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천국시민의 법 (마태복음5장13절-20절)

남수연 2016. 7. 19. 19:06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일대기와 설교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복음서를 펴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언제고 생생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지혜와 신성과 흠모할 인품은 다른 방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과 주님의 말씀 속에서만 주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낙담한 제 마음을 들여다 보시며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을 느끼고, 한없는 용서와 자비로 가득 찬 주님의 시선을 상상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성경 속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체험하려하면 즉시 큰 위험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성경 밖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체험하려면 마귀는 즉각적으로 다채로운 미끼로 우리를 낚아 챕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신 사람들의 관심인 세상이야기와 사람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꽉 찬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자녀들이 성공하고 병이 나은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이런 면에서 볼 때 설교자들이 더욱 기피하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완성함으로 세상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청사진이자 그 나라 국민들이 지켜야 할 헌법조항과 같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좋아하는 에 대한 설교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몇 줄 읽다보면 산상수훈의 복이 우리가 좋아하는 그 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실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이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처럼 아름답게 들리지만 우리는 그거 말고 다른 복은 없나요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 이것이 복이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이게 복처럼 안 느껴질까요?

우리가 원하는 복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복에서 한참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복을 구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복을 구하려면 너희는 내게 와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첫설교를 이렇게 복있는 사람으로 잡으셨잖아요?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복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복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점보러 가는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을 염려해서 가지 않습니다.

망해가는 회사를 걱정해서가 아니고, 내 다음 직장을 물으러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그런 차원의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창조 된 본래의 심령을 되찾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무한한 은택을 누리며 영원히 사는 복입니다.

팔복은 진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복의 사람만이 가진 특별한 심령입니다.

성도들이 이미 얻은 천국의 성품이 아직도 공존하는 옛죄성과 세상의 악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팔복의 심령입니다.

그래서 복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아름다운 것 같지만 현실에서의 아픔과 시련이 느껴지잖아요.

팔복의 심령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천국시민이라는 증거입니다.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린 마음,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 받음, 이것들이 바로 이 땅에서 신자들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죠?
오죽하면 그 강팍한 인간본성이 온유해졌겠습니까?

예수님이 팔복의 설교를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은 모세를 통해 받은 신명기의 복이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 땅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최상의 권세와 영화가 바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상속할 국민들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고, 율법의 준수자도 아니라고 일축하십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로워진 마음과 인격이 천국시민의 증표라는 것이죠.

현대의 신자들은 어떨까요?우리도 그들처럼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누리는 현세적인 혜택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받을 구원을 확신했던 유대인들처럼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과도하게 천국시민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요?팔복의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고 인내하고 충성하는 그런 삶이 없다면 너무 예수님의 십자가에 무임승차해 가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팔복의 심령과 오늘 본문인 소금과 빛, 그리고 율법의 완성에 대한 말씀은 연결되게 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팔복의 새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고, 산상수훈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성령께서 팔복의 성품을 우리에게 이식해주셨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다, 빛이다 라는 것은 무슨 상징이나 닉네임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구원하신 천국자녀들을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분명하신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은 썩어가고 있고, 어둠에 갇혀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하고 개선하는 용도로 우리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이죠.

고등어에 소금 간 하듯 세상 속에 켜켜이 성도들을 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만의 문명을 만들고 살아간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들을 선하게 통치하고 계십니다.

악이 인간을 지배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마귀를 섬기며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고통은 창조주하나님의 근심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왜 우리 속을 썩이는지 아십니까?

너희도 맛 좀 봐라입니다.

엇나가는 자식들로 인한 근심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아버지시기에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태양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고 그러시잖아요?

우리 같으면 얄미워서 복을 주고 싶지 않을 배신자들에게도 당장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게 창조주의 드넓은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십니다.

제가 요즘 운동삼아 밤에 올림픽공원에 가서 자주 걷습니다.

며칠 전 초저녁에 길을 나섰는데 하늘이 어쩜 그렇게 선명한 코발트색으로 아름답던지 가슴이 정말 심쿵했습니다.

그 하늘 밑에 올망졸망한 창문마다 따뜻한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고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사거리가 북적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흐뭇하고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며 괜히 눈가를 적셨습니다.

아직 이 땅에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량하고 바르게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분명한 창조주의 바램이십니다.

 

지난주 프랑스의 휴양지를 피로 물들인 트럭테러범의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선과 악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동화에서는 선이 이기지만 현실에서는 악이 이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악이 다 집어 삼키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약자들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인정하는 사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건국과 동시에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어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가 없어요.

