긍휼과 연민 때문이었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질병의 치유는 내면의 치명적인 죄로 부터의 치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맹인이 눈을 뜨고, 저는 자가 고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듣는 이런 기적은 메시야가 할 일을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성취시킨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적을 통해 구원의 진리들을 다각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죠.우리는 이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선지자들을 통해 무수히 예언 되었던 바로 그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 날 예수님께서는 또 한가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상을 먹이신 기적이죠.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돈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15장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사흘씩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직장도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싶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생생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끼니가 없는 굶주림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약함을 다 체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변호자, 중보자가 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단지 굶주린 사람들이 불쌍해서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들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 곧 자신의 몸을 보리떡처럼 찢어 생명의 떡으로 나눠주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빈들에서 행하신 이 기적은 특히 모세와 광야시절에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와 연관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던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가 생명의 양식이었고 그 만나 기적 자체가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죠.
이것이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일차적으로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신 육적 필요에 대한 공급이고, 거기엔 영적 의미가 있고, 예수님의 구속사에 대한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죠.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태워 강 건너편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만족하게 끼니를 해결한 군중들이 예수님이야말로 고기반찬으로 식탁을 차려주실 메시야라고 확신했던 것이죠.
그래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갔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이런 메시야 추대 소동에 제자들이 휩쓸리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급히 조처를 취하시고 모인 백성들은 다 해산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우 이생의 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 몸을 속죄의 제물로 주심으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영생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환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십자가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기도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녁 무렵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를 건너기 시작한 제자들이 한밤중이 되어서도 여전히 바다 가운데서 표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에,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제자 중에 뱃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경험만으로는 배를 컨트롤 할 수 없을 만큼 거센 바람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고생하는 것을 다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이 사건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주시는 것일까요?
오늘 갈릴리 바다의 시련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늘 대비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신속히 내려오지 않으신 것은 어떤 시련들은 오랜 시간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고 이런 시련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단련하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시련의 때를 우리가 항상 대비해야 하는 것이고, 뜻밖의 고난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강한 믿음과 담대한 마음뿐입니다.
갑자기 질병으로 몸이 무너지고, 가정이 깨질 정도의 관계적인 문제들이 터지는 데 그게 돈으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믿음이 강해지고 마음이 단련이 되어야 부닥쳐 이겨내는 것이죠.
잠언 24장10절에서 말씀하잖아요.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낙담하면 하나님도 도우시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신앙의 훈련을 꾸준히 계속해서 해나가야 합니다.
기도훈련, 성경공부, 큐티를 통한 매일의 삶에 적용하는 훈련, 이런 것 없이 격한 풍랑을 이겨낼 재간은 없습니다.
연단과 훈련이 부족할수록 그만큼 힘들게 인생의 풍파와 싸우고 번번이 상처와 손실을 크게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강할수록 사는 힘도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날 시련을 통과하며 배울 것을 다 배운 다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이들에게 오십니다.
분명히 이날 밤 풍랑 속에서의 사투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때에 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가 가장 좋은 때임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서두르다 실패하거나 보채다 낙담하지 않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에는 제자들의 고된 시련을 도와주시기 위한 주님의 마음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자연과 만물을 창조하셨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이 너울이 높게 이는 깜깜한 바다를 걸어오시는 모습은 얼마나 장엄하고 위엄이 서려있습니까?
그런데 꼭 그런 이유만으로 바다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왠지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다급했고, 거기엔 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없다고 물 위를 걸어오시다니요.
이건 예수님답지가 않으십니다.
또 제자들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앞에 보면 벌써 말씀으로 파도를 꾸짖어서 잠잠케 하신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특이한 기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실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으신 기적은 다른 기적들처럼 메시야의 사역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메시야가 바다를 걸으신다는 것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냐는 것과 또 그 의미가 무엇이냐를 찾아봐야 합니다.
우선 여기서 제자들을 괴롭히고 난동을 부리는 흉악한 바다는 성경에서 종종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성경 많은 곳에서 바다를 마귀의 세력이 있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사탄의 출생과 타락에 대해 기술한 내용으로 알려진 에스겔서 28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사탄이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에 비겨 바다를 차지하고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바다는 곧 사탄이 자리를 편 세속세상을 상징하는 단어라는 것이죠.
또 이사야서 27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이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악을 징벌하고 세상거민들에게 평화를 주실 메시야의 날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봅니다.
13장1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여기서도 바다에서 마귀가 나온다고 하죠?
