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특정종교에 편향된 말이라 해피 헐리데이라는 말로 대신한다는군요.
예수님 생일에 예수라는 말이 종교편향이라고 못쓰게 한다니 참 웃기는 나라 같습니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미국사람들 옷색깔도 빨강과 초록으로 바꿔입고 분위기는 얼마나 잡습니까?
형형색색의 전구로 화려하게 장식한 미국 주택가의 모습들 우리가 영화로 많이 보았잖아요?
어느 집은 들어와서 즐기라고 아예 문을 열어 놓는 집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 그런 집들 입장료가 보통 6,7천원이라고 하네요.
크리스마스에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지워버리고 사람들끼리 즐기는 낭만적인휴일날로 바꿔버리고 있는 것이죠.
이미 우리나라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가 된지 오랩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이 2천년전 오늘 이 땅 어느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 지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잠깐 말씀을 살펴보려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진지하게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인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탄생을 기념하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워있는 그 아기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지상의 삼분의일이 어떤 방식이든 그분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사람들은 인간으로 태어나 한 아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성탄의 밤 2천년전에 있었던 그 밤 천사가 전해준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을 다시한번 살펴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만을 경배하길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 오늘 영광을 올려드리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고 그 자리를 되찾아 온 우리들은 이 밤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21절 말씀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가브리엘천사가 마리아와 정혼했던 요셉에게 나타나서 한 말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된 것을 알고 요셉이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그 때 천사가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하며 그 태어날 신비한 아기가 누구인지를 요셉에게 알려 준 말입니다.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 아기의 이름까지 정해 줍니다.
전 옛날에 예수라는 이름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굉장히 신비로운 이름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사렛 출신이라고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철수’ 정도의 이름이랄까요?
오늘 21절 말씀이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시는 이 의미심장한 순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철수라 해라.
갑자기 김이 빠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꼭 예수라고 지어져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흔한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란 뜻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과거 애굽의 포로에서 구원하신 전능자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역사 속에서 위기마다 구해주신 사실이 구약성경에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압제받고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그들은 자녀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구원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드디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을 지금 천사가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였어야 했던 것이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저들이 고대했던 바로 그 구원의 하나님, 자기 백성을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니라.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한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야 암호가 들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 안에는 모든 인류가 처해있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필요없는 데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고 한다면 우스운 얘기지요.
이 말씀 속에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냐면 각자의 죄에서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우리가 다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참담한 인생을 살게 되었고, 죄의 지배에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각 짊어진 인생의 짐은 힘겹고 무겁습니다.
요즘 연예인들이 토크쇼에 나와 충격고백을 많이 하더군요.
저런 사람들이 저렇게 바닥까지 내려갈 때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고 김자옥권사님의 남편 오승근씨는 한 때 빚이 70억일 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빚 무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탤런트 강부자씨의 경우 남편이 외도하는 것을 알면서도 참고 살았다고 합니다.
여자에게 그게 사는 것이었겠습니까?
집도 차도 돈도 건강도 다 잃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까지 내려 갔었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SBS뉴스에 보니 구직자들이 올 한해 자신의 삶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간난신고’를 가장 많이 꼽았다고 하죠.
가난하고 쓰디쓴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1위는 간발의 차이로 다사다망을 뽑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바빴다는 것이죠.
그리고 2위가 간난신고 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바쁜데다 가난하고 고생만 죽어라고 했다가 되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가 그렇게 암울한 일년을 보내는 동안 노년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돈을 쓰지 못해 소비지수가 사상최대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인간의 미래가 점점 더 좋아질 거라던 20세기를 풍미했던 낙관론에 기대를 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죄의 결과인 이런 생애의 고단함과 불행과 불안과 염려로 부터 인간은 구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곤고하고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구원을 받은 줄 믿습니다.
다들 그러시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결코 환경이라는 죄짐에 짓눌려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이생의 모든 곤란에서 구할 것을 약속하시잖습니까?
욥기 5장 19 하나님은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시편 91장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 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오히려 환난에서 건져지고 결과는 더 영화롭게 해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를 건져주시고, 더 나은 환경을 주셨는지 우리 모두가 다 증인 아닙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것은 고통스런 환경 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라는 타고난 죄의 골치덩이로 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환경 뿐 아니라 생애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 더 적극적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주범은 ‘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극도의 이기적인 ‘나’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전에 제가 순식간의 교통사고로 눈앞에서 남편을 잃은 동료교사의 장례식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멋쟁이던 그 선생님이 검은 색 브라우스에 스카프를 늘어뜨리고 치마를 멋스럽게 받쳐 입고 앉아계신데, 그게 더 애처로워보이더군요.
그래, 아무리 슬퍼도 운명을 달리한 남편보다도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이 더 신경쓰이는 게 인간이지.
타인의 아픔에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만 실은 슬픈 상가집 분위기에다 슬쩍 나에 대한 연민을 떠올리며 우는 것이 우리의 눈물이듯이 저 분도 그런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우리가 왜 다들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태생이 죄인이라서 이렇구나.
그런데 죄인이라는 걸 알고 나니 절망이 아니라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과 앞뒤가 딱 들어맞잖아요.
알고 나니 감추려고 했던 깊은 곳에 숨겨둔 부끄러운 나로 인해 끙끙거리던 그 죄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는 순간 정말 나를 짓누르던 죄 짐이 툭 떨어지는 걸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께 나가서 자수하고 두 다리 뻗고 자는 자유를 우리가 흐드러지게 누리고 있잖아요?
물론 여전히 못난 나를 후회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서기 위해 힘을 내고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또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도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보니 사람에게 죽음이 얼마나 인생의 무거운 짐인지를 매일 느낍니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할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죽기 전까지의 고통’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가족의 죽음을 곁에서 보며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위엄 앞에 한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가장인 남자들은 ‘남겨질 가족의 처지’를 우선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생이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뒤의 심판이 두렵다고 사람들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된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어머니를 보니 몸은 좀 고통스럽고 생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전혀 없으시더군요.
죽음이라는 한순간의 문턱을 넘어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나라,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거기에 들어간다는 믿음이 정말 확고하시고 두려움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이런 모든 죄의 결과와 고통에서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언하시고 이루셨다는 것을 바로 2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오늘 나신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대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언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7백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선지자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당시 극악한 왕 므낫세 앞에서 그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영원히 의롭게 통치하실 메시야 왕국이 올 것을 당당하게 예언하다 톱에 잘려 죽은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된 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흠없이 완전한 생애를 사시고 흠없는 제물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고 승천했다는 것, 그 분이 다시 오시고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증거하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가 그리스도냐는 빌라도의 말에 네가 말한대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스스로도 구원자이심을 밝히시고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라는 것을 부정하면 죽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증거를 따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밤은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리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오셨다는 더 아름다운 진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보우먼박사라는 사람이 인도 켈커타의 나환자 수용소에 예배당 하나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82세가 넘은 한 할머니가 거기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믿지 않던 한 사람이 그 할머니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던 종교의 많은 남자 신들과 여신들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소.”
우리는 하나님이 죽음으로 사랑하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오늘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가 함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오늘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임마누엘의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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