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회의 위험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데 있다고 한 신학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닌 신앙은 위험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성부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통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절 까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주간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구원의 최절정이자 신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최절정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제자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이 놀라운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십자가는 그리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의 성경을 읽을 때 눈물을 흘리도록 감정을 유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이 십자가 사건을 역사적인 기사로 전하고 있습니다.
감상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이 십자가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천년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어떻게 정해졌고,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성경은 그것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역사적인 골자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감상적으로 먼저 대하려하면 어느 순간 십자가는 감정을 짜내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바로 이해하고 단순하게 이 사실을 믿을 때, 성령께서 때에 따라 이 십자가의 사랑을 여러 각도에서 느껴지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계시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를 받지 못하고, 즉 성경과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십자가만큼 이상하고 해석이 안되는 사건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계시해주시고 이해하고 더 굳게 믿을 수 있는 축복을 오늘 이시간 풍성히 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유월절을 통해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는 말을 꺼내시고,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릴 거라고 하십니다.
유월절과 십자가 사건이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에서 나누었기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월절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가공휴일인 명절입니다.
우리나라 음력 설날이 해마다 다르듯이 유월절도 종교력에 의해 해마다 날짜가 달라집니다.
올해는 4월11일이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이 유월절에도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명령받은 대로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인 무교병과 쓴 나물과 포도주를 마십니다.
유월절 기간에 이스라엘 모든 빵집에선 발효시킨 부드럽고 폭신한 빵은 팔지 않습니다.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유월절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전통을 따라 포도주와 누룩 없는 빵을 드셨죠.
그리고 그것이 죄인을 위해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로 기념하라고 하십니다.유월절 식탁이 성찬식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지금도 유월절에 유대가정에서는 두 시간 분량의 예식문을 가족들이 대화식으로 주고 받으며 읽습니다.
이 예식문에 아이들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나요’라고 물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뒷날, 너희 아들딸이 너희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너희는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 주어라. ‘주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자유민이 되게 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 광복절 같은 날이죠.
그때 이들을 해방시키지 않으려는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는 장자재앙입니다.
이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집집마다 어린 양을 잡아 문틀의 위아래, 좌우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묻어있는 집은 심판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건너가겠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고 피를 바른 이스라엘집들은 사망을 면했지만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당했고 바로왕은 그제서야 이스라엘을 내보내줍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 날에 죽으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결부시키면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사탄과 사망에 종이 된 불행한 운명이고 자기 힘으로는 결코 거기서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들여다 보면 다 비루하고 비참합니다.
어제 인터넷뉴스를 보니 삼성이재0 부회장고 김0전차관의 구치소 생활에 대한 기사가 있더군요.
사람이 가진 권력과 허세를 벗겨내면 이렇듯 다 불의한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구해주시고 본래의 영광을 되찾아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문제인 것입니다.
창조주를 향해 사람들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반역하잖아요?
첫 유월절에 심판하시는 여호와가 지나실 때 속죄양의 피가 필요했던 것도 이스라엘사람들의 그런 똑같은 죄 때문이였습니다.
유월절 양이 죽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되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속죄해주시고 나서야 비로서 인류에겐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바른 집만이 사망을 면했듯이 예수님의 이 대속은 그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이 말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날이 바로 우리의 유월절입니다.
이런 생명의 진리를 모든 세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수천년에 걸쳐 이렇게 역사를 만드시고 그 안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을 펴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도록 철저하고 세밀한 작업을 해 놓으신 것이죠.
그리고 때가 되어 예수님을 통해 이 모든 예언과 모형적인 사건들이 그대로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과정에서 구약성경의 가장 많은 예언들이 성취됩니다.
이것은 주님이 고의적으로 예언대로 하려고 맞추고 연출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오늘 예고하시죠.
그런데 반면에 예수님을 죽일 당사자들, 흉계를 꾸미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였던 당국자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오히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였습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명절에 잡아서 죽이면 큰 일이 날 수 있습니다.
군중들이 이로 인해 폭동을 일으키면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던 로마군대들의 진압이 들어오고 이 정치인들에겐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죽으셔야 했기에 그들이 유월절은 피하자고 결의했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밀고하는 사건이 다른 한쪽에서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국 유월절에 잡히십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떻든 하나님은 계획하신 날, 유월절에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잡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유월절양 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이 진리가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단순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믿으시고 구원받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주변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살펴보며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마태는 십자가사건과 함께 일어난 주변의 상황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주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태도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의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이 객관적으로도 메시야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수님을 죽일 흉계를 꾸몄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예수님께 고가의 향유를 붓는 여인을 보고 분노하는 제자들은 진짜 제자 맞습니까?.
삼년동안 따랐던 예수님을 은돈 삼십개에 팔아먹는 가룟유다는요.
이런 통속적인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은 이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상황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온 땅에 우뚝 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죄인들은 이렇게 부산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 주변에 늘 모여 있던 열두제자들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는 성도들의 무리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누구하나 슬퍼하지도 위기감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점에 흥분해 누가 높은 지위를 받을 것인지를 놓고 싸웠다고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거 때마다 이해가 안되는건 당선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분들도 대거 출사표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그런 정치적인 행보가 어떻게든 권력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권력에 대한 인간의 선망은 아담이후 뿌리내린 죄성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봤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겐 현실적인 야망과 계산도 깔려 있었던 것이죠.