미국이 1926년에, 영국이 1928년에서야 여성들의 기나긴 싸움 끝에 겨우 여성참정권을 받아 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작년에야 여성에게 처음 투표권을 주었죠.

1948년 이승만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전직 목사인 의원의 기도로 시작한 우리나라 제헌국회는 건국과 동시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이승만정부이기에 세계역사에 없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비하나 인권 문제가 오히려 퇴보되고 있는 것 같지만요.

당시 국가와 지주들만 갖고 있던 토지를 농민들 소유로 돌려준 것도 이대통령이 기독교정신을 갖고 시행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토지는 왕의 소유였고 왕이 하사해서 지주들 소유가 된 것입니다.

땅이 국민들에게 돌아온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대통령의 평가가 어떻든 우리나라가 이나마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기반을 다지는 데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조사한 신학자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것은 유일하게 기독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독교정신만이 세상에서 악을 몰아내고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평화와 행복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그걸 우리 성도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 해 나가라는 강력한 예수님의 의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과 삶의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던 종교개혁시대에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어둠을 벗어나 깨끗하고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는지 역사가 증명합니다.

 

실제적으로 성도들은 곪아 가고 썩어가는 세상을 개선하고 치료하는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안심하고 거래해도 괜찮아’,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정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짠맛이 너무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침투하는 것마다 다 짠 맛이 나는 것처럼 소금이 된 성도들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짠 맛으로 변화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짜게 하지 못하는 짠 맛을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경계하십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소금 없이 어떻게 세상이 부패하지 않게 하겠냐는 뜻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 자신을 다시 짜게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가난한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돌소금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불순물이 섞여 돌처럼 굳어진 암염에서 나트륨성분이 빠져나가면 맨 돌만 남게 되고 그런 돌소금은 길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돌을 집어다 어떻게 다시 짜게 만들겠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소금물에 담가둔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가진 소금의 맛, 부패를 막는 성결한 천국시민의 맛을 스스로 잃어버리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짠맛을 잃은 소금은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거라고 모질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짠맛을 잃은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지 않습니까?

여름수련회에서 장로가 여중생을 성추행했다는 기사로 인해 주님의 교회는 또 한참 발에 밟힐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라는 것을 세상이 알기에 짠맛이 전혀 없는 밍밍한 우리를 보면 더 실망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빛이라면 어두운 세상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믿음을 남에게 크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믿고 싶을지 모릅니다.

나의 공공연한 믿음으로 인해 마찰을 빚고 다른 이들의 죄와 지옥을 상기시키는 부담스러운 일을 안 하고 싶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인 조엘 오스틴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일 년에 사 백억 원을 벌어들이고 방 여섯 개에 화장실 여섯 개, 엘리베이터 3개가 있는 백억 원짜리 집에 삽니다.

오스틴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은 과거 장장 이백주간 동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달렸습니다.

이 분이 전에 CNN방송에 초대되어 유명방송인 레리 킹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냐는 질문에 조엘오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 돈 노, 그것은 내가 대답할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레리 킹이 다소 의아해하며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가 천국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오스틴이 대답합니다.

아이 돈 노, 하나님이 판단하시게 해야 합니다.’

너무나 뻔하고 쉬운 답을 목사인 그가 왜 그렇게 교묘하게 얼버무려 대답했을까요?

공영방송에서 떳떳하게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어두운 세상에 참빛을 소개할 수 있는 얼마나 값진 기회입니까?

그는 불신자와 타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비겁한 대답을 준비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조엘오스틴처럼 믿으면 세상은 우리를 신사적이라고 환영합니다.

종교는 다 좋은 거라면 아무도 교회를 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예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으면 더 좋아합니다.

그래도 기독교와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왠지 껄끄럽고 불편한 생각을 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건 천국시민이 아니다라고 못박으십니다.

등불을 켜서 등잔대 위에 얹어 두는 것이 정상이지 그걸 말 속에다 감춰두겠냐는 것입니다.

말은 옛날에 쌀을 계량하던 큰 그릇입니다.

등잔대에 얹어서 온 집에 비추는 게 목적이지 말 속에다 감춰서 그 좁은 통 속만 비추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유일한 빛이신 주님 자신을 불붙여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비춰서 어둠에 다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라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를 감출 수 없듯이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을 아는 참 빛은 결코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빛을 추상적으로 얼버무리지 말라고 예수님은 정확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 빛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 신앙은 도덕만능주의가 아니고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도덕과 사랑의 행위가 없이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이 진실이라고 입증하겠습니까?

