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은 그래도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든 안하든 기도가 신앙과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기도를 할지에 대해서 정해진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데 왜 우리한테는 안 가르쳐주시냐고 할 정도였죠.
교회에 와도 기도하는 법에 대해 별로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하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하루 다섯 번 마호메트의 출생지인 메카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며 꾸란을 외우라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백팔배나 천배의 절을 하며 짤막한 경구를 반복해서 읊조리고 카톨릭은 묵주를 돌리며 기도문을 외우라고 가르치죠.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배우기 전에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성령 안에서 자기를 복종시켜 스스로가 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이 기도를 주문처럼 계속 반복해서 읊조리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옳다 생각했던 것들이 죄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산상수훈을 통해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산상수훈에서는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산상수훈은 모든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시고 신자들의 인격과 삶을 재건축하는 기본 틀입니다.
오늘 주기도문 역시 인간의 본성적인 기도를 뜯어고치시는 기본 틀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능력이 있는 영적인 존재에게 기도합니다.
며칠 전 한국인의 밥상을 보았더니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올라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더군요.
산에서 사고 나지 않고, 좋은 삼을 발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도 이런 각종 신령과 불교와 샤머니즘의 문화 속에서 기도를 경험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공을 들여 기도하면 신을 감복시키고,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게 된 다음에도 그 개념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문제는 과거엔 가난하고 아쉬운 게 많아서 기도가 많이 필요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급한 상황이 생기고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벼랑 끝에 선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평소에는 기도로 구할 필요를 별로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옛날엔 기도원에라도 가서 빌었지만 요즘은 병원에 가면 암도 왠만하면 치료됩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기도로 얻어내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한주간 기도하지 않고도 잘 들 사셨잖아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지만 요즘 누가 하루 식량을 구합니까?
냉장고만 열어도 몇 주 정도는 먹고들 살 것입니다.몇 년 정도 버틸만한 자금들도 끌어 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도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주기도문은 척 봐도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좀 한다 해도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오늘 주기도문을 통해 이런 심각한 신앙의 위기인 기도 문제를 잘 풀어보길 원합니다.
기도생활이 우리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 기도가 세상종교의 기도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구분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세상의 종교에서 믿는 신들은 신도들의 형편을 모릅니다.
신들이 신도들의 형편을 알아서 필요를 채워주고 복을 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종교에서 하는 기도는 내게 무관심한 신에게 사정하고, 신의 마음을 돌려 놓아 내 문제를 해결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신이 해 줄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는 상황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 우주 천하에 신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신비하고 초월적인 존재들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 영들입니다.
이들은 신도 아니고, 전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조화를 좀 부리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실 뿐 아니라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 형편을 다 보셔서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관심을 끌면 감동해서 응답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하시잖아요?
부자이고 전능한 아버지를 가졌다면 무슨 근심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
삼성가의 자식만 되어도 세상에 겁날 게 뭐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성도들의 기도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는 비굴하고 얍삭한 기도하고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제일 먼저 뜯어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 기도는 내 욕구를 위해 애걸복걸 매달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자식이 대단한 아버지 앞에서 새로운 사업을 의논하며 조언을 구하고 재정을 지원받고 그런 장면들 보셨죠?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가 그런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의 삶은 장차 사라질 허무한게 아니라 현재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직장도 가정도 우리 장래도 다 하나님나라에 속해 있고 그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한 그런 것들이 하나님나라와 밀착되어 있기에 하나님께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게 당연한 것이죠.
또 어느 부분에서 탈이 났으면 이미 이 문제를 다 알고 계시고 도와주실 방법을 갖고 계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게 기도입니다.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자녀의 문제,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우리는 부지런히 아버지 앞에 가져가서 의논하고 지혜를 구하고 인도하심을 구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실패 없이 경영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아버지가 맞으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아주 명료하게 말씀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양자의 영,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새신자들이 기도를 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입니다.
성도들이 앉아서 한 시간 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세상종교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존재와 인격이 불확실한 대상을 향해 한 시간씩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세상종교에서 하는 기도형태는 대개 기도문이나 경을 반복해서 외우며 공을 들이든지 명상을 합니다.
대상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했고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대화라는 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대화가 된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실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무당들은 잡신이 나타나기 때문에 중얼중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형체도 없고 아무 존재감도 나타내지 않는 하나님께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인식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믿음, 기도하고 난 뒤의 안정감 이런 것들이 따라 오기에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인지한다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5분을 넘기지 못하는 분들은 훈련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을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새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에 대해, 우리의 죄에 대해, 예수님의 속죄에 대해 배우며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기 위해 간절히 원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잘못된 기도습관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각 기도주제마다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하지만 오늘은 기도 전체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예수님 안에서 자녀가 된 성도들은 먼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렇게 기도가 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도들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관심사는 자녀문제도 노후문제도 아닙니다.
사실 신앙은 그렇게 사사로운 것이 최우선이 아닙니다.
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깊은 갈망이 생깁니다.
그것이 나 자신과 세상에서의 모든 필요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 비할 수 없이 탁월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전지전능하시면서 그 자비와 인자가 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에선 사랑과 지복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런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더 높여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함과 명예가 드높아지는 것이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됩니다.
그것이 내게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모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이렇게 되시길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면 자녀인 우리가 격분하게 됩니다.
자식들은 자기 때문에 부모가 기뻐하면 아무리 어려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높힘을 받으셨을 때 우리 안의 기쁨이 그런 것이기에 성도들은 점점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 또한 우리의 관심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이죠.