이렇게 사탄을 바다와 비유한 내용들이 성경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굳이 밤에 날뛰는 바다 물결을 밟고 걸어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을 발로 밟으신다, 즉 그 세력을 파멸하시는 구속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뿐 아니라 사탄의 세력은 멸망시키시는 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악을 심판하실 것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큰 물의 파도를 밟으실거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지금 예수님께서 악을 심판하고 구원을 이루실 분임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뜬금없이 베드로가 자기도 좀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오라고 그러시잖아요?
이게 무슨 ‘믿음이 있으면 너도 물 위를 걷게 된다’ 그런 차원이 아닌거예요.
믿음이 있어서 물 위를 걸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내용은 제자들도 결국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악의 세력들을 밟게 된다는 의미가 맞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0장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래야 이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다 악의 세력을 밟으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영적인 존재, 귀신,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무속이 무엇이고, 왜 권력자들이 무속에 빠집니까?
자기 권력으로 안 되는 영적 세계가 두려워서 다른 영적 존재의 힘을 빌려 보겠다는거잖아요?
우리는 이래뵈도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에 대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체를 잘 모를 뿐입니다.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이유를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근거를 본문의 기적을 동일하게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마태복음과 달리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오시는 것 까지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묘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해주기 위해 달려오셨다고 해석하면 이 부분을 대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말이 앞 뒤가 안 맞잖아요.
이건 제자들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데 그 목적이 자기들을 구해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목적으로 물 위를 걸으신다는 걸 반증하는 말입니다.
오늘 기적은 제자들을 구해주시려고 뛰어 들어오셨다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또 단지 신적 권위를 과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속죄와 심판의 두 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죄지은 인간을 볼모로 잡은 것이잖아요?
자기를 심판하려면 똑같이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도 무조건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인간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에 사탄은 이미 끝장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마칠 때까지 한시적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악의 세상에 볼모로 잡고 사망으로 같이 끌고 가려는 사탄을 발로 밟아 머리를 절단 내고 인질들을 구출해 내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 이 기적의 진짜 의미입니다.
이런 것을 잘못 해석하면 근거 없는 믿음 제일주의가 되고 맙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도 바다를 걸을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부족해서 병도 낫지 않는지 탓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 가정의 문제가, 사업의 문제가, 사람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지 낙심하시 마세요.
빨리 낫게 해준다고 더 사랑하시는 것 아니고, 기도한대로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무심한 것 아닙니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이 다 잘 되는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력 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면 양심적으로 사람들은 이상하고 불안합니다.
개그맨 정형0씨가 왜 공황장애에 걸렸다고 합니까?
자기 실력보다 너무 잘 나가니까 그게 그렇게 두렵고, 무대에 서면 팬들이 어느날 실망하고 욕할 게 그렇게 공포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게 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관점은 세속적으로 잘 되는 그런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과 행동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맞춰 나 자체를 복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고쳐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순리와 하나님의 은혜로 잘되는 것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단숨에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 때는 우리 영혼과 마음이 잘 되도록 연단하는 시기로 알고 힘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면 그 역시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유머를 제가 들었습니다. 한번 맞춰보시겠습니까?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적이 뭔지 아십니까?
정답은 ‘밍기적’입니다.
다음,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큰 길이 뭔지 아십니까?
정답은 ‘되는 대로’입니다.
누가 보면 우리 삶이 ‘밍기적’거리며 ‘되는대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고 가는 배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물결이 거세고, 제자리에 맴도는 것 같아도 우리는 예수님의 때에 맞추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32절을 보니 예수님이 배에 오르매 즉시 바람이 그쳤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배는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고 요한복음은 추가로 기록합니다.
시련의 결과로 가장 귀중한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인간이 누군가에게 엎드려 굴복하는 건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그 광대하심과 위엄과 능력을 알게 될 때 기꺼이 복종하는 그 굴복은 치욕이 아닙니다.
어떤 상대를 섬기느냐에 따라 치욕은커녕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발견하고 섬기는 우리가 다 그런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선 성경을 통해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고통이나 시련을 통과할 때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번에 김광해권사님과 은혜자매가 체험한 것처럼이죠.
그리고 그것도 한번에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한번 믿어보려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대번에 마음을 열고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결정을 하기까지 오래 ‘간’을 봅니다.
말씀이 믿을만한 정보인지 분석하고, 주변 사람들의 신앙생활하는게 진짜인지 판단해보고, 그러다 정말 힘든 일을 만나면 한번 매달려 보고.
그렇게 간을 보다 점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성령께서 은혜를 깨닫게 하실 때 결심하고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새가족들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기로 결단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격려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은 꾸준한 기도와 말씀과 삶의 훈련을 통해 요동치 않는 든든한 성도로 자라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정과 국가를 덮칠 듯 출렁이며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해 발로 밟고 잔잔케 되도록 기도하는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2016년11월1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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