아무리 기독교의 이치가 진리이고 사실이라 해도 교회가 비윤리적으로 보이면 그걸로 땡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를 잘하고, 교회경영을 탁월하게 하는 목사라도 스캔들 한번 일어나면 끝입니다.

착한 행실, 의로운 행실이 있어야 우리가 믿는 성경은 참말이 되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고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율법 무용론, 행위 무용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 나눈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것에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요즘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옛계명이건 새계명이건 그것을 지키는 것에 크게 신경을 안 씁니다.

구약성경에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들이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중 한 개의 계명도 버릴 게 없습니다.

주일예배를 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버리겠습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버리겠습니까?

단 하나도 버리거나 안 지켜도 되는 게 없잖아요.

오히려 예수님은 구약성도들에겐 성령님의 도움 없이 지켜야 했기에 율법의 수위를 낮게 잡았지만 신약성도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본 마음까지 알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옛계명도 새계명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천국의 헌법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말씀을 깨닫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인데 그들은 영적인 지식들을 깨닫고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영적인 지식들을 다 인정하고 좋아하고 믿기에 과연 이들이 거듭난 신자들인지 분별이 어려웠습니다.

사도요한의 후반 생애는 거의 이 영지주의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 영지주의에서 교회를 지키는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힘들여 삶과 태도를 바꾸지 않아도 깨닫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영지주의는 죄성을 가진 성도들에게 얼마나 달콤한 유혹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종류의 신앙이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조엘 오스틴목사와 같은 긍정의 힘을 믿는 낙관적 설교를 듣고 만족하게 돌아갑니다.

인생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오스틴목사는 자기는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멋지시고 당신도 멋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시고, 당신은 멋지다는 솜사탕 복음을 듣고 면죄부를 얻고 돌아갑니다.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뒤 평생 죄와 싸우며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성경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구원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고 그 깊은 지식에 놀라며 깨달은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며 만족하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시는 것은 깨달은 진리가 지킴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죽어라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던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문맥적으로 볼 때 신자들의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올바른 행실을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슬쩍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올려 놓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의로운 행실, 외형적인 율법준수에 열을 올리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심령까지 주님의 법도를 즐거워하며 따르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정말 세상에 종말이 있고, 우리가 죽은 뒤의 영원한 세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고 영생의 복을 누릴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날에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들이 얼마나 우리를 선망하고 시기할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우리가 영광스런 신분으로 빛나는 영생에 들어갈 때, 영원한 어둠에 떨어질 영혼들은 이를 갈며 하나님의 심판에 항의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산상수훈 7장에도 보십시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냐며 따지잖아요.

그 때 우리와 저들을 구별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받고 거룩한 성령을 따라 하늘의 헌법을 지키며 얻어진 거룩하게 성화 된 모습입니다.

천국시민으로서의 고결함과 기품과 의로움의 표식이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소속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날에 구원받은 자들과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서 확연히 구별되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 얻을 자와 영벌을 받는 자가 똑같이 악하고 똑같이 죄로 범벅이 되어 있다면 누가 그날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우리의 집요한 죄악들을 다 가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평생 말씀을 지키며 노력한 것만으로 구원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흰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세마포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지킬 수 없지만 성도들은 지켜낼 수 있는 것이고, 꼭 지켜나감으로 천국인격을 갖춰가야 합니다.

뼛속까지 천국시민이 되도록 힘써서 지켜가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만 가능하지만 성화는 각자가 힘써 순종해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죽이고 새사람이 더 성숙하고 강해져 세상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성경보고 기도할 시간도 없어서 더 이상 신앙에 힘쓸 여력이 없다면 남들보다 더 하나님께 의지해서 이런 삶을 풀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허덕이는 삶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밖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앞으로 삶은 더 나아지지 않고 갈수록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특히 문제가 되는 청년세대의 경우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 25개국을 상대로 10년전에 비해 수입이 더 나아졌냐는 설문조사 결과

소득이 나아지지 않았거나 더 낮아졌다는 비율이 무려 70%에 달했습니다.

미국 같이 잘 사는 나라가 열명 중 여덟명이 소득이 줄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미래는 우울한 그림자를 던져줍니다.

그런 중에 우리의 노후를 생각하고 우리보다 더 힘들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돈을 더 벌고, 더 준비를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 전에 이미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격려하며 안심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행하는 우리를 반드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닮아서 선량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깨끗하고, 진실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성도만의 짠맛과 밝은 빛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아름다운 천국시민으로 함께 세워져 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