성도가 되면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다른 새신자가 믿음을 갖는 일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당장 관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간절히 고대하는 것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엔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시현되고 있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대로 다스려지는 것을 성도들은 늘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나라의 성취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기도를 여기에 맞춰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기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를 그 일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주의 나라를 위해 나를 점점 헌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적으로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이고 칭찬이자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다음11절 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들입니다.
일용할 양식과 죄와 시험과 악의 문제들이죠.
이 땅과 성도들의 삶엔 이런 고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이런 현재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이 현실적으로 닿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과도하게 부풀지 않도록 절제하고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탐욕의 고삐가 풀리면 모든 게 충분하고 많아도 불만족합니다.
신자들은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충분히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박하고 조촐한 성도들의 삶은 정갈하고 아름답습니다.
인생의 신비는 좋은 것을 많이 가졌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것 들 중에 아주 조금 부족한 것들이 주는 결핍감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기에 여전히 만족스럽지가 않은 것이죠.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사람은 하루의 음식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무 좋은 것만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은 권장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땅에는 그렇게 좋은 것은 없습니다.
좋은 직장을 구했어도 거기엔 나쁜 사람이 있잖아요?
작은 것을 구하는 게 오히려 좋고, 작은 것에서 감사와 만족을 누리는 게 행복한 삶입니다.
허세와 허영이라는 죄를 버리면 사람들은 작은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큰 일을 도모한다고 모두가 크게 되지도 못합니다.
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말 그대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에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고 했는데, 왜 구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회사가 월급을 주는 게 아니고, 세상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니고, 이 모든 물질과 재원을 만드셔서 뜻대로 나눠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일터을 주시고 건강과 지혜와 지각을 주셔서 일할 능력을 주시고 수입을 벌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것조차 하나님이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국 내 것이 안됩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는 말씀은 미래를 위해 안심이 될 만큼 비축해 놓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일도 일거리를 주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돌보실 거라는 약속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이런 의미들을 믿으시고 매일의 모든 의식주를 주님께 의탁하고 오늘,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는 오늘도 내게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오늘도 내가 하나님과 누군가에게 죄를 끼치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서로를 깍아 내리고 상처주고 헐뜯으며 삽니다.
우리가 이런 죄문제들을 매일 기도해야 하는 것은 죄를 지을 때 죄값을 하나님께 빚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육체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누군가에 대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불법적인 죄를 저지를 때 심판자는 죄값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 죄값을 하나님께 지불할 능력도, 방법도 우리 측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미워했고, 거짓말을 했고, 부정을 저질러 이득을 챙기는 죄를 저질렀다면 그 죄값을 어떻게 하나님께 지불하겠습니까?
한 십만원 헌금하고 퉁치겠습니까, 사흘 금식을 해서 해결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의 용서로 밖에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철저히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예수님의 자비로운 속죄의 공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죄를 지은 상호 간에도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당한 상처와 오해로 인해 끓어 오르는 미움과 원한을 자발적으로 잊어버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더 큰 죄를 용서받아 놓고 왜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냐는 것이죠.
우리가 매일 짓는 크고 작은 죄로 인한 종말적인 심판과 현재 우리 인격의 손상과 환경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죄문제를 매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며 오늘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매일의 기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서 스스로 유혹에 빠지거나 타인이나 악의 세력을 통해 늘 시험대 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시험에 대해 항상 경계태세를 갖추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도처에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세속적인 욕망들로 인한 시험이 다가와 믿음을 갉아 먹습니다.
또 한쪽으로부터는 가난과 곤경과 같은 것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소망을 잃게 합니다.
이런 모든 시험에서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면 쉽게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과 환경을 통해 신자들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누군가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엔 늘 걸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사소한 데 자꾸 넘어져 버릇하면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종류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악에서’보다 ‘악에게서’가 더 정확한 의미입니다.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공격해 옵니다.
단지 신경 쓰이는 상대 정도가 아니라, 삶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대한 풍랑을 만들기도 합니다.
힘센 전사인 마귀와 대항하고 공격을 막아내는 힘은 절대로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이런 종류의 악의 공격은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고 힘있게 설 수 있습니다.
어떨 때 보면 뭔가에 자꾸 휘말린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내 감정이든.
그런데 알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럴 때 악에게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의 광기와 집요함, 그리고 우리의 고삐 풀린 욕망을 안다면 매일 유혹과 시험과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것은 모든 기도를 드린 뒤에 오는 믿음의 확고함과 안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속할 것이고 모든 악은 심판받고, 하나님은 권능과 영광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확신이야말로 우리의 담대함의 근거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이 모든 기도에 아멘으로 마칠 때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이 이뤄질 것에 대한 따뜻한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다만 모든 기도에서 우리는 인내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나약하고 성급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기도를 중지하는 것에 대해 주의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모든 삶의 영역들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기도일지라도 응답되기까지 인내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에 조차도 이미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유익한 연단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모두가 ‘나’가 아닌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통해 우리를 돌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아주 쉽게 ‘우리’가 됩니다.
주님은 성도들은 ‘우리’로 연합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모임과 관계들은 이 세상에서 끝이 나지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영원까지 갑니다.
나의 일용할 양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고, 나 혼자만의 신앙성장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고, 내 집 뿐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오늘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가르쳐주신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느 것 하나 빠진 게 없습니다.
오늘 주기도문이 잘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순종하고 지켜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있지만 계속해서 불순종하면 그 인도와 음성에 점점 무뎌지고 은혜에서 점점 멀어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시지만 우리의 바쁜 삶 속에서 일정한 시간을 정해 꾸준히 기도해야 최소한의 기도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매일 이 주기도문의 틀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우리의 삶으로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돌보심 안에서 안연히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8월7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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