다음 장에 보면 당장 체포되는 예수님을 혼자 두고 뿔뿔이 도망가기 바쁜 제자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오직 자기를 위한 행복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현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신앙으로 인해 불편과 불이익이 오고, 돈이 될 일, 또 더 세상적으로 잘되거나 흥미 있는 일이 생기면 뿔뿔이 도망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과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진 아무리 좋은 동기로 예수님을 따랐다해도 현실 앞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예수님께 삼천만원을 쏟아 붓는 여인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엔 여인의 향유보다 더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 바치잖습니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들의 생명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쏟아 붓고 순교의 제물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반드시 체험되어져야 비로서 이런 참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여인을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리셨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이 나사로의 가족들과 예수님은 돈독한 관계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서 자주 묵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제자들과 나누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는 그로 인해 언니 마르다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었죠.
예수님의 말씀에 늘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마리아만이 며칠 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이 마지막 주에 마리아는 자신이 아껴 두었던 나드향유를 가져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몽땅 부어드립니다.
본문에는 이 향유의 가격이 나오지 않았지만 누가복음에는 삼백데나리온이라고 가격을 밝힙니다.
삼백데나리온은 요즘 돈으로 한다면 삼천만원 정도입니다.
이 고가의 나드향유는 대개 여자들이 혼수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버리자 제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돈이 삼천만원이잖아요.
제자들이 분개하며 왜 이렇게 귀중한 걸 허비하냐며 마리아를 몰아 부치죠?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을 허비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를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허비로 보입니다.
주일예배도 시간낭비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귀한 것도 주님 앞에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하나님께 받은 태산같은 은혜와는 비교가 안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최고의 헌신은 자신을 위한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걸 알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소란을 떨며 분개하는 제자들에게 마리아가 주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며 마리아의 믿음과 행동을 높여주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리아의 헌신이 온 천하, 모든 세대에 복음과 함께 전해진다니 상상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향유의 비싼 가격 때문이 아닙니다.
장사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믿음,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알고 자기의 최선을 다한 마리아의 헌신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마리아처럼 아름다운 헌신을 합니다.
성경과 교회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크던 적던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성도들의 헌신도 기억하시고 마리아를 높여주셨듯이 반드시 높여주신다는 것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누가복음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제자를 택하실 때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은 얼마나 신중하게 제자를 선택했냐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기도 안에는 장차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유다에 대한 곤혹스러움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처음부터 주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고 일찍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왜 가룟유다를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도의적인 책임을 예수님께 돌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그가 불행한 최후를 마치는 원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성경을 배우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척에서 누리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겐 기회였습니다.
다만 유다에겐 어디가나 돈이 약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일행의 회계를 맡아 관리하며 돈에 손을 댔다고 요한복음은 밝힙니다.그러나 누구든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남의 돈에 손 안대고 산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설령 예수님을 밀고하고 은 삼십을 받았다 해도 유다가 우리보다 더 죽을 죄인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이용해 돈을 벌수만 있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속을 뒤집어 보면 우리도 그럴 소지가 다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불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비극일 뿐입니다.
유다가 목을 매어 죽을 때 땅에 떨어져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든, 예수님을 모른 채 잘 먹고 잘 살다 죽었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 뭐가 다르겠습니까?
자기가 지은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예수님의 속죄를 안 믿고 모든 죄를 안고 심판대 앞으로 가야하는 죄인들의 종말을 유다를 통해 보아야 합니다.
이 불행한 가룟유다의 사건 역시 구약성경에 자세하게 예언되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은 주전 천년경에 이미 이 사실을 시로 남겨 놓았습니다.
시편 41장 9절입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나와 함께 떡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거라고 하신 것은 이 예언을 의식하신 것입니다.
또 군중들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가룟유다는 제사장들에게 돈을 받죠.
그때 받은 액수가 은 삼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을 보고 때늦은 후회를 한 유다는 그 돈을 다시 제사장들에게 갖다 주고 목을 매어 죽습니다.
이 돈을 돌려받은 제사장들은 이것은 피흘린 값이라 성전고에 넣을 수가 없다며 그 돈으로 토기장이 소유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듭니다.
이 사실을 미리 예언한 내용이 스가랴서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다소 생경한 명령을 내리시죠.
스가랴서11장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이런 예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무오하다는 데 경외심이 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힌트들이 구약성경에 수없이 보석처럼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대본들은 이런 특별한 상황들로 정교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부분들이 퍼즐조각처럼 들어맞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아,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오래 역사를 통해 준비해 놓으신 바로 그 분이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요한복음 14장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
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언이나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을 통해 미리 알려 놓으신 것은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세월호가 인양되는 모습을 보니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아픔을 디디고 우리 국민들도 이젠 원칙을 따르고 정의를 행하고 공익을 추구하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해 봅니다.
우리에겐 바닷속에 깊이 가라앉아 끌어올리기에 난관인 문제들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를 바지선에 단단히 묶었듯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구원의 문제를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야 합니다.
또 삶의 모든 힘겨운 일들 또한 이 믿음에 묶고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구하며 꿋꿋이 헤쳐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오늘 구원의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기고 마리아처럼 우리 믿음에 분량에 따라 최선의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주님께서는 헌신하는 성도들을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아멘.
2017년3월2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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