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옛일이 되었지만 월드컵의 영웅 이운0 골키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막는 골키퍼와 같다. 항상 최선을 희망하면서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죠?
우리 역시 최선을 희망하지만 최악을 대비하며 삽니다.
집안에 의사 한명, 변호사 한명, 경찰 한명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사람이 무슨 험한 일들을 당하며 살아가는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방법으로 꾸릴 수 있는 일이라면 최악의 순간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최악의 순간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미 영원을 향하는 선로 위에 놓여있습니다.
죽음도, 죽음 뒤의 삶도 이 믿음의 선로를 달리는 중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천국 종착지이기에 인간의 최악의 난제인 죽음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역사 안에 탑승할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 열차가 모든나라 모든 시대의 역마다 구원받을 사람들을 하나 둘 태우며 달려가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 본문을 쉽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이 일에 우리가 나가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탑승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를 갖고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명령과 임무에 대한 아주 중대한 말씀입니다.
보통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하고, 대위임령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를 삼는게 먼저겠습니까, 제자가 되는 게 먼저겠습니까?
당연히 제자가 되는 것이 먼저겠죠.
그래서 오늘은 제자가 되는 것에 좀 더 비중을 두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16,17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경배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전해야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마태가 분명히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대하지 않고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 늘 ‘랍비여’ 라고 예수님을 불렀던 사람들입니다.
부활하고 영광을 찾으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이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배를 예사로 보면 안됩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숭배하라는 강요에 숱한 유대인들이 죽음을 선택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성도들이 있죠.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기적을 보면 혼란에 빠집니다.
큰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과 괴리되어 의혹이 증폭되고 현실과 조화시키기가 더 힘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마태는 이들의 의심에 대해 숨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기록하고 있죠.
왜냐하면 곧 오순절이 되고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마태가 이 성경을 기록한 때는 이미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기쁨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 다음이기에 당시의 의심이 문제 될게 없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에는 성령을 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까지는 성경의 내용들과 하나님에 대해 의혹과 주저함이 계속 미진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현세의 욕망사이에서의 갈등은 신자들에게 평생 계속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믿는 기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대한 의혹과 주저함은 성령 받으면 사라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사렛의 한 랍비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실 영광스런 성자하나님으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속죄를 완수하고 높아지신 예수님의 위상을 스스로도 이렇게 발표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이양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일하실 때 한번도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으십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결정과 뜻에 순복하셨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이제는 이 땅과 천국의 최고의 결정권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총수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승계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가 아들을 통해서 행사됩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선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에 계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명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이 곧 성부하나님을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이것을 예수님의 대관식, 또는 승귀하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실 것을 오백년쯤 전에 미리 본 사람이 있다는 것 아십니까?
바로 구약성경 시대의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7장을 보면 다니엘이 먼 미래 하나님의 날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이 권세와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의 영원한 나라와 백성들을 세우기 위한 구상과 정책이 오늘 본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텐데 너희가 가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서 한사람 한사람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왜 모든 권능을 가진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한 방에 끝내지 않으시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부르셔서 나라를 세우려고 하실까요?
우리의 인격과 판단에 따라 동의를 얻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강제로 끌어오면 식민지 백성이지 자유민이 아닙니다.
한사람씩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바울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체로 데려오는 것을 이미 해보셨잖아요?
모세를 시켜서 애굽의 종살이하는 이스라엘백성 이백여만명을 단체로 끌어 내와 보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계속해서 불평하고 하나님을 의심하는지 결과적으로 출애굽한 장정 중에는 단 두 명만 가나안 땅을 밟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씩 불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게 하려면 자기가 따라야 할 분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성경을 통해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분, 그리고 흠없이 온전하신 주님의 인격, 우리에 대한 연민과 사랑, 십자가와 부활,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천국, 이런 것들에 대해 신뢰가 될 만큼 배워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는 이것이 진리고 내가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스스로 제자가 되는 것이죠.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생기려면 기본적으로 이해와 앎이 필요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똑같습니다.
당시 제자들도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을 가까이서 보고 판단하고 스승으로 모신 것이지 신령함에 홀려서 제자가 된 게 아닙니다.
포이동에 있는 능0선원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25만명의 인텔리 신도를 거느린 이곳의 원장은 지0스님이라는 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울대 출신으로 알려졌던 분인데 언젠가 사실 자신이 고졸이고 서울대는 입학해 본적이 없다고 발표해 큰 문제가 되기고 했었죠.
이분이 처음에 서초동 상가에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15만원을 내고 능0 선원을 열었습니다.
삼십여년 만에 불교의 한 종단 숫자만큼 엄청난 교세를 이룬 것입니다.
고옥한흠목사님이 생전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능0 선원은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을 벤치마킹 한 것이라고 지0 스님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불상 앞에서 손만 비비던 기복 불교가 불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때로 찌들었던 사람들도 훈련을 받고 공부를 하더니 얼굴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한 선각자의 말인 불경도 이렇게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불경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자 강남의 유복한 부인들이 승복바지를 입고 바인더를 끼고 능0 선원 와서 불법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 되더니 오늘날의 능0 선원이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분들은 한 것이죠.
복만 빌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불제자가 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막상 이 귀한 말씀을 받은 한국교회는 거꾸로 기복종교가 돼서 십자가 앞에서 손만 비비며 복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깨달으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말씀이 우리를 고상하고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연인을 복음으로 초대해 제자가 되게 하는 과정이 얼마나 길고 어려운 일인지 개척 목회를 하면서 절감합니다.
자기가 살아온 세계관과 갈등하며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 수년간 열병을 앓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끊임없이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감동하시며 이 과정을 해내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그 일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에 여기 앉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따르고자 하는 분이 누군지를 알아 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전 인격적인 판단을 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만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감화를 받아 마음 문을 열 때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가르치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분부를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지키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며 죄의 본성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습관이 형성됩니다.
아무리 좋은 일에 대한 소원과 결심도 습관을 이기기는 힘듭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죄의 습관을 의를 행하는 습관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입니다.
신앙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습관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선한 행동을 강조하다보니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교회를 위한 공적이나 선행이 없다면 구원에서 탈락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성인들처럼 공적이 많아 자신이 구원받고도 남아돌면 그걸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라는 것을 만들어 돈 받고 나눠주었습니다.
그게 남아도는 성인들의 공로를 돈 주고 사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에도 없는 타락한 종교놀음에 격분한 마틴루터가 성경대로 돌아가자고 일으킨게 종교개혁입니다.
이렇게 개신교가 탄생하고 올해 5백주년을 맞이하죠.
마틴 루터는 인간의 어떤 선행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평생에 설파했습니다.
착한 행실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마틴루터가 참 불행한 노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대학에서, 교회에서 카톨릭의 공로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믿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치우치게 강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자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비텐베르크시의 시민들은 신앙생활에 방종하고 삶이 엉망으로 타락해버린 것입니다.
설교시간에도 딴 짓을 하는 성도들의 모습에 절망해 설교 도중에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노년에 정말 그 도시를 떠나고 싶어했다고 전해집니다.
수십년간 아무 것도 안한 방종한 신앙의 습관은 다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성경대로 가르쳤지만 지켜 행하게 하라는 오늘 말씀의 뒷부분을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뒷부분까지 되어야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따르는 것은 부단한 훈련과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훈련만이 사람의 습관을 변화시킵니다.
고옥한흠목사님이 평생을 제자훈련에 바쳤지만 마지막에 자신의 제자훈련이 실패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지만 그대로 지키게 훈련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려면 예배를 훈련하고, 성경읽기를 훈련하고, 기도를 훈련하고, 섬김을 훈련하고, 배운 것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서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지켜야 할 것들을 가장 많이 기록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5장에 나온 산상수훈 같은 내용들이 우리가 지키라는 가르침이죠.
‘빛과 소금이 되고, 원수를 사랑하고, 구제는 은밀히 하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겸손하고, 기도생활도 티내지 말라’ 이런 것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며 세상을 이끌어 갈 방법들입니다.
이게 없고 세상사람들과 똑같다면 무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사탄에게서 빼내 올 수 있습니까?
이번 기윤실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두 명 중 한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교회가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교훈대로 가르쳐서 지키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말로만 믿는게 아니라 진짜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교훈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아 내 믿음이 진짜구나라고 스스로도 점점 더 확신해 가는 것입니다.
성도, 하나님의 자녀, 제자 이 말들은 다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되겠지만 제자는 되지 않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자녀만 되고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구원의 역사는 2천년 전에 끝났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제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제 어머니가 소천하신지 벌써 만2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암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실 때 안타까워하신 게 있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노인정 친구분들을 사귀었는데 두터운 교분을 맺기엔 시간이 부족한 거예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 중 몇 명이라도 하나님 앞에 인도할 수 있을텐데 하시며 애석해 하셨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때 떡을 해서 노인분들을 대접하고 기도하며 애쓰셨습니다.단 몇 달이 남아도 한 사람의 제자를 삼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 우리 모두가 평생에 단 한사람이라도 제자를 삼아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엔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모든 것을 양보하고 빈털터리로 살라는 뜻이겠습니까?
말씀을 지켜 본성적인 욕심을 버리고 살면 주님이 삶을 보장해주신다는 말씀이잖아요?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남의 근심과 고통을 내 일처럼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근심을 거둬주신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식들에게 남에게 양보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잃는 것보다 얻는게 더 많기 때문이잖아요.
예수님의 교훈대로 우리를 부단히 연단하고 훈련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고 부르신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진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제자가 되는 복된 짐을 벗어던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자 삼는 영광스러운 짐을 벗어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절에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제자가 되고 제자를 삼는 삶을 사는 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이 땅의 삶의 축복이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어 영광을 누리며 사는 유일하고 복된 길인 줄 믿으시고 다 같이 힘써 제자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017년